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신이 건네는 위로

오늘울 성실히 쌓아가는 마음

by 청일


눈을 뜨자마자 음악을 틀었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OST가 집안을 채운다. 음악을 듣고 있으면 영화의 마지막 장면, 맺힌 눈물 사이로 웃음과 울음의 시소를 타던 주인공의 얼굴이 아련하게 겹쳐온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 했던가. 우리의 일상 역시 잔잔한 행복과 슬픔이 끊임없이 교차하며 희비극의 줄다리기를 이어간다. 언젠가 다시 한번 꼭 마주하고 싶은 영화를 마음속 깊이 갈무리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오늘은 ‘리부트 캠프’ 시즌 2의 첫 수업이 있는 날이다. 이번 시즌은 외부 강사가 아닌, 동기들이 직접 수업을 이끌어간다는 점에서 더욱 특별하다. 김지현 작가가 문을 연 첫 시간은 함께 연극을 보고 감상을 나누는 자리였다. 한가로운 지하철에 몸을 싣고 혜화역으로 향하는 길.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마주할 무대가 어떤 이야기로 채워질지, 설레는 궁금증을 안고 극장으로 들어섰다.

객석은 이미 만석이었다. 예매 창구의 긴 줄을 보며 연극을 향한 사람들의 갈증을 실감할 무렵, 무대 위로 자막이 떴다.

‘1593년, 진주.’

순간 고개가 갸웃해졌다. 정보 없이 왔기에 만날 수 있는 신선한 놀라움이었다.


연극은 ‘꽃신’을 매개로 시대를 넘나들며 이야기를 펼쳐놓았다. 논개의 숨결이 서린 진주 촉석루와 의암바위의 기억이 무대 위에 되살아났고, 무대는 다시 1950년 전쟁의 한복판인 공주로 옮겨갔다. 억울한 죽음이 불러온 한 가정의 몰락 속에서도 꽃신은 시대를 건너 꽃다운 소녀의 꿈을 품어주는 매개가 되었다.


이야기는 1970년대 공장 지대로 이어진다. 경제 발전이라는 명목 아래 정당한 권리가 짓밟히던 시절, 쫓기다 벗겨진 여공의 발에 다시 신겨지는 꽃신은 마치 다시 일어서겠다는 결연한 의지처럼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이야기는 2020년, 어느 병실에 멈춰 섰다. 간암을 앓는 엄마와 딸의 거친 호흡이 무대를 가득 채웠다.

“내 목숨 건지자고 임신한 딸의 간을 어떻게 이식받느냐”는 엄마의 처절한 외침과, “부모가 죽어가는데 어떤 자식이 가만히 보고만 있겠느냐”며 울부짖는 딸의 목소리 앞에서 나는 끝내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천륜이라는 보이지 않는 끈은 때로 눈물로 부딪히며 더 단단해진다. 악착같이 살아온 삶이 병마 앞에 멈춰 서는 순간,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며 터져 나오는 원망 섞인 대사들은 이 세상 모든 엄마가 걸어온 삶의 궤적을 비추기에 충분했다. 지금도 각자의 자리에서 ‘엄마’라는 이름으로 버티고 있을 모든 이들에게 경의와 감사의 마음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인생이라는 길은 늘 알 수 없는 종착지를 향해 흐른다. 우리는 한 치 앞도 장담할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오늘을 충실히 살아내는 사람만이 내일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영화 속 주인공이 그러했듯, 연극 속 그들이 그러했듯. 나 역시 오늘 주어진 삶을 성실하게, 그리고 소중하게 차곡차곡 쌓아가려 한다. 비극과 희극이 교차하는 이 무대 위에서 내가 신은 ‘오늘’이라는 꽃신을 신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