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장비 하나를 들여오기까지

요청서와 품의서, 그 두 문서에 담긴 이야기

by 구매가 체질

새로운 연구 아이디어가 떠오른 순간, 연구원의 머릿속에는 이미 그림이 그려집니다. 이 실험을 현실로 만들어 줄 반짝이는 새 장비의 모습 말이죠. 하지만 그 아이디어가 우리 연구실에 현실로 도착하기까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두 통의 중요한 '편지'가 쓰입니다.


첫 번째 편지는 연구원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구매요청서'이고, 두 번째 편지는 그 목소리에 응답하며 신뢰의 증거를 쌓는 '구매품의서'입니다. 오늘은 이 두 문서가 어떻게 우리의 연구를 현실로 만드는지, 그 여정을 함께 따라가 보려 합니다.


첫 번째 편지: 연구원의 꿈을 담는 '구매요청서'

모든 것의 시작은 연구원의 '필요'입니다. 구매요청서는 단순히 "이거 사주세요"라고 말하는 신청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연구가 한 단계 더 나아가기 위해, 지금 우리에겐 이런 능력을 가진 도구가 필요합니다"라고 자신의 비전을 담아 보내는 첫 번째 편지입니다.


훌륭한 구매요청서는 특정 제품의 이름이나 모델 번호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왜(Why)'라는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예를 들어, 최근 한 연구원분이 보내온 요청서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신규 항암 후보물질의 유전자 발현량을 정밀하게 분석하기 위해 새로운 유전자 증폭 장비(PCR Machine)가 필요합니다. 기존 장비가 노후되어 결과의 재현성에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서는 아래의 성능을 반드시 만족하는 장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구체적인 성능, 즉 '스펙(Spec)'이 이야기처럼 펼쳐집니다. 0.2ml 튜브 96개를 한 번에 다룰 수 있는 '96-well 블록'은 기본이고, 여러 온도 조건을 동시에 테스트하며 최적의 실험 조건을 빠르게 찾기 위한 'Gradient 기능'은 필수라고 말이죠. 또한, 실험 시간을 단축시켜 줄 초당 4℃ 이상의 빠른 '온도 변화 속도'와, 여러 연구원이 쉽게 사용할 수 있는 '터치스크린' 방식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덧붙였습니다.


이처럼 모델명 대신 '필요한 능력'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요청서는, 우리 운영팀에게 'A사 제품'이라는 정해진 목적지가 아닌, '최고의 PCR 장비'를 찾아 떠날 수 있는 자유로운 지도와 나침반을 건네주는 것과 같습니다.


두 번째 편지: 신뢰의 과정을 증명하는 '구매품의서'


연구원의 꿈이 담긴 첫 번째 편지를 받고 나면, 이제 운영팀의 여정이 시작됩니다. 시장을 조사하고, 여러 기술 파트너(공급사)와 소통하며 최적의 솔루션을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그 여정의 결과를 담아 회사의 최종 결정을 구하는 문서가 바로 두 번째 편지, '구매품의서'입니다.


구매품의서는 "가장 싼 것을 찾았습니다"라고 보고하는 문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 솔루션을 선택하기까지, 얼마나 합리적이고 치열한 과정을 거쳤는지"를 증명하며 신뢰를 쌓는 기록입니다.


이번 PCR 장비 도입을 위한 품의서는 이렇게 작성되었습니다.


"연구팀의 요청에 따라, 필수 성능을 만족하는 세 곳의 전문 공급사로부터 제안을 받았습니다.


오랜 파트너인 A-Bio는 1,550만 원을 제안했습니다. 성능은 훌륭했지만, 우리의 예산을 조금 넘어섰습니다. 새롭게 접촉한 C-Sci는 1,480만 원으로 매력적인 가격을 제시했지만, 납품까지 6주가 걸려 4분기 과제 시작에 맞추기 어려운 위험이 있었습니다.


최종적으로 저희가 선택한 곳은 (주)XX바이오입니다. 그들은 연구팀이 요청한 모든 성능을 완벽히 충족하면서도 1,450만 원이라는 합리적인 가격을 제안했습니다. 무엇보다, 다른 곳들이 1년의 보증 기간을 제시한 반면, 이곳은 2년의 무상 보증을 약속했습니다. 이는 장기적인 안정성과 총소유비용(TCO) 관점에서 우리 회사에 가장 유리한 조건이었습니다."


이처럼 품의서는 하나의 결정을 내리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투명하게 보여줍니다. 이는 우리가 회사의 자산을 얼마나 소중하고 현명하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증명하는, 신뢰의 다른 이름입니다.


연구실에 새로운 장비 하나가 들어오는 것은, 이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주고받는 두 편의 진심 어린 편지가 있기에 가능합니다.


연구원의 전문성으로 쓰인 좋은 '요청서'가 좋은 '질문'이 되어 길을 열면, 운영팀은 신뢰의 과정으로 채운 '품의서'라는 좋은 '답변'을 가지고 돌아옵니다. 이 건강한 대화가 계속될 때, 우리의 연구는 더 단단한 기반 위에서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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