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만나요_23화

by Breeze

재학은 어미의 말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입이 열개라도 할말이 없었다.


“내가… 땅에 농사 짓는다고 자식농사를 너무 망쳐버렸구나… 너무 망쳐버렸어…”


“……죄송해요 어머니”


“뭐가 죄송한지는 아냐 지금?”


“……”


“그럼 넌 왜 여기에 있냐 지금.”


“…?”


“느그 짝이 그러고 힘들어 나자빠질려고 하고 있을때 넌 여기서 다 죽어가는 어미 붙잡고 뭐하고 있냐 이말이여. 니 마누라 안 넘어지게 옆에서 꼭 붙들고 있어도 모자를판에.”


“예…?”


재학은 얼이 빠져 답했다. 복순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니한테 내가 언제 집에 와서 농사 지으라든? 주기적으로 와서 얼굴 비추고 애미 봉양하라던. 이미 날개 달아 내보낸 자식 자주 얼굴 보고 싶은 맘 나도 없다. 그게 효도가 아니라 니 입에 들어가는거 신경쓰고 니 가족 입에 들어가는 거 신경 써서 잘 먹고 잘 사는게 효도여. 애미란 사람은 하는 일이 자식 걱정인 사람이다. 니가 못나서도 아니고 내가 시간이 많아서도 아니야. 니가 하루에 세끼 밥 제때 챙겨 먹으면 반찬 걱정하는 게 어미여”


“…”


“.…니 성격에 경찰서까지 들락거린 건 믿기지 않다만… 사내놈이 바깥일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어머니…”


재학은 생각지도 못한 어머니의 말에 눈이 커졌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랬다. 단 한번도 제 어미는 집에 오지 않는다. 어미를 안 챙긴다 탓한적이 없다. 그저 타지나간 자식의 끼니 걱정, 잠자리 걱정이었을 뿐. 여태 무슨 불안과 부담을 안고 살았던가.


재학을 가만히 바라보던 작게 한숨을 쉬곤 복순이 물었다.


“그래… 사돈댁은 문제 없는거래냐”


“그래야죠… 가서… 뭐든 도와야죠…”


“그래… 니 식구다. 니 가족이고. 니가 건사 해야해 가장이면. 난 이제 살아서 너 얼굴 더 안 보고 죽어도 된다. 그러니 그거 신경 쓰지 말어. 어디가도 배 곯지 말고, 가족 배 곯게 하지 말고.”


재학은 어머니의 말에 울음을 참으며 답했다. 아마 오늘이 진정으로 마지막이 될 수도 있을 터였다.


“예 어머니…”


“그리고 한가지 약속해. 이 어미랑”


“네?”


“니 누이. 죽을 때까지 니 식구다, 니 가족이다 생각해라. 무슨 일이 있어도.”


“…형수님이요?”


“그래 니 누이.”


“……네”


복순의 말을 재학이 이해하게 된 건 몇 개월이나 지나 광석의 전화를 받은 뒤였다.


***


바람이 기분 좋게 몸을 식혀주는 2월의 어느 날. 뜻은 봄이 온다는 입춘이지만 겨울에 가까운 한 해의 첫번째 절기. 그런 날이었다. 다가올 무더운 여름을 걱정하기보다 따스하고 찬란한 봄을 생각하게 하는 그런 날. 순이는 고개를 들었다.


겨울이라기엔 따뜻하고 봄이라기엔 추웠지만 옷을 갖춰 입으니 딱 좋았다. 순이는 몸을 돌려 새 집을 둘러 봤다. 조금 낡았지만 열심히 닦고 광내고, 부수고 올리니 제법 괜찮아졌다.


“수희야 어때, 좋지?”


“…네”


순이가 고개를 내려 어깨를 짚고 있는 아이를 따스히 내려다본다.


복순은 유산의 대부분을 순이에게 남겼다. 제 누울 자리와 파먹을 땅이 없으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재무 앞으로는 딱 그만큼의 땅과 그동안 살아왔던 집을 남겼고 재학에겐 아무것도 가지 않았다. 나머지 유산으로 순이에게 안동에 집 한 채 나머지는 전부 현금으로. 순이가 복순을 보내고 광석에게 이 얘기를 들었을 땐 이미 본인 앞으로 등기까지 처리가 된 지 한참 후였다. 전부 광석이 도맡아 했다고 한다. 재무가 눈으로 누이 앞으로 된 집문서를 볼 때 잔뜩 쫄았다는 광석의 농담에 순이도 살짝이나마 웃을 수 있었을 정도로 시간이 많이 흐른 뒤였다.


광석은 또 복순이 죽은 뒤 재학이 남기고 간 편지를 순이에게 전했다. 편지엔 본인은 이미 집에서 많은 걸 가져왔으니 더 가져올 게 남았을 리 없고 어머니가 남긴 것 다 응당 누님의 것이니 괜한 생각 마시라는 말과 함께 살아 생전 찾아 뵙지 못한 염치로 지금은 어머니께 인사드리기 어려울 것 같으니 어디에 모셨는지만 알려달라고 적혀있었다. 추가로 주소와 연락처로 어떤 일이든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도.


웬 안동이냐 싶었지만 광석의 친척들이 모여 산단다. 몰랐지만 복순도 아는 사이라고. 여자 혼자 몸으로 모르는 곳에 가서 뿌리내리긴 쉽지 않으니 광석의 친척들 사이에 껴서 지내라는 복순의 마음이었다. 광석도 오만정이 떨어져 조만간 근무지를 옮긴다고도 하고.


잠깐이지만 순이의 마음에도 드는 작은 동네였다.


“수희야 배 안고파?”


“…고파요”


출생신고도 안하고 데리고 있었단다. 할 수가 없었겠지. 순이는 아이의 땟국물을 벗겨주며 가족이 되리라 결심했고 실제로 가족이 되었다. 이름은 순이가 지었다. 이 아이는 자신처럼 순하게 말고 행복하고 누구보다 반짝반짝 본인 하고 싶은데로 빛나게 살았으면 했다. 적어도 순이가 아는 가장 빛나는 사람은 딱 한 사람뿐이었다. 순이는 이름을 짓는데 고민하지 않았다.



그때 뒤에서 무언가 닫히는 소리가 났다. 자동차 인 것 같다.


순이와 수희가 몸을 돌려 대문 앞으로 난 길가를 바라봤다. 거기엔 한 여성과 남성이 서있었다. 남성은 그 자리에서 가만히 순이를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고 여성은 점점 가까워졌다.


희수였다. 조금은 살이 빠졌나. 하지만 여전히 아름답고 해사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천천히, 천천히 걸어온 희수는 순이를 두 팔 벌려 조용히 꼭 끌어안았다.


“언니…”


“희수야…”


둘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둘은 그렇게 한참을 안고 있었다. 이내 떨어진 희수는 고개를 숙여 한 아이를 바라보곤 그 앞에 쪼그려앉았다.


“니가 수희구나…”


“…안녕하세요…”


고개 숙여 인사하는 수희.


“안녕, 희수이모야.”


손을 들어 수희의 머리를 쓰다듬는 희수였다. 잠시 따사롭게 수희를 바라보던 희수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근데 어떻게 왔어? 사돈어른은?”


“광석씨가 남편 학교에 전화해줬어요. 아버진 이제 괜찮으셔요 은퇴하시긴 했지만 먹고 사는 데는 큰 지장 없으시고… 남편도 복직했고 걱정 마셔요”


“다행이다…”


“언니… 괜찮으시죠?”


“…응 괜찮아”


순이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던 희수는 한번 더 순이를 끌어안는다. 순이의 온기를 기억하겠다는 듯이.


“저희 이제 광주로 가요.”


“광주…?”


“이이 발령이 그 쪽으로 났어요. 바로 가봐야 해요”


“아…”


“언니”


“…?”


희수가 순이의 양 손을 잡고 눈을 맞춘다.


“전화할게요 그리고 이이 발령 끝나면 다시 서울로 갈거예요. 우리 약속 기억하죠?”


“약속…? 아”


“내가 언니 서울 구경 시켜주겠다고 한 약속”


“응 기억나”


“서울에서 만나요. 우리 꼭.”


“…그래”


짧지만 화창하고 찬란할 봄을 앞둔 2월의 어느 날 순이와 희수는 서로를 바라보며 누구보다 환하게 웃었다.


길었던 겨울이 가고 곧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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