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구매 실무책은 없을까?
의욕 넘치던 신입사원 시절부터, 새로운 과제가 주어져 막막했던 팀장 시절까지, 저에겐 오랜 습관이 하나 있습니다. 답이 보이지 않을 땐 무작정 서점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특히 광화문 교보문고의 드넓은 경제경영 서가는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저의 성지와도 같았습니다.
마케팅, 브랜딩, 재무, 데이터 분석… 어느 분야든 서가에는 현업 최고 전문가들의 경험이 농축된 훌륭한 실무서들이 즐비합니다. 당장 내일부터 써먹을 수 있는 템플릿과 성공 사례, 그리고 먼저 그 길을 걸어간 선배들의 실패담까지. 책 몇 권만 탐독해도 든든한 무기를 얻은 기분이 들곤 했습니다.
그런데 구매(Procurement)와 공급망 관리(SCM) 분야로 발걸음을 옮기면 풍경은 사뭇 달라집니다. 이 분야에서만큼은, 현장의 갈증을 시원하게 해소해 줄 ‘실무 지침서’를 발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입니다.
제가 찾을 수 있었던 책들은 대부분 아래 세 가지 중 하나였습니다.
두꺼운 대학 전공서적: 물류 원론, SCM의 역사와 철학, 복잡한 수요 예측 모델을 다루는 책들. 학문적 깊이는 있으나, 당장 내일 납기를 어긴 공급사에게 보낼 이메일 작성법을 알려주진 않습니다.
자격증 수험서: 국제 공인 구매 전문가(CPSM) 같은 자격증 시험 합격을 위한 요약집. 이력서에 한 줄 추가할 수는 있어도, 우리 회사에 맞는 구매 프로세스를 설계하는 방법은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원론적인 자기계발서: ‘협상의 대가가 되는 법’, ‘성공하는 비즈니스 대화법’ 같은 책들. 물론 도움은 되지만, 수십억짜리 장비 계약의 특수조항을 검토하거나, 수백 개 부품의 재고를 관리하는 구매 직무의 특수성을 반영하기엔 턱없이 부족합니다.
결국 어제도 저는 빈손으로 서점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대체 왜? 이토록 중요하고 전문적인 분야에, 현장 실무자들을 위한 책은 없는 걸까?’
오랜 시간 현장에서 구르며 제가 내린 결론은 이것입니다. ‘구매’는 하나의 직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똑같이 ‘구매팀’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지만, 사실은 수만 가지의 서로 다른 직업에 가깝습니다. 만능 가이드북이 존재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 ‘이질성’에 있습니다.
구매의 역할은 크게 ‘산업의 종류’와 ‘기업의 성장 단계’라는 두 개의 축에 따라 완전히 다른 옷을 입습니다.
바이오/의료기기 산업에서 구매 담당자는 과학자이자 품질 전문가입니다. GMP 규정에 따라 원자재의 성적서(CoA)와 밸리데이션 문서를 검토하고, 모든 공급망 과정을 기록하고 추적해야 합니다. 속도나 가격보다 중요한 것은 ‘안전과 신뢰성’입니다.
반면, IT/로보틱스 스타트업에서 구매 담당자는 프로젝트 매니저(PM)에 가깝습니다. 신제품 개발(NPI) 일정에 맞춰 해외의 희귀 부품을 구해내고, 하루가 멀다 하고 바뀌는 BOM(자재명세서)을 관리하며 개발팀과 함께 달려야 합니다. 여기서는 ‘속도’가 생명입니다.
기업의 규모에 따라서도 미션은 극적으로 변합니다. 초기 스타트업의 구매가 ‘어떻게든 구해내는 소방수’의 역할이라면, 성장하는 스케일업의 구매는 ‘확장 가능한 시스템을 만드는 설계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대기업/상장사의 구매는 ‘글로벌 리스크를 관리하는 전략가’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이처럼, 당신이 처한 상황과 고민은 너무나 구체적이고 개별적입니다. 대기업의 글로벌 소싱 전략에 관한 책은, 당장 내일 쓸 연구 시약을 법인카드로 결제해도 되는지 고민하는 스타트업 담당자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모두를 위한 책’을 쓰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대신, 바로 ‘특정한 당신’을 위한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서점의 책들이 너무 멀리 있거나 너무뜬구름 잡는 이야기라 답답했다면, 앞으로 저의 글을 주목해주십시오.
아무것도 없는 스타트업에서 ‘첫 구매 프로세스’를 만들어야 하는 당신을 위해.
주먹구구식 관리를 벗어나 ‘ERP 시스템 도입’을 고민하는 당신을 위해.
매번 납기를 어기는 공급사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당신을 위해.
나의 성과를 ‘원가 절감 보고서’라는 숫자로 증명하고 싶은 당신을 위해.
이 글들은 완벽한 정답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이 현장에서 마주한 바로 그 문제에 대한, 가장 현실적인 선택지와 구체적인 실행 방법을 담은 ‘동료의 조언’이 되어줄 것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서점에서 찾아 헤맸던 그 책을, 이제부터 이곳에서 함께 만들어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