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기술'로 말해야 한다.
제가 몸담고 있는 산업에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바이오 의약품 위탁개발생산(CDMO) 기업의 경쟁력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나오는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생산 설비 용량이 몇 리터죠?" 거대한 스테인리스 스틸 바이오리액터의 규모가 곧 기업의 힘을 상징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게임의 룰이 바뀌고 있습니다. 단순히 더 큰 공장을 짓는 '규모의 전쟁' 시대는 저물고, 얼마나 정교하고 복잡한 기술을 다룰 수 있느냐가 새로운 경쟁의 축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오늘날 바이오 CDMO 산업의 지형을 바꾸고 있는 혁신은 크게 세 가지 축으로 움직입니다. 첫째는 '무엇을' 만드느냐의 문제, 즉 항체-약물 접합체(ADC)나 세포·유전자 치료제(CGT) 같은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의약품(모달리티)의 등장입니다. 둘째는 '어떻게' 만드느냐에 대한 해답, 즉 세포주 개발부터 생산 공정 자체를 혁신하는 플랫폼 기술의 발전입니다. 마지막은 이 모든 과정을 더 똑똑하고 효율적으로 만드는 '디지털 두뇌', 즉 바이오파마 4.0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전환의 물결입니다.
이제 CDMO는 단순한 '공장'이 아니라, 신약 개발의 성패를 좌우하는 '기술 파트너'가 되어야 합니다. 미래의 승자는 누가 될까요? 그 힌트는 바로 이 세 가지 기술 혁신의 파도를 누가 더 능숙하게 타 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최근 바이오 업계의 스포트라이트는 기존의 단일클론항체를 넘어선 새로운 형태의 치료제, 즉 '차세대 모달리티'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저마다 독특한 제조법을 요구하기에, CDMO 기업들은 이제 '어떤 약을 전문으로 만들 것인가'라는 전략적 선택의 기로에 섰습니다.
ADC는 특정 암세포만 찾아가는 항체에 강력한 항암 약물을 결합한 '스마트 폭탄'과 같습니다. 이 기술의 핵심은 생물학(항체)과 화학(약물)의 정교한 결합에 있습니다. 문제는 이 약물의 독성이 매우 강해, 작업자의 안전과 오염 방지를 위한 특수 격리 시설이 필수적이라는 점입니다. 기존 항체 공장을 개조해서는 절대 만들 수 없는 이유죠. 삼성바이오로직스와 론자(Lonza) 같은 글로벌 리더들이 ADC 전용 생산 시설에 막대한 투자를 하는 것은 이 시장의 잠재력을 방증합니다.
CGT는 환자의 면역세포를 꺼내 유전적으로 업그레이드한 뒤 다시 주입하는, 말 그대로 '살아있는 약'입니다. 이 치료제는 '공정이 곧 제품'이라고 불릴 만큼 제조 과정 하나하나가 약효와 직결됩니다. 특히 환자 한 명 한 명을 위한 맞춤형 생산이 필요해, 환자 간 시료가 섞이지 않도록 독립된 생산 공간을 확보하는 등 극도로 정교한 관리가 요구됩니다. 바이러스 벡터(유전자 전달체)를 안정적으로 생산하는 기술은 이 분야의 가장 큰 진입 장벽이자 핵심 경쟁력으로 꼽힙니다.
코로나19 백신으로 우리에게 익숙해진 mRNA는 '속도'가 최대 무기입니다. 세포 배양 없이 유전자(pDNA) 설계도만 있으면 시험관 내에서 신속하게 mRNA를 합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번 검증된 플랫폼만 있다면, 설계도만 바꿔 감기 백신을 만들다 암 백신을 만드는 식으로 빠르게 전환할 수 있죠. 다만, 만들어진 mRNA를 불안정하지 않게 지질 나노입자(LNP)로 감싸는 제형화 기술이 매우 까다로워, 이 분야의 노하우가 CDMO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아무리 좋은 신약 후보물질이 있어도 이를 효율적으로 대량생산하지 못하면 그림의 떡에 불과합니다. 바이오 의약품 생산의 심장부인 '엔진 룸'에서는 지금 어떤 혁신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바이오 의약품은 살아있는 세포, 주로 중국 햄스터 난소(CHO) 세포를 이용해 만듭니다. 이 세포가 얼마나 많은 약을 만들어내느냐가 생산성을 좌우하죠. 최근에는 크리스퍼(CRISPR) 유전자 가위 기술을 이용해 원하는 유전자를 세포 DNA의 가장 이상적인 위치에 정확히 삽입, 안정적으로 많은 약을 생산하는 '슈퍼 세포'를 만듭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수만 개의 세포 후보군 중에서 최고의 '챔피언'을 신속하게 찾아내는
고처리량 스크리닝(HTS) 기술은 수개월 걸리던 개발 기간을 몇 주로 단축시키는 일등 공신입니다.
거대한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 대신, 미리 멸균된 비닐 백 형태의 '일회용 바이오리액터'를 사용하는 것이 새로운 표준이 되고 있습니다. SUS의 가장 큰 장점은 유연성입니다. 한 제품을 생산하고 백만 교체하면 바로 다음 제품 생산에 들어갈 수 있어, 세척과 멸균에 드는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이고 교차 오염 위험도 원천 차단합니다. 여러 고객사의 다양한 제품을 생산해야 하는 CDMO에게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인 기술이죠.
전통적인 의약품 생산이 재료를 한 번에 넣고 끓이는 '배치(batch)' 방식이었다면, 연속 생산은 재료를 계속 투입하면서 완성품이 끊임없이 나오는 '조립 라인' 방식에 가깝습니다. 이 방식은 품질을 일정하게 유지하고 생산 효율을 극대화하며, 더 작은 공간에서도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아직 초기 단계지만, 바이오 공정의 미래를 바꿀 게임 체인저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이제 바이오 공장은 단순히 물리적인 설비의 집합이 아닙니다. 공정 곳곳에 설치된 센서와 이를 분석하는 인공지능(AI)이 결합해 스스로 학습하고 최적화하는 '스마트 팩토리'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생산이 다 끝난 뒤에야 제품의 품질을 검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PAT는 공정이 진행되는 동안 실시간으로 품질을 모니터링하는 '감시 카메라' 역할을 합니다. 이를 통해 문제가 생기기 전에 미리 공정을 조정하여 배치 실패율을 극적으로 낮추고, 일관된 품질을 보장합니다.
PAT 센서가 수집한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하는 것은 AI의 몫입니다. AI는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미세한 데이터 패턴을 학습해, 특정 조건에서 생산 수율이 어떻게 될지 예측하고 최적의 생산 레시피를 추천해 줍니다. 덕분에 값비싼 실제 실험 횟수를 줄여 개발 시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습니다.
디지털 트윈은 현실의 바이오리액터를 컴퓨터 안에 그대로 복제한 '디지털 쌍둥이'입니다. 연구원들은 이 가상 공장에서 수천 번의 시뮬레이션을 통해 최적의 조건을 찾아내고, 작은 실험실 규모에서 대규모 생산으로 넘어갈 때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미리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습니다. 삼성바이오로직스가 스케일업 과정에 이 기술을 적극 활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바이오 CDMO 시장의 변화는 명확합니다. 더 이상 값싼 노동력이나 거대한 설비만으로는 경쟁할 수 없습니다. ADC, CGT, mRNA와 같은 차세대 의약품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특화된 기술력, CRISPR와 연속 공정 같은 혁신적인 플랫폼 기술,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디지털 역량이 미래 CDMO의 성패를 가를 것입니다.
Lonza가 고부가가치 모달리티에 집중하는 전략을 펼치고, 삼성바이오로직스가 압도적인 생산 능력과 신기술 투자를 병행하는 '투 트랙' 전략을 구사하는 것은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읽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신약 개발사들은 CDMO를 단순한 하청업체가 아닌, 자신들의 성공을 함께 이끌어갈 '기술 파트너'로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복잡하고 험난한 신약 개발의 여정에서, 어떤 기술 파트너와 손을 잡느냐가 그 끝을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몸담고 있는 또는 당신이 운영하는 CDMO는 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 곳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