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봄날, 내 친구는 이 세상의 끈을 놓았습니다. 어제 화창했던 봄날을 보고 떠나 그나마 다행입니다. 오늘 아침, 봄비가 내린다.
한 달전 그의 암 재발 소식을 듣고 난 3.6자 브런치에 '당신은 임종의 시간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라는 글을 올렸다. 그 당시 2개월 정도는 산다는 말을 들었다. 그 후 1달 경우 넘게 살다 갔다. 집으로 병문안 가서 친구가 좋아하는 음식을 시켜 먹고 놀다가 왔다. 그때 그가 절친이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소원해진 친구를 데리고 가서 서로의 손을 잡게 해 주었다.
그 이후 그의 병세가 더 안 좋아져 서울대 응급실, 용인 호스피스를 거쳐 집 근처 요양원으로 옮겨 오늘 새벽에 저세상으로 갔다. 며칠째 곡기를 넘기지 못하고 알부민 주사를 맞았다고 한다. 마지막 가는 길엔 아들딸을 보자 가늘게 눈을 뜨고 이내 감았다고 한다. 그의 나이 62세다. 마지막에 죽은 이의 귀가 닥힌다고 한다. 저세상으로 가기 전엔 죽으서도 귀를 열어 놓고 어쩜 빈소에 온 이들의 짠한 마음을 굽어볼지도 모른다.
그는 촌놈으로 상경해 열심히 살고, 늘 쾌활한 분위기 메이커였다. 나의 시골 초딩 친구였다. 그러니 50년은 넘은 친구다. 내가 해외를 왔다 갔다 해 대학 때부터 그와 다시 상봉해 북한산서 라면도 끓여 먹고 그의 자취집에서 김치찌개도 같이 먹고 뒹굴며 보낸 지난 세월이었다.
다 장성한 아들딸과 부인을 두고 떠났다. 세상 사는데 큰돈이 필요 없을 텐데 보통의 우리처럼 돈에 집착을 했고, 돈 때문에 친한 친구와 10년 이상 끌던 소송도 이제 막 끝나려는 참이었다. 나는 만날 때마다 먹고살 만큼 있으니 소송 포기하라고 몇 번이나 얘기했지만 자수성가한 그의 눈에는 난 그저 세상 물정을 모르는 그런 탁상머리 서생이었었다. 세상이 늘 선함으로 가득 찼다느니, 그렇지 않더라도 선은 악을 이긴다는 둥 어디 성경이나 도덕경에나 나올 법한 세상에 나는 살고 있다는 그런 사람이었을 것이다.
김훈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서 다음과 같이 죽음을 바라보았다.
"죽으면 말길이 끊어져서 죽은 자는 산 자에게 죽음의 내용을 전할 수 없고, 죽은 자는 죽었기 때문에 죽음을 인지할 수 없다. 인간은 그저 죽을 뿐, "
"가볍게 죽고, 가는 사람을 서늘하게 보내자. 단순한 장례 절차에서도 정중한 애도를 실현할 수 있다. 가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의술도 모두 가벼움으로 돌아가자.
"(화장한 후) 뼛가루를 들여다보면 다 알 수 있다.
이 가벼움으로 삶의 무거움을 버티어낼 수 있다. 결국은 가볍다. 나는 행복한 사람"
오늘부터 빈소가 준비된다. 아들딸들이 친구가 없고 그 많던 동생들과도 큰 왕래가 없어 부인이 걱정한다고 한다. 오늘부터 그의 빈소를 지키면서 그를 편하게 보내 주려고 한다.
친구야, 잘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