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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윤 Jul 12. 2024

책 : 우치다 다쓰루의 레비나스 시간론

2024. 7. 12.

일상생활은 퇴락 같은 것이 아니다. 일생생활이야말로 우리 고독의 완성이다. 이 단정 안에 레비나스 철학의 '레비나스다움'이 응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매일의 삶에서, 일하거나 게으름을 피우거나 서로 사랑하거나 서로 미워하거나 희망을 품거나 절망하거나 먹거나 굶거나 자거나 자지 못하거나 누리거나 고뇌하는 등의 당연한 일상 안에서 사유할 만한 가치가 있는 모든 철학적 논점은 갖추어져 있다. 레비나스는 그렇게 생각한다. (......)

생활상의 자질구레한 일을 하나의 소재로 철학적 사고를 '입구'로서 공리적으로 이용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철학적 사고의 대상인 것이다. 그러한 생활의 자질구레한 일을 철저하게 생각하는 것을 철학이라고 한다. (...)

일상생활의 생생함, 애매함, 복잡함, 무의미함을 둘러싼 삶의 현장 속에서 산란하는 경험이야말로 철저히 사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

실제 삶을 사는 자, 신체를 가진 자, 일상생활 속에 깊게 내려앉는 자야말로 철학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레비나스의 '하이데거적 권역과의 결별'이란 이러한 방향 전환을 의미한다. (189~191쪽)




이 책은 40년 전에 우연히 레비나스를 책으로 만나, 한 줄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떤 '힘'에 끌려 레비나스를 공부하기 시작한 우치다 다쓰루가 레비나스의 가장 얇은 책 - 얇다고 쉬운 책은 아니다. - 인 <시간과 타자>의 전문 80쪽을 6년 동안 다달이 경하듯이 읽고 자신이 이해한 부분을 글로 써 연재한 것을 묶은 책이다.

 <시간과 타자>는 레비나스가 철학학원에서 네 차례에 걸쳐 강의한 내용이다. 우치다의 설명에 따르면, 이 책의 과제는 "청년을 대상으로 한 교육을 통해, 홀로코스트로 해체 위기에 놓인 프랑스 유대인 공동체를 영적으로 재생하는 것"이며 "레비나스가 철학학원 강연 주제로 선택한 '시간론'이란 깊은 고통의 시간을 살아낸 유대인에겐 곧 희망의 시간론"을 알리기 위한 것이다.


원문 80쪽도 안 되는 어렵디 어려운 레비나스의 책을 450쪽이나 되는 분량의 우치다식 친절한 설명방식으로 하나하나 씹어서, 어려운 것은 계속 읽기를 설득하면서,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십분 활용하여 길을 잃지 않도록 책을 썼다. 그래서 더 쉬워졌다는 것은 아니다. 더 깊어졌다. 레비나스가 <시간과 타자>를 쓴 목적은 명시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이 강연의 목적은 시간이란 고립된 단독의 주체와 관련된 일이 아니라 주체와 타자의 관계 그 자체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 있다."

이 문장을 이해했다면 이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 '뭐야? 이렇게 쉬운 것을 증명해야 한다고? 참, 철학자들은 할 일이 없는 모양이군. 깔깔깔' 하며 지나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리 녹록한 책이 아니다. 이책은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 유대인 신분으로 가족을 모두 잃고 우연히 살아돌아온 레비나스의 고통과 죽음을 둘러싼 살아남은 자의 책임감을(우치다는 '유책성'이라 번역했다.), 유대인의 죽음이 하이데거의 존재론과 관련되어 있음을, 그리고 절망에 빠진 유대인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하고픈 온몸으로 사유하고 새로운 철학을 정립하고자 한, 레비나스적 사유의 정수이다.     


나는 이 책을 2주일에 걸쳐 야금야금 읽었다. 읽으며 이해가 안 되는 구절도 있었고, 이해는 되지만 실감이 안되는 구절도 있었다. (우치다 선생도 그랬다고 한다.) 어쩌면 2차대전을 겪은 레비나스와 21세기를 살아가는 나의 시간적 격차 때문일 수도 있고, 프랑스철학(어쩌면 서양전통철학)의 사유방식과 동양적 사유의 차이일 수도  있겠는데 한참을 생각하고  천천히 읽을 수밖에 없었다. 완독 후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미지의 세계를 사유하는 지적 긴장과 기쁨을 맛보았으니.

전체글에 대한 총체적 요약은 능력상 불가하고,  읽으며 밑줄을 그으며 기억하고픈 구절은 여기에 옮겨 놓는다.


초월은 이방적인 것도, 신기한 것도, 모험적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초월은 일상 안에 있다.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야말로 초월의 계기는 깃들어 있다. 매일의 일상 속에서 먹고 자고 일하고 기도하고 치료하고 사랑하고 ...... 이 같은 매일의 실천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 바깥으로 나가려고 하는 자는 "일상적인 초월이 늘 동일한 한 점에 귀환하는 것을 방해하는 사건"을 만날 가능성에 실은 풍부하게 엻려 있다. (215쪽)


죽음과 에로스와 미래는 모두 주체에 의해 포착될 수 없고 '우리 안에 떨어져 내리는 것'이며 '우리를 납치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주체가 외부적인 것과 맺는 관계다. (...)

우리에게 가장 일상적이고 가장 구체적이고 지금, 이 순간도 우리 안에 깊게 파고들고 깊 게 침입하고 우리를 근원적인 방식에서 움직이게 하는 바로 그것이 철학적으로 가장 멀리 있고 포착하기 어려운 것이다. 가장 가까운 것이 가장 소원하고, 가장 노골적인 것이 가장 감추어져 있고, 가장 일상적인 것이 말로 하기 가장 어렵다.

이것은 레비나스의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었다. (253~254쪽)


"사건이 그것을 맡을 수 없는 주체, 그것에 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주체의 몸에 도래한다고 하는 이 상황, 그럼에도 사건이 어떤 고유한 방식으로 주체의 눞앞에 있다는 이 상황, 그것이 타자와의 관계, 타자와 얼굴을 서로 마주하는 관계, 얼굴과의 만남이라는 관계다. 얼굴은 타자를 주고 또 빼앗는다. '맡아진' 외부적인 것, 그것이 타자다." (261)


"타자란 내가 아닌 자다. 타자가 내가 아닌 자라는 것은 그 성질이 나와 다른다는 것도, 그 모습이 나와 다르다는 것도, 그 심리가 나와 다르다는 것도 아니라 그 타자성 자체에 의해 나와 다른 것이다. 타자란 구체적으로는 약자이고 빈자이며 '과부이고 고아'이며, 그에 비해서 나는 부자이고 혹은 강자다." (281~282쪽)


나는 '공통의 조국'을 갖지 않는 타자와 진리를 앞에 두고 '함깨'할 수는 없지만, 서로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다. 그것은 피조물과 신이 '함께' 있을 수 없지만, 서로 얼굴을 마주할 수는 있다는 정황과 똑같다. 그리고 그 대면 상황에서 타자는 그 절대적 타자성을 훼손받지 않은 채 주체 앞에 서고, 주체에게는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다. (309쪽)


"누구든 한 번은 철학을 해야 한다. 누구든 자기 자신의 시점에 서서 자신의 인생에 발을 딛고 주위를 돌아봐야 한다. 그러나 이 시선은 목적 그 자체가 아니다. 책은 최종적인 목적이 아니다. 과도적인 목적조차 아니다. 책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책을 통해 보완되는 것도 아니다. 책은 정당화되어야 하는데, 이 정당화는 매일의 생활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370쪽)


"사랑은 그것이 존재하는 순간에는 완전히 채워져 있다. 사랑하는 자의 사랑은 늘 '행복'이다. 사랑하는 자를 향해서, 당신은 사랑하는 것 이외에 아직 무언가를 필요로 하고 있는가 하고 누가 말하려 들까." (384쪽)


레비나스가 로젠츠바이크로부터 계승한 가장 중요한 개념은 '단독성'이다. 신은 인간을 단독성으로 사랑한다. '신에게 사랑을 받는다'라는 것은 "너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신의 부름에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즉답하는 것, 단지 그것뿐이다. 이 신으로부터의 단독자, 유일무이자로 향하는 관계를 로젠츠바이크는 '사랑'이라 부르고 '계시'라고 불렀다.(398쪽)


모든 타자적인 것을 기지에 환원하고 라벨을 붙이고 분류하고 정리하고 이해하려고 하는 기도에 저항해 단독자로 유일무이하게 도래하는 경험을 대치하는 것, 전체성의 철학에 무한의 철학을 대치하는 것, 그것만을 레비나스는 추구했다. <시간과 타자>에서도 레비나스는 오로지 그것만을 반복해서 말했다. (400쪽)


"애무란 주체의 존재 양식의 하나다. 애무에서 타자와의 접촉 가운데 있는 주체는 이 접촉의 저편을 추구한다. 확실히 감각으로서의 애무는 빛의 세계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애무받고 있는 자는 엄멀한 의미에서 접촉하고 있지 않다. 애무가 추구하는 것은 접촉을 통해 손바닥에 주어지는 피부의 매끄러움과 온기가 아니다. 애무는 무언가를 추구하고 있긴 한데,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사실이 애무의 본질을 형태 짓는다. '모른다는 것', 이 근원적인 당황이 애무의 본질이다." (412쪽)


죽음도 애로스도 어떤 의미에서는 철저하게 일상적이고 범용한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끝을 알 수 없는 미지성이 잠재해 있다. 죽음도 에로스도 절대적 타자성, 절대적 외부성과 관계가 있는 일이다. 우리는 와부와 타자의 임박을 일상적으로 사는 것을 통해서 '신비'와 '초월'과 '신'이라는 개념을 단련시켜 왔다. 형이상학적 사변의 대가람의 토대를 형태 짓는 것은, 자르면 피가 나오는 우리의 신체 그리고 일상의 산문적이면서 자질구레한 행위다. (4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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