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위선의 시대와 정직한 야만의 시대

해운대 새벽, 흐린 국제정세를 바라보며

by 동남아 사랑꾼


해운대 아침이 밝아오는데, 오늘은 해가 보이지 않는다.


바다 위로 안개가 눌러앉아 수평선을 감추듯, 국제정세의 시계도 흐리다.

낙동강 물결처럼 평온하던 시절은 아니었다 해도, 지금의 세계는 유난히 거칠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네 해를 넘어가고, 미얀마 쿠데타는 세 해를 넘겼다.

중동의 바람은 모래폭풍을 예고하듯 불안하다.


외교 현장을 오래 걸어온 나에게도, 이 흐림은 낯설지 않으면서도 깊다.

자카르타 ASEAN 본부 회의실에서, 마닐라의 바닷가 카페에서, 방콕 외교부 복도에서

우리는 늘 갈등 속에서도 말의 품격을 지키려 했다. 그것이 다자주의의 최소한의 예의였고, 동남아의 만달라(Mandala)식 균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세계는, 이문영 교수가 말한 "우아한 위선의 시대에서 정직한 야만의 시대로의 이동”을 실감하게 한다.


예전에도 국익은 있었다.

그러나 외교는 겉으로라도 상대를 존중하는 언어로 포장했다.

웨스트팔리아 이후의 주권 질서, 2차 대전 후의 유엔 체제, ASEAN 회의장에서 우리가 밤새 조정하던 문구 하나까지. 그것은 ‘체면’이라는 얇은 막이었지만, 평화를 지탱하는 막이었다.


요즘 그 막이 찢어지고 있다.

강대국 지도자들은 이제 속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우방도, 경쟁자도, 국제 규범도 정글의 법칙 아래 놓인다.

외교문서의 문장은 점점 짧아지고,

트위터 문장이 외교가 된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미국이 여유로울 때는 우아할 수 있었고, 힘이 줄어든 지금은 계산서를 꺼내 든 것 아닐까.


중국도, 러시아도, 유럽도, 모두 같은 마음일지 모른다.


세계는 여전히 세계화되어 있지만, 닐 쉬어링이 말했듯 블록 안에서는 더 단단해지고, 블록 사이에서는 더 거칠어진다.


ASEAN 친구들이 떠오른다.

엘리자베스, 본텝…

그들은 늘 말했다. “외교는 결국 얼굴을 잃지 않는 기술이다.”


그래서 ASEAN은 큰 나라 틈에서도 살아남았다. 말을 낮추고, 원칙을 높이며, 시간을 친구로 삼았다.


지금 우리는 동굴 입구에 서 있다.

한 번 발을 들이면 되돌아오기 어렵다.

다음 지도자들도 이 거친 언어를 버리기 쉽지 않을 것이다. 역사는 늘 욕망의 값을 청구해 왔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견딜까.


국가는 자강과 맘에 맞는 우방과 서로의 어깨를 내주기, 개인은 내면의 평정.


나는 요즘 UN기념공원 묘역을 걸을 때마다 그 답을 본다.

서로 다른 나라의 젊은 병사들이

부산의 바람 속에 나란히 잠들어 있다.

그들이 지킨 것은 힘의 균형이 아니라,

함께 살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해운대에 다시 봄바람이 분다.

손녀가 모래 위를 처음 걸었던 그날을 떠올린다. 그 아이가 살아갈 세상은,

우아한 위선이든 정직한 야만이든

우리 어른들의 선택 위에 세워질 것이다.


안개 낀 아침에도 바다는 있다.

보이지 않을 뿐이다.


외교도, 역사도, 인간의 품격도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시 찾아야 할 뿐이다.


나는 오늘도 커피 한 잔을 들고

ASEAN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세상은 흐리지만, 우리는 말을 잃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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