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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렁색시 Jun 11. 2019

미국에 사는 한국 이민자들이 자랑스럽다.

자랑스러운 우리 이모

거의 십여 년 만에 나는 미국 땅으로 막내 이모를 만나기 위해 왔다.


이모는 미국 장교인 이모부를 만나, 서울 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 미국에 정착을 하기 위해 왔다. 당시 이모는 보석가게에서 일한 경험이 있어 백화점 보석 판매부터 시작을 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한국 이민자들은 언어를 많이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일들을 했었다. 주로 세탁소 같은 곳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이모는 처음엔 백화점에서 리어카에 패션 주얼리를 판매를 했었고, 시간이 지나 백화점의 중요한 자리에서 오랫동안 보석 판매를 했었다. 그러다 한참 후에는 땅을 사서 자기 이름을 붙인 건물을 지었다. 그때 이모는 자기 땅에 내 땅이라는 흔적을 남기며 행복해했다. 그리고 주차장  바깥쪽에는 무궁화도 심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한국에서 자기 앞마당에 잘 안 심는 무궁화를 심으며, 한국인임을 다시 한번 잊지 않았다.


우리나라 국화인 무궁화를 보며 꽃이 필때 이모는 좋아했다.


그렇게 힘든 시간을 인정받기까지는 고된 시간들을 많이 보내야만 했다. 동양인이라 겪었던 차별대우와 언어장벽,, 등등,, 우리 이모만 그런 힘든 시간을 보낸 건 아니었다. 다른 한국 이민자들 대부분이 그런 힘든 시간을 보냈고, 그 결과 조금은 힘든 시간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그런 힘든 시간을 겪으며 묵묵히 버티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다. 조금 부당하다고 느끼거나 힘든 시간이 찾아오면, 다른 일을 찾거나 그만두기 십상이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나도 반성을 하게 되었다. ‘그때 조금만 참을걸.. 내 자존심을 죽일걸..’이라는 생각이 든다.


땅을 사서 땅에 자기 이름을 쓰면서 행복해 했을 모습이 상상이 된다.

이모도 지금은 누구나 부러워하는 건물주이자 사장님이 됐지만, 매일매일 급여를 줘야 하는 직원이 있어서 매일매일 매출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간다. 물론 대출의 이자에 대해서 자유롭지도 못하다. 아울러 가게에는 사장님이 있어야 잘 굴러간다. 그래서 컨디션이 안 좋거나, 우울한 날에도 출근을 해야 한다. 사장님이라서 여유롭거나 마음이 마냥 편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에 대한 부담이 더 커졌고, 책임도 늘어났다. 직원들을 데리고 일을 하는 것은 보통일이 아님을 나는 잘 안다. 내 맘 같지 않은 것이 직원의 마음이다. 게다가 문화가 달랐던 미국인 직원들이니 오죽했을까..


이모의 동갑내기 친구는 부모님이 미국에 와서 정착을 한 재미교포 2세이다. 더 이른 시기에 부모님이 미국에 와서 세탁소를 하며 돈을 벌었고, 땅을 샀고 건물을 지었다. 자식들을 모두 대학교를 보냈고, 이제는 그 자식들이 잘되어 체인 레스토랑 사장도 되었다. 나름 성공한 인생이었다. 하지만 사장이라고 그 역시 편한 자리는 아니었다. 치킨을 튀기는 기름기에 화상을 입었지만, 누구에게 하소연하지도 못했고, 화상을 입은 채 계속 일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또 묵묵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내가 미국에 와서 본 것은 그들의 인내와 끈기였다. 머나먼 타지에서 가족과 떨어져서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낸 이모가 더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인 이모부와 살며 의지할 가족(한국 가족)도 없었고, 그렇게 외롭고 힘든 시간을 지금도 보내고 있다. 게다가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마지막 임종도 옆에서 지키지 못한 사실에 더 힘들어했고, 장례식 때도 많이 울다가 미국으로 돌아와서 혼자 마음 아파하다가 결국엔 쓰러지기까지 했다. 그런 이모가 조금은 덜 외롭고 힘들지 말라고 엄마는 일 년에 한 번씩 미국에 온다. 그리고 이모 옆에 있어준다. 밥이라도 잘 챙겨 먹을 수 있도록 그렇게 옆에서 지켜주고 있다.


엄마는 이모와 매일 함께 출근을 한다. 그렇게 이모 옆에 있어준다. 더 이상 외롭지 말라고, 힘내라고 소리 없는 응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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