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팍팍한 인생을 살아가는 모두를 위한 글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어릴 때부터 난 막연히 해외에서 살고 싶었다.
부모님을 따라 미국에 가 산 1년은 내 인생 통틀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다.
내가 소소하게 잘하는 것들이 그곳에선 대단한 것이었다. 내 모든 능력들이 존중받는 곳이었다. 그 달콤함에 빠져 내 마음속의 고향은 항상 그곳이었다.
한국에 와서 난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되었다. 내가 잘하던 그림, 피아노 모두 한국에서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교과서를 많이 읽고 시험을 잘 치고, 그런 것들만 중요해졌다.
반 아이들의 시선에서 난 이상한 사람이었다. 호르몬에 급격한 변화가 있었던 중학생 남자아이들은 나를 놀린답시고 교복, 가방, 필통 등 창밖으로 던졌다. 그 폭력이 어디에서 나온 줄도 모르고 난 그저 내 물건들을 찾으러 밖으로 나갔다.
외국에 너무나도 나가고 싶었다. 내가 나로서 존중을 받고 싶었다.
그렇게 대학교 때부터 죽어라 일했고, 홍콩에 교환학생을 갔다. 숨통이 트였다. 다신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코로나가 왔다.
한국에 돌아왔을 때, 난 이방인이 되어있었다.
코로나로 할 일이 없는 난 그냥 다른 친구들을 따라 임용을 준비했고, 어느새 교사가 되어있었다. 해외 대학원이란 꿈을 꾸면서.
교사 3년을 하면 유학휴직을 할 수 있다는 말에 일단 그 3년을 채웠다.
되돌아보면 종종 벼랑 끝에 있었다.
누가 교사가 꿀직업이라 했던가.
물론 나가 내 자신을 힘들게 만들었다.
일단 한국을 탈출해야겠어서
닥치는 대로 언어공부를 했다.
중국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영어
매일이 이 네 언어의 반복이었다.
그리고 누구에게 말해도 이름을 못 외우는 코스타리카라는 곳에
아무도 모르는 Upeace라는 대학원에 합격했다.
평화교육이라는 생소한 전공으로.
인생은 역시 모든 것을 예측할 수 없다.
유학휴직은 3년에서 8일을 못 채웠다는 이유로 1년이 미루어졌고,
덕분에 1년을 더 사귄 남자친구는 누구보다 각별해졌다.
이젠 이 남자친구는 내 신체 일부가 되었다.
그래서 난 그냥, 그저, 언제나 그랬든 그저 내 충동적으로 이 남자친구와 함께
누구도 이름을 못 외우는 코스타리카라는 곳에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때부터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누구라도 우리를 먹여 살려야 했고,
그 대상은 영어도 스페인어도 어려운 내 남자친구는 아니었다.
그래서 무작정 눈에 잡히는 것들을 다 시작했다.
책을 출판하겠다는 생각에 한 달 내내 도서관에 박혀 책 두 권을 완성했다.
유튜브 채널을 개설했고,
미리캔버스 기여자로 그림도 그렸다.
책 출판은 생각보다 어려워 브런치로 경로를 바꾸었고,
미리캔버스 기여자 수입은 0이고
유튜브는 상업화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여태껏 사업에 손을 안 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호기롭게 장학금에 도전했고 보기 좋게 떨어졌다. 씁쓸한 마음의 파도가 쳤다.
아침저녁이 바빴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스페인어, 프랑스어, 중국어, 영어를 공부하고
유튜브, 미리캔버스, 브런치를 하고.
영상 제작하고, 그림 그리고, 글 쓰고.
나를 갈아 넣었지만, 수익은 없었다.
그런데 자꾸 돈 들어갈 곳은 많았다.
비자, 보험, 비행기티켓.
열심히는 사는데, 보상이 없는 느낌이었다.
매일 1명씩 느는 유튜브 채널을 보며.
난 조금 더 밝은 내일을 기약했다.
지난 20여 년간, 뭐 하나 쉬운 것은 없었다.
하지만 난 꾸준히 성장했고,
현재 눈에 띄게 결과가 있지는 않지만.
결과가 내 노력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니까.
그렇게 현재에 한 번이라도 더 웃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