넷플릭스 영화 ‘버드 박스’를 보고
전동차가 오는 소리가 들린다. 스크린도어는 아직 굳게 닫혀있다. 띠롱띠롱- 열차가 멈춰 서자 사람들은 앞다퉈 문 앞으로 몰려들었다. 직관적으로 알았다. 주춤했다가는 파도에 휩쓸리듯 뒤로 떠밀려가기 딱 좋아 보였다.
스크린도어가 열립니다. 안내음이 들리자 무수한 머리들이 물결치며 입장했다. 그 모양이 흡사 일 차선 도로에서 만난 정주행 차와 역주행 차 같았다. 최대 가속으로 서로를 향해 돌진해 결국 둘 다 박살 나겠지. 퍽! 나는 몸에 와닿는 충격을 고스란히 느끼며 지하철에 승차했다.
출입문 닫힙니다. 어깨를 더 굽혀 옆 사람과의 간격을 넓혀보지만 그마저도 실패했다. 좁고 밀폐된 공간이라 타인의 한숨조차 거북스러울까 숨도 안으로 꾹 눌러 내쉰다. 그래도, 무사히 탑승했으니 그걸로 됐다. 들숨에는 안도감이 차올랐다.
이곳은 참, 안전한 버드 박스다. 삶의 가치를 논하는 열띤 토론도 아름다움과 정의가 무엇인지 사고할 필요도 없다. 창문 밖 공간은 빠르게 돌아가는 필름 같다. 도전과 쟁취란 시설은 없다. 나는 내 생활권을 바라보며 안락함과 편안함에 취해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뜨면 목적지에 와 있을 거다. 스크린도어 설치 덕분에 일상은 더욱 안전해졌다. 전동차가 달려오면서 생기는 먼지의 유입도 막았고, 소음도 줄었다. 무엇보다 열차 선로 추락사가 대폭 감소했다.
추락의 원인은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 불의의 사고다. 본인의 의지완 다르게 발생된 참극이다. 두 번째는 의도된 행동이다. 나는 그 고의적인 죽음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영화 버드 박스에서는 자살하게 만드는 존재가 등장해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린다.
보는 순간 사람을 죽고 싶게 만드는 실체 없는 ‘그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것의 정체는 밝히지 않는다. 가령, 그들이 목격한 것이 천국의 아름다운 형상이었다면, 이해하기가 좀 더 쉽다. 멋진 환상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그 세계로 가고자 했다면, 육신이 방해가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죽음은 고통을 수반한다. 사는 것도 나의 알을 깨고 나오는 일이요, 죽는 것도 매한가지다. 고통을 피해서는 더 나은 세계로 진입할 수 없다. 원하는 것을 얻고 싶다면 눈가리개를 벗고 이젠 보아야 한다.
영화에서는 ‘그것’을 마주하는 것을 두려움과 공포로 표현했다. 그 존재 앞에 서게 됐을 때 어떤 이들은 변화가 없고, 다른 이들은 고통에 몸부림친다. 욕망을 키워줄 매개체를 보고도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 정신이상자들과 그들만의 세상에서 이미 완전한 천국을 이룬 시각장애인들만이 재난의 현실에서 안전할 수 있었다.
어쩌면 버드 박스에서 말하는 죽음은 영혼이 추구하는 이데아 세계로 가려는 움직임은 아닐까?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절대 선 앞에서 나의 온 지성과 미덕을 동원해 불멸과 불사로 가려는 몸부림이 극한의 고통으로 치환된 것이다. 그것은 누군가가 대신해 줄 수 없다. 영화에서 사람들의 죽음이 타살이 되어서는 안 되는 명확한 이유기도 하다.
아침 9시 15분, “스크린도어가 열립니다. 뒤로 한걸음 물러서 주십시오.”라는 안내 음성을 다시 듣는다. 나는 이 열차가 나를 압구정로데오역이 아닌 다른 세계로 데려다주길 기도했다. 실없는 바람이었다. 전철은 역에 멈췄고, 잠시 뒤 스크린도어가 열렸다. 순간, 눈물이 왈칵 나서 콧등이 시큰해졌다. 안온한 일상을 살고 있었다. 슬플 이유도 낙심할 상황도 없었다. 그런데도 서글픔이 목울대를 탁 치고 올라오고 있었다. 내리지 않을 용기는 나지 않아서 문이 닫히기 전에 서둘러 하차했다.
이루지 못한 작가의 꿈이 나를 망령처럼 따라다녔다. 처음엔 그것이 나를 보든 말든 상관없었다. 망령은 언제나 말이 없었고, 어떤 해를 가하지도 않았다. 생활 형편이 좀 나아지면 그때 글을 쓰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나름 잘 살고 있었다. 불만도 가끔 생겼지만 대체로 참을 만한 것들이었다. 상사와의 트러블, 고객과의 다툼, 밥시간을 훌쩍 넘겨 식사하는 일, 그마저도 먹지 못했던 날들. 이런 것들쯤은 사회생활의 고충으로 넘길 수 있었다. 돈을 벌고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은 나중에 하면 된다고 나의 눈가리개를 더 꽉 조여 맸다.
좋아하는 것만 하면서 살 순 없다. 그러나 싫어하는 것만 할 필요도 없다. 작가가 꿈이라면 글쓰기 수업을 받고, 작문 연습을 하고, 사고력과 상상력을 키웠어야 했다. 하기 싫은 것이 내 하루의 반을 차지하더라도 나머지 반은 하고 싶은 것으로 채우면서 살아야 했다.
관성은 힘이 세다. 야근은 날 지치게 하고 쓰러져 잠들게 한다. 피곤을 핑계로 글은 쓰지 않는다. 망령은 날 울리기나 하지 날 고통에 빠뜨리지 못한다. 난 이대로도 충분히 잘살고 있다고 맥주로 하루를 달랜다. 이젠 ‘그것’을 봐도 아무렇지 않다.
스크린도어가 닫히고 열차는 출발했다. 나는 다시 안전하다. 흘러간 옛 노래를 들으며 그냥 살아보자 한다. 외선 순환 열차의 창밖에는 새들이 날아다녔다. 무리 지어 다니는 모습이 금세 시야에서 멀어졌다. 새소리는 문에 가로막혀 들리지 않았다.
이윽고 전동차가 멈추고, 출입문이 열렸다. 스크린도어가 덜컹거리더니 힘겹게 열렸다. 흔들거려 위태롭게 보이기도 했다. 쿵! 철로 아래로 굉음이 울렸다. 나는 놀라 아래를 쳐다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바람만 일렁였다. 무언가 다녀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