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기 싫고 그러나 이해해야만 하는
지난 주말, 남편과 8살 딸과 함께 나의 어린 시절 살았던 동네를 다녀왔다. 산을 깎아 만든 동네였다. 우리 집은 그곳에서도 맨 꼭대기에 있었다. 반지하였는데 창문을 열면 깎은 산이 맞닿아 있어 벽이나 다름없었다. 열 살 남짓한 어린 내가 매일 오르내리기에 버거웠던 기억이 있다.
지금 나는 동탄에 산다. 옛날에 살던 그곳에 비하면 안전하고 깨끗한 신도시 그 자체다. 처음에는 새로 이사한 동네라 생소하기도 했고, 동탄맘이라는 단어에서 주는 이미지 때문인지 차가운 느낌이었다. 적응을 끝낸 지금은 타지에 갔다가 고속도로 이정표에 ‘동탄’이 보이면 집에 왔다며 안심한다. 어쩌면 내가 동탄맘이 된건지도 모른다며 농담을 하곤 한다.
문득 어린 시절 살던 동네에 가보고 싶어졌다. 까마득하고 그저 멀게만 느껴졌던 그곳은 막상 가보니 한 시간이면 도착했다. 생각보다 더 좁고, 더 어둡고, 캄캄했다. 우울함이 가득한 그곳을 거닐며 이곳은 아직 어린 시절 이대로인데, 말 그대로 탈출하여 동탄에서 살고 있음에 다시금 감사함을 느꼈다.
살았던 빌라에 가보았다. 우리가 살았던 지하 2호는 현재 아무도 살지 않았다. 하긴 딱 보아도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어둡고 축축한 복도. 범죄가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 아이도 무서움을 느꼈는지 어서 다른 데로 가자고 했다.
그러다 문득 여기로 아이 셋을 데리고 이사를 온 당시 엄마는 어땠을까 궁금해졌다. 지금의 나는 39살이고 그때의 엄마는 마흔 중반정도 되지 않았을까. 나의 지금 나이와 얼추 비슷할 것이다. 아빠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생판 처음 와보는 인천에 엄마는 초등학생 아이 셋을 데리고 이사를 왔다.
아빠는 가끔 집에 들어왔지만 돈을 벌어다주지 않았다. 엄마는 일을 하지 않았다. 매일 쥐 잡듯 우리 삼남매를 잡는 엄마를 원망했다. 엄마는 돈을 왜 안 버는 걸까. 엄마가 집에 안 들어왔으면 좋겠다. 등등. 동네를 거닐다보니, 당시 엄마를 향한 마음들이 올라왔다. 그러다 문득, 같은 빌라에 살던 아주머니들 세 명과 엄마가 싸운 한 사건이 생각났다.
비가 와서 지하인 우리 집이 물에 잠겼다. 위층에 사는 빌라 아주머니들이 지하에서 알아서 해결하라 외면했다. 엄마는 화를 냈고, 자세히는 기억이 안 나지만 결국 서로 머리채를 쥐어 잡고 흔들었다. 지켜볼 수밖에 없는 어린 나는 그저 무서웠다. 이성을 잃은 엄마가 싫었고, 세 명이서 한 명에게 달려들다니 불공평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두려웠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엄마가 화를 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모든 문제의 원인은 엄마의 신경질적인 태도라 여겼다.
하머 터면 계속 그렇게 생각할 뻔했다. 이번에 다시 오기 전까지 말이다.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다시 찾은 이곳 빌라에서, 그 시절의 엄마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것은 절규였다. 아이들을 필사적으로 지키려는, 가난과 외로움과 멸시와 무시에서 살아남으려는 몸부림이었다. 자식들과 자신을 지키겠다는 그것 하나로 버틴, 마음이 너덜 해진, 그러나 물에 젖은 종이처럼 흐물거리는 그조차 내던져버린 불쌍한 여인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리고 영원히 모를 뻔했다. 몰라도 어쩔 수 없긴 했다. 그러니 지난 주말의 이 깨달음이 얼마나 감사한가. 불현듯 어린 시절 동네가 생각났고, 그곳에 가서 지금 내 나이의 엄마를 만나다니.
엄마는 여전히 마음에 화병이 가득하다. 엄마에 대해 말하려면 밤을 새도 모자라다. 지독한 가난으로 인한 마음의 병적인 증상들이 잔재해 있다. 가득하다.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기 싫은 구석들이 만날 때마다 늘 보인다.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보며 정죄하는 나는 또 죄책감이 밀려온다. 이번 추석에는 엄마를 보지 않아야겠다 한동안 생각해 왔다. 한번 폭발하면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나를 만나면, 엄마 역시 힘들어한다는 좋은 핑계거리도 있었다.
어김없이 찾아온 추석. 누구에게는 기대고 싶은 친정이지만 나에게는 내가 품고 보살펴야 하는 곳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어느 순간 감정의 소용돌이와 에너지 소진으로 바닥이 날 것이기에 친정에 늘 긴장모드로 가야 한다. 그조차 그만하고 싶어졌다. 친정을 다녀오면 아이와 남편에게 나의 부정적인 에너지가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가지 말아야지 생각했다. 어린 시절 그 집을 다녀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엄마와 아빠를 우리 집으로 초대하기로 했다. 2박 3일을 함께 하기로 결심했다. 결심? 그래, 결심으로 될 일은 아니다. 가난과 그로 인한 잔재는 겪어본 사람만이 안다. 남들의 행복을 끌어내려야만 하는, 같이 지옥으로 가야 하는, 그리하여 어떻게든 올라가려고 하는 그런 것들. 작은 것 하나에도 자격지심이 담겨있고 아이처럼 툭하면 감정을 폭발하고 소리를 내지르며 울어버리는, 곪을 대로 곪은 상태들.
그러나 그것들을 껴안아보려 한다. 물론 한 번에 온전히 해낼 수 없다. 즉각적인, 완전한 해결을 바라지 않는다. 할 수 있는 선에서 그 시절 불쌍한 엄마를 안아주려 한다. 나만의 페이스를 유지할 힘이 지금의 나에게 생겼으니,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한 걸음 다가갈 것이다. 엄마를 안아주고, 공포에 가득 찬 무기력한 열 살의 나를 안아주려 한다.
상처는 생길 것이다. 권투에서 상처 없이 승리할 수 없다. 그렇다고 아무 것도 안 하며 썩을 수는 없다. 약을 바르고 덧 바르고 또 바르면, 어제보다 단단해지는 나를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