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대 남자 셋의 여행
지난 주말 1박 2일 일정으로 대마다를 다녀왔다.
여행의 온기가 떠난 지금, 해운대 앞바다가 보이는 푹신한 카페에 앉아 저 멀리 있을 대마도를 바라본다. 맑은 날이며 50킬로도 채 안 되는 거리라서 육안으로도 보인다. 하지만 오늘은 봄비가 내리고 지평선은 뿌옇고 너울성 파도처럼 일렁인다. 대마도에서 오늘 밀물의 파도만이 대마도와 여기를 이어준다.
단지 마음속 한가운데 각인된 대마도의 추억만이 남아있다.
60대 초반 남자 셋, 같은 직장에서 30여 년 이상 동고동락한 벗들이고, 지금은 다들 운 좋게 인생 2막을 시작하고 있다. 이들 중 일본에서 유학하고 일한 동료 특급 일본어 가이드 덕분에 편하게 다녀왔다.
부산 국제여객터미널에서 배로 1시간 20분 걸려 도착한 대마도는 제주도 38% 크기에 거제도 3배 정도로 3만여 명이 사는 곳이다. 크게 북섬과 남섬이 있는데 우리는 북섬 히타카쯔로 입항했다. 배는 승객으로 꽉 찼다. 중년 낚시꾼들과 젊은 층들이 주종을 이룬다. 항만 출입국 수속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지고 세관원들이 다들 한국말이 능숙하다.
히타카츠 하선 후 북섬 이즈하라로 가는 시외버스행이 1시간이 남아 히타카츠 탑방을 잠깐 했으나 신통찮다. 어디 좀 더 가면 유명한 해변이 있다고 하는데 포기하고 서둘러 버스에 탔다. 버스가 너무 좁아 발을 뻗을 수없고 캐리어 놓을 공간도 없다. 고마운 건 일본어와 한국어 안내가 나오는데 이즈하라까지 40여 곳을 들리고 90킬로도 채 안 되는 거리를 2시간 40분 만에 도착했다.
그야말로 천연림으로 꽉 찬 대마도판 무주구천동으로 꾸불꾸불 산길을 40~50킬로 제한 속도로 간다. 졸다가 자다가 눈을 뜨면 번갈아가며 바닷물이 보인다. 18년 전 일본에서 일할 때 주말마다 전국 100대 명산 등반 하던 때의 그 울창한 일본 삼림이 생각날 정도다.
어렵게 어렵게 도착한 이즈하라는 히타카츠보다 크고 건물도 큰 게 있다. 도요코인 호텔 체크인이 오후 4시고 체크아웃은 오전 10시다. 좀 이상한 시간들이다. 캐리어를 호텔에 맡겨 놓고 탐방 후 체크인해 방에 들어가니 2평도 채 안 되는 그야말로 작은 방이다. 동료 한 명이 평생 이런 방에선 처음이라고 한다. 하지만 허루 밤 묶기엔 손색이 없고 간단하나마 정갈한 아침에 포함된 방값이 (1박 8만 원)이라서 가성비가 짱이다.
본래 여행이란 좋은 집 놔두고 고생하러 떠나는 것이지 않은가.
만소인 절
이즈하라엔 '만소인'아라는 고찰이 있다. 그곳엔 귀족들의 비석이 있는데 좀 비교가 그럴지만 미니 앙코르와트 느낌이 난다고 동료가 뜬금없이 이야기한다. 앙코르와트 가면 천년 고목이 있듯이 여기 천년이 넘는 삼나무가 내 두 팔로 안으면 4~5번은 재야 할 정도로 굵고 크기는 고개를 제쳐 보아야 할 정도다. 비석과 천년 고목 어디엔 귀신이 득실득실할 듯하고 밤에 분명히 도깨비불을 하는 귀신이 나올 게 분명하다. 납량특집 촬영지로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만소인 내 천년이 넘는 삼나무로 가는 계단
천년이 넘는 삼나무 고목
이곳은 우리의 아픈 역사와도 관련이 있다. 구한말 고종의 장녀 덕혜옹주가 당시 에도에 있던 대마도 소 씨 가문과 결혼해 신혼여행을 대마도로 와 이곳 만소인에 왔고, 이를 기념해 대마도 조선인들이 세운 기념비가 서있다.
만소인 내 덕혜옹주 기념비
덕혜옹주는 조선과 일본의 정략결혼이었고 둘은 사이가 좋았으나 나라끼리 틀어지다 보니 자식은 남기고 결국 이혼 후 덕혜옹주는 1989년 귀국해 고국에서 영면했다고 기념비는 전한다. 손예진이 덕혜옹주역을 맡은 영화를 보지 못했으나 이제 한번 보려고 한다.
덕혜옹주는 당시 에도에 인질로 온 대마도 소 씨 가문 남편과 결혼해 살기는 에도에서 살았다고 한다. 과거 조선시대에도 우리 왕자들이 중국에 사실상 볼모(hostage)로 가서 반론이나 저항을 꿈꾸지 못하게 하는 술책이 그 당시 에도 시대에도 있었다.
그분의 슬픈 개인사가 국가사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인이나 국민이 정신 못 차리면 외세에 좌우되고 그 와중에 국민들은 찬밥신세가 되는 법이다. 현대판으로로 보면 내전과 전쟁을 겪어 미얀마 난민, 우크라이나 난민들이다 무작정 작은 돛단배로 탈출해 망망대해를 떠돌다 포악한 바다에 삼켜지고, 어렵게 다른 나라 해변에 도착해도 되돌려 보내는 미얀마 소수민족 로힝야족 난민이 눈에 어른 거린다.
마크 트와인의 '역사는 반복되지 않지만 리듬을 탄다'는 경구가 떠오른다. 꼭 같은 일은 아니더라도 유사한 일이 반복된다는 역사의 교훈은 21세기를 사는 지금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대마도 이즈하라에선 별거한 거 없었다. 그 고생하며 이곳까지 왜 왔을까 하며 동료들과 대마도에 오는 이유를 이야기해 보라고 자문 자답하며 몇 가지 생각해 보았다.
우선 외국 여행지로 제일 가까웠고 배값이 그리 비싸지 않은 점이고, 한국어 서비스가 확실해 가는 곳마다 한국어도 쓰여있고 세일즈 맨과 우먼들도 다 한국말울 한다. 오미야게(선물) 사러 가는 이점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개울가며 산길 가장자리 어디에 쓰레기 없고, 아무도 없는 산길 버스도 주행속도를 지키고 추월하는 차가 별로 없다(물론 세상사 비슷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버스시간대도 안 맞고 힘들어 비싼 택시를 탔는데 우리보다 10살은 연배로 보이는 할아버지 기사는 폭주를 하긴 했다).
또한 진짜 일본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우리도 도착하는 날 점심은 허름하지만 국물맛이 산뜻한 우동집에서 서울선 공짜지만 돈 내고 먹는 단무지를 곁들여 먹은 게 일품이었다 지금도 그 우동이 생각난다.
맛있는 우동집
다음날 점심은 맛있는 이케 라면(7~8천 원)에 생맥주 한잔했다. 물론 도착 저녁은 사치스럽게 했다. 나야 술에 약하지만 동행한 동료들은 술맛도 알고 애주가들이라서 '구보다 만주'와 아베 총리가 전 세계 일본 관저에 제공한 '닷사이 23'(쌀 100킬로를 깎아서 23킬로로 술을 만드는데 쌀지랄 하는 것이지만)를 간에 기별도 안 가는 약간 숙성한 일본 회와 튀김에 도미 조림으로 술이 원수인 양 마셨다. 60대 남자 셋이 절은 시절이 그리워하며 부린 객기였을지 싶다. 달리 생각하면 어쩜 이러려고 여행 오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꼭 먹어야 하는 이케 라면
니혼슈 구보다 만주와 닷사이 23 (술맛 모르는 내가 꼽은 3대 니혼슈가 구보다 만주, 닷사이 23 이외에 '고시노 감바이'다)
제주도에 사는 친구가 지난주 중 부산에 방문해 왜 대마도 가는지 모르겠다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더니 그가 하는 말이 자기 같은 낚시꾼에겐 대마도가 심어가 잡히는 성지라고 한다. '아, 그래서 낚시꾼들이 많고 승선과 하선시 우선권을 주나' 싶었다.
대마도 기억이 저기 파도 썰물처럼 떠나가며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지금 촌스럽지만 '왜 우린 대마도 여행을 떠나는가'라는 질문을 해본다. 공돌이로서 몸에 밴 진부한 질문과 답변이다.
우선 여행지의 낯선 모습의 우리를 마주하기다.
대마도가 일본서도 못 사는 곳이지만 안전을 중시하는 일본인들의 삶에 대한 자세가 곳곳에 있다. 산길 절벽이 자연재해에 무너져 내리지 않도록 설치한 방벽이 우리의 그것과는 다르게 안전감을 준다.
외국에 오래 살다가 귀국해 보니 우린 빨리빨리 문화와 효율성 지상주의 문화 때문에 안전이 뒷전으로 밀린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세월호를 겪고도 그렇다.
나는 대학로 연극 보러 안 간다. 그 이유는 연극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지만 개죽음하기 싫은 이유도 있다 오래된 일이지만 한 번은 대학로 연극 보러 간 장소가 좁은 계단의 지하였는데 비상구도 없어 불이 나면 통닭이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국내에서 우리의 GDP가 일본보다 앞질러 우리가 더 잘살게 되었다 하는데 일본에 가면 느끼지만 이번에도 같은 생각을 한건 안전의식과 거리 깨끗이 하기 등 시민의식을 포함해 선진국 수준의 우위를 따지면 여전히 일본이 우리보다 앞서간다.
다음은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가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위안'을 주기 때문이라는 '철학의 쓸모'라는 책에서 읽었는데 그럴 듯해 인용한다.
"이 세상을 여행하면서 우리는 현실 세계의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다. 여행을 하는 동안 우리는 어디선 편하게 지낸다.
현실은 더 이상 냉혹하거나 불합리 하지 않다. 여행지에서 우리는 어디서나 환대를 받고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며 위로를 얻는다.
그렇지만 여행자로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여행에서 마주하는 미지의 것들을 우리가 알고 있는 익숙한 것들과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자신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한다면, 여행 역시 위로가 되지 못할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한일관계의 불행한 과거를 잊지 않되, 앞으로 공생할 이웃을 찾아가는 데 대한 고민이다.
덕혜옹주의 비운의 과거사라는 측면과 그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 재개된 조선통신사의 대마도 방문과 교류의 이웃으로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숙명 앞에 아직도 한일관계의 잔재 속에 사는 양국이 어떻게 중국의 부상과 트럼프의 강자 우선 논리 세계에서 함께 공생할지 고민해 보는 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자기 성찰의 시간이다.
직장이라는 계절샤프트
(Gesellschaft, 이익사회)에서 오랫동안 같이 지낸 동료지만 여행을 함께하다 보면 낯선 여행지 때문에 자기 방어막을 조금 내려놓고 가슴에 있는 말, 못다 한 말들을 할 수 있어 내가 그들과 함께 하면서 몰랐던 그네들의 생각을 어스럼픗이나마 보고 느낄 수 있고, 내가 그들에게 그간 가졌던 생각을 다시 반추해 보며 내 안의 나를 성찰하는 시간이 된다.
또 호텔로 돌아와 빈방에서 천장을 보며 창밖을 무심코 보며 바쁘게 뒤도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온 나의 모습을 일상에서 벗어나 한 발자국 뒤에서 본다.
카페 너머 대마도의 바닷물이 여기 해운대 바닷물과 맞닿아 파도치며 그위로 봄비가 해운대에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