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대가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단다.
약 이십 년 전 아들을 낳고 나서 남편이 아이의 이름 후보 5개를 골라서 왔다. 나는 "00만 아니면 다 좋아. 00은 여성적인 느낌이 나서 마음에 안 들어. 나머지는 다 좋으니 그중에서 자기가 골라"라고 나의 의사를 확실히 밝혔으나 우리 아이의 이름은 00이 되었다. 그는 이길 때까지 싸우는 자인데 오랜 산고를 겪은 후 모유 수유에 온 신경이 팔린 마누라와 싸울 정도의 파렴치한은 아니었다. 그래서 싸움 대신 "00이 남성성도 여성성도 강하지 않은 중성적 이름이라 부드러우니 이 이름으로 지으면 좋지 않겠냐"라고 다정하면서도 확신에 찬 말투로 내가 나가떨어질 때까지 나를 설득했으므로 결국 우리 아들의 이름은 00으로 결정되었다.
그 후로 우리 아들과 똑같은 이름을 가진 학생을 만나는 일이 종종 있었고 이는 그리 흔한 일도, 그렇다고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올해 만난 우리반 00이는 참 특별한 아이이다.
00이는 처음엔 내가 손만 대도 팔을 뒤로 빼며 거부감을 표현하던 아이였다. 나는 본디 아이들과의 신체접촉을 최대한 피하는 안전제일주의 교사지만 아이의 감정이 격해져 있는 상황에서 상담을 할 때는 부드럽게 팔을 만지거나 손을 잡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그것조차도 1학기 내내 거부하는 아이였다. (우연히 작년 담임선생님을 만나 이 얘기를 했더니 그녀는 "아닌데요? 00이가 작년에는 "선생님 사랑해요" 하면서 막 내 뒤에서 날 끌어안고 그랬는데요?"라고 하셔서 나는 나의 교직생활이 이대로 괜찮은지 꽤 오랜 성찰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하지만 2학기에 들어서면서는 화가 나도 감정을 쏟아내기 전에 내게 도움을 요청할 줄 알고 나의 지도내용에 경계심을 갖지 않으며 기분이 좋을 땐 장난도 살짝 치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하지만 작년 담임선생님께 했듯이 "선생님 사랑해요"+백허그 상황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섭섭하게 생각해야 할지 성장했음을 대견하게 생각해야 할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교육과정발표회 때 이 아이는 <토끼의 재판> 연극에서 사냥꾼 역할을 맡기로 했는데 연습기간 동안 누구보다 빨리 자기 대사를 외웠고 그다음 연습 때는 집에서 장난감총까지 챙겨 오는 열정을 보여줬다. 아이의 열정이 귀엽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해서 어떻게 하면 사냥꾼이 더 사냥꾼답게 보일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작년에 사둔 넥워머를 챙겨 왔다.
넥워머를 보여주면서 "이걸 머리에 머리띠처럼 쓰면 사냥꾼처럼 보일거야. 옛날에 사냥꾼은 모피로 만든 모자를 쓰기도 했거든. 이건 모자는 아니지만 머리에 쓰면 진짜 사냥꾼처럼 보일걸" 했는데..
"선생님 이상해요~ 이거 쓰기 싫어요~" 하더니 웬걸? 잠시 후 머리에 쓰고 연습을 하는 거였다.
평소보다 수긍이 빠른 게 이상했지만 그러려니 했는데 그 넥워머를 항상 머리에 끼고 있고 가끔은 콧잔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는데도 안 벗길래 "00아~ 사냥꾼 머리띠 벗어서 사물함에 넣어두고 나중에 연습할 때 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어쨌든 이 아이는 교육과정발표회에서 사냥꾼 역할을 아주 멋지게 소화했고 부모님들과 친구들로부터 큰 박수를 받아 기분도 좋았는데 부모님들이 돌아가신 후 교실을 정리하면서 "선생님께 준비물 받아간 사람들 이제 제출하세요~"라고 했더니..
"선생님~ 저 이거 안 낼래요. 이거 제가 가지고 싶어요"라고 강력한 거부 의사를 밝히는 거였다...
사실 그 넥워머는 오는 겨울에 내가 착용하려고 내돈내산 한 것이었고 그것 말고도 사비로 구입한 소품들이 꽤나 있었기 때문에 잘 간직했다 언젠가 재활용해야겠단 생각이었는데 그 아이는 그것의 감촉이 너무 좋고 자기 마음에 쏙 들어서 절대 돌려주고 싶지 않다고 고집을...
그 순간 우리학교 상담선생님의 조언이 생각났다. 이 아이의 편식을 걱정하는 내게 했던 이야기..
"국은 무엇이 들어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어서 안 받는 걸 거예요. 재료가 확실히 파악되지 않는 반찬도 안 받으려고 할 거고요. 냄새나 촉감에도 민감해서 안 먹는 음식도 많을 거예요."
그런 아이가 마음에 쏙 드는 넥워머를 만나는 일이 흔한 일이 아닐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쓰면 어쩌다 가끔 착용하는 넥워머가 되겠지만 이 아이는 겨울 내내 착용할 테고 착용하지 않는 시간에도 특유의 부드러움으로 아이에게 위안이 될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이 들자 당장 넥워머를 끼워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그것이 다른 아이들에게는 편애나 차별의 상황으로 받아들여질 것이 염려되어 나는 아이에게 주말 동안 작은 과제를 내주었다.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넥워머의 대가를 치를 무언가를 얻어 월요일에 내게 가져오기로..
그렇다면 기꺼이 선생님의 이 넥워머를 너에게 주겠노라고... 월요일에 이 아이가 과연 내가 준 과제를 완수해 올지 기대가 된다.
그림판에서 마우스로 그려서 조잡합니다. 하늘색 마스크를 끼고 안경까지 착용했지만 넥워머를 머리에 쓰는 것을 전혀 찝찝해하지 않았던 우리 00이가 대견하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