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해설 첫 야외수업

해운대수목원에서

by 동남아 사랑꾼

해운대 아침바람이 아직 겨울을 놓아주지 않는다.

안개 낀 바다를 보던 날들과 닮은 공기다. 세상이 어수선해도—우크라이나 전쟁이 길어지고, 미얀마의 밤이 끝나지 않아도—숲은 자기의 시간을 산다. 그래서일까, 첫 숲해설 야외수업이라는 말 한마디가 오래 잊었던 설렘을 불러왔다.


첫사랑이, 첫 직장이, 첫 아이와 첫 손녀가 그러했듯

“처음”은 늘 마음을 조금 어린아이로 돌려놓는다.


2월 마지막 토요일 아침, 해운대수목원.

옛 쓰레기 매립지 위에 자란 숲이라고 한다. 아직 땅속엔 메탄가스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지만, 그 위에 사람들은 나무 이름을 배우고 새싹을 본다. 인간의 역사와 자연의 시간이 겹쳐지는 묘한 장소다. 대연동 유엔기념공원(유엔묘지)에서 세계의 젊은 병사들이 잠든 묘역을 돌볼 때 느끼던 감정과도 닮았다. 죽음 위에 피어난 평화의 잔디처럼, 매립지 위에 자란 숲도 우리에게 조용히 말을 건넨다.


“그래도 삶은 이어진다”고.


바람이 세게 불어 이어폰 속 강사님의 목소리가 휘잉 소리에 묻힌다.

손가락이 얼어붙어 메모도 잘 되지 않는다. 그래도 다들 열심이다. 사진을 찍고, 잎맥을 만지고, 이름을 적는다. 나도 독수리 타법으로 휴대폰에 적는다. 문서를 쓰던 손이 이제 느티나무와 동백나무 이름을 적고 있다니, 인생의 만다라가 또 하나의 원을 그리는 순간이다.


느티나무, 매실나무, 메타세콰이어, 삼나무, 곰솔, 소나무, 홍가시나무, 양버짐나무(플라타너스), 낙우송… 그리고 오늘 내 마음을 사로잡은 금목서와 은목서, 구골목서와 구골나무.


양버짐나무


작장에 심어둔 금목서와 은목서를 떠올렸다. 겨울 저녁, 바람 속에 번지던 향기.. 작년 10월 혼자 산책하며 맡던 향기.

삶의 작은 평화가 꽃 향기로 남아 있었다.


금목서는 주황빛, 은목서는 흰빛.

잎의 톱니와 가시, 추위에 대한 인내까지 서로 다르다.

구골목서는 은목서와 구골나무의 교잡종, 열매를 맺지 못하고

구골나무는 초겨울 열매를 남긴다.


이름을 배우니 나무가 더 또렷해졌다.

세계를 배울 때도 그랬다. ASEAN 회의장에서 수많은 나라 이름을 익히고 나니, 그들의 얼굴과 목소리가 살아났듯이. 인도화와 헬레니즘, 만다라 세계관을 공부하던 날들처럼, 오늘은 숲의 언어를 조금 배웠다.


누군가 구골나무 향이 샤넬 No.5의 원료라는 말을 했지만, 사실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향기가 기억을 부르는 건 사실이다.

마릴린 먼로가 아니라, 해운대의 겨울바람과 손녀의 웃음, 그리고 부산의 오래된 골목 냄새가 떠오른다.


강사님은 말했다.

“이 향은 부산 같은 남쪽에서만 제대로 느낄 수 있는 행복꽃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따뜻해졌다.


내가 평생 오가던 자카르타의 플루메리아 향, 마닐라 만의 바람 냄새, 다낭의 비파꽃 향기와 겹쳐졌다. 세계를 돌던 방랑객의 길 끝에서, 나는 다시 부산의 숲에서 나무 이름을 배운다.


처음 숲해설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해운대 바람이 조금 누그러졌다.


나는 생각했다.

세상이 아무리 ‘정직한 야만’의 시대로 간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나무 이름을 배우고 꽃 향기를 맡을 수 있다고.


그것이 우리가 지켜야 할 평화이고,

손녀가 살아갈 세상에 남겨줄 가장 작은 약속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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