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1회 판교 사무실에 간다. 오늘이 그날이다. 서울집을 나서니 애법 비가 가을비처럼 온다. 하지만 우산대신 접으면 두 주먹만큼 되는 양산을 챙겼다.
통근차를 타고 판교 직장에 도착하니 어느덧 비는 가랑비가 되었다. 짐이 되는 양산 챙기길 잘했다며 나의 작은 선택에 뿌듯해하며 사무실을 들어섰다. 습하고 더운 바깥온도와의 차이 때문에 실내 유리창엔 뿌였다. 전형적 동남아 우기의 습한 날씨다.
새로 온 신내기와 인사차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육아휴직 대신 뽑는 한시직 8개월 직원이다. 경기도 근교시 일선 건축직 공무원을 3년 6개월 하다가 악성 민원에 시달려 건강이 나빠져 1년간 요양하고 다시 취업했다고 한다. 내가 중앙부처에서 오래 근무해 현장 공무원의 애환이 이렇게 클 줄을 미처 몰랐다. 아무쪼록 건강 잘 챙기고 행정 경험을 살려 새로운 직장에서도 잘 지내기 바란다는 하나마나한 덕담을 했다.
바깥에선 여전히 가랑비가 내린다. 양산을 챙기고 각종 울창한 나무들이 있는 직장 경내를 걷는다. 소나무의 뽀쪽한 잎에 방울방울 매달린 빗방울이 이리저리 나는 새들의 푸닥거림에 내 머리 위로 떨어진다. 은행나무엔 노란 은행이 주렁주렁 달려있고, 다 익은 노란 은행이 다람쥐 탓인지 여기저기 바닥에 떨어져 있다. 시내 보도의 은행 가로수가 많아 지저분해지면 청소하는 분들의 고단함이 떠오른다.
아직 단풍잎은 청록색이지만 곧 알록달록한 색으로 바뀔 것이다. 여기저기 천덕꾸러기의 모과나무에선 모과가 익어간다. 실한 모과엔 가을 가랑비가 맺혀있다.
이렇듯 가을은 오고 있으나 아직 여름의 끝인지 여전히 덥다. 그렇지만 난 유난히도 더운 여름이지만 다시 못올 여름이고, 추운 겨울이 오면 이 가을과 크로스 오버하는 이 무더위도 그리울지 몰라 쓰고 있던 양산을 접고 가랑비를 맞아본다.
남들은 내가 꽃길만 걸어왔다고 한다. 그렇지만 나 자신은 늘 순간순간에 충실하며 살면서 때로는 가랑비와 소나기를 맞으며 지내왔다. 하지만 되돌아보니 그때는 그 소나기가 왜 나에게 퍼붓는지 몰라 때로는 실망한 적도 있으나, 그 또한 지나갔다. 지나고 보니 인생의 한순간 한순간이 소중하고, 좋은 일이나 좋지 않은 일이 오고 가는 삶에서 너무 일희일비하지 않고 그저 담담하게 '여기에 지금'에 충실하다 보니 어느덧 인생 60이 넘었다.
이제야 삶을 조금씩 알아간다. 살아보고 아는 사람이 아둔한데 내가 그런 부류다.
애써 초가을의 전령사라고 우기고 싶은 가랑비가 내리는 9월의 판교에서 지나온 나, 지금의 나와 앞으로 살아갈 나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