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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레이아데스 Jan 07. 2024

마드리드 지하철 6호선을 타고

여행이란 삶의 순환선에서 환승노선을 타고 다른 곳으로 가는 일이다. 여행을 마치면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온다. 이번 여행길에 만난 그들도 삶이 존재하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훌쩍 떠났다. 스페인으로.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주인공 그레고리우스나 된 것처럼. 삶이란 철저히 계획하며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꼭 쥐고 있던 것들은 놓아버린다고 해서 잃는 것이 아니라는 걸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이미 배웠다. 


마드리드에 있는 숙소에 도착했다. 다인실 방 안은 생각보다 넓었다. 고개를 돌려 내부를 둘러보는데 맞은편 침실에 커튼이 쳐져 있었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침대 옆쪽 모서리에 여러 개의 약통이 보였다. 보라색 약병에 Melatonin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불면증이 있구나.’ 생각하며 조용히 짐을 풀었다. 

근처 광장과 공원을 산책한 후 돌아오니 그 사람은 깨어있었다. 우크라이나 사람이었다. 전쟁에 대해 안 됐다고 하니 한동안 말이 없었다. 스페인을 두 달째 여행하고 있다고 했다. 해가 지고 한참 지나서 그는 기타를 메고 외출했다. 그렇게 며칠째 밤마다 악기와 함께 밖으로 나가던 여행자는 나보다 하루 먼저 그 도시를 떠났다. 어깨가 처진 뒷모습이 한동안 잊히지 않았다. 

또 다른 지역에서 만난 우크라이나 출신 그녀는 미소가 예뻤고 마음이 따뜻했다. 숙박 신청을 막 마친 내게 ‘여기 있는 것은 공짜’라며 차와 과자를 갖다주었다. 호스텔에 머물면서 일자리를 찾고 있었다. 서툰 영어와 스페인어로 시작한 힘겨운 대화는 서로의 마음을 조금씩 내어 보이면서 매끄러워졌다. 1년가량 이 나라에 있었다는 그녀 역시 전쟁을 피해 여기 왔다고 했다. 내가 아침마다 바닷가로 향할 때 그녀는 생존을 위해 뚫어지게 구인 광고를 보고 있었다. 4일의 여정을 마치고 숙소를 나오면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가족 얘기에 눈물을 글썽이던 그녀 모습이 먼저 떠올라 뒤돌아서 가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 후로도 여러 명의 우크라이나 사람을 만났고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아련한 슬픔은 여행 내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자신의 나라가 전쟁 중이라 다른 나라를 떠도는 국민의 마음은 과연 어떨까. 


여러 환승노선을 연결해 주는 순환선, 마드리드 지하철 6호선. 원색의 감성이 두드러지는 이 나라에서 순환선을 나타내는 색깔이 회색이라는 사실에 문득 삶의 메타포(metaphor)가 느껴졌다. 삶의 순환선과 환승노선.

여행이 끝나면 일상의 정해진 곳으로 돌아갈 나와는 달리 불투명한 하루하루를 살아내야만 하는 우크라이나 사람들. 알랭 드 보통이 지적했듯이 인간 삶의 불확실함은 불안의 요인이다. 하지만 당장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그들에게 불안에 대한 그 작가의 해법은 멀게만 느껴졌다. 물론 근원적으로 보면 삶 자체가 부조리하고 불확실성을 품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한다. 실존과 불안. 자신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처럼 생활하는 그들을 보면서 묵직한 질문들이 떠올랐다. 삶이 무엇인지, 전쟁이 왜 있는지, 각자에게 일어나는 삶의 여정들이 무슨 의미인지 누구에게든 대답이 듣고 싶었다. 


여행자도 두 부류가 있다는 것을 이번 여행을 통해 알게 되었다. 여행을 마치면 다시 굵은 삶의 순환선으로 돌아갈 여행자들과 환승노선에서 새로운 삶을 찾고 있는 여행자들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삶의 순환선 역시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환승노선이 또 다른 삶의 희망이 될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새파란 하늘을 그리며 이 나라에 첫발을 디뎠지만, 비 내리는 날씨가 나를 먼저 맞이했듯이, 그러다 또 불현듯 경이로운 하늘을 만나기도 했듯이. 모든 것은 변하며 좋고 나쁨을 서둘러 선 그을 필요가 없다는 것도 다시 한번 경험했다.


순환선으로 돌아가든 돌아가지 못하든 어쩌면 우리의 마음은 늘 환승 정거장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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