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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윤 Jul 04. 2024

책 : 레비나스, 타자를 말하다

2024. 7. 4.

'유책성(有責性)의 무한'이란 그것이 현사실적으로 광대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과 달리, 받아들이면 받아들일수록 유책성이 증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책무를 맡을수록 수가 늘어난다. 자신에게 맡겨진 책무를 더 적절히 수행하면 그만큼 나의 권리는 적어진다. 내가 의로우면 의로울수록 나의 죄는 무거워진다.... 이것이 '선성(善性)'이라 불리는 것이다. 이러한 유책성의 과잉이 일어나는 우주의 한 점이 있을 수 있다는 그것이 아마도 궁극적으로는 '나'를 정의할 것이다. - 레비나스, <전체성과 무한> 중에서


살아남은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것은 살아남은 자는 보다 많은 책무를 지고 보다 많은 수난을 견디기 위해서, 즉 특권이 아니라 많은 의무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선택되었다는 자기규정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것 이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레비나스는 '선택'에 관해서 이렇게 썼습니다.


'선택되었다'는 말을 '특권'의 용어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책임'의 용어로 이해되어야 한다. (175~6쪽)



1.

가파도에 풍랑주의보와 짙은 안개로 3일 동안 배가 뜨지 않았다. 그로 인해 나는 엄청 많은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중 깨어있는 시간에 우치다 다쓰루가 쓴 <레비나스, 타자를 말하다>(2004)를 읽었다. 우치다 선생이 평생의 과업으로 삼은 레비나스 3부작 중 1부작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2001)을 2013년에 읽고 이번에 2부작을 읽었으니 1부와 2부 사이에 10년이란 세월이 흐른 것이다. (우치다 선생은 첫 책을 쓰고 3년 후에 두 번째 책을 썼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번역의 시간이 있었다.) 마지막 3부작 <레비나스의 시간론>(2023)은 1년 만에 번역되어 나왔으니, 이로써 3부작이 다 번역된 것이다. 이를 번역해 준 우치다 선생의 제자 박동섭 선생에게 감사드린다. 덕분에 일본어를 1도 모르는 사람이 한국어로 우치다의 명저를 읽는 기쁨을 맛보았다.


2.

<레비나스, 타자를 말하다>의 원제는 '타자와 사자(他者と死者)', 부제는 '라캉에 의한 레비나스'다. 일본어판을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원제와 부제 모두 사라졌다. 원제와 부제 모두를 그냥 살렸다면 글의 성격과 내용이 분명히 드러나겠지만, 한국독자들의 흥미를 끌기에는 어렵겠다는 출판사의 판단이 있었던 듯하다.

어쨌든, 우치다 선생의 대부분의 저술이 급박하게, 또는 짬나는 대로 쓴 책이라면 레비나스 3부작은 작심하고 시간을 내서 쓴 책이라, 글의 강도와 밀도가 확실히 차이가 난다. 그러니 마음을 단단히 먹고 읽어야 한다. 물론 안정적인 시간을 마련해서!

이 조건을 충족한다면 이번 책 <레비나스, 타자를 말하다>를 읽는 재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을 텐데, 이 책은 유태인 학살이라는 2차 세계대전이 겪으면서 겨우 살아남게 된 레비나스의 '살아남은 자'로서의 윤리의식을 - 유책성(有責性)이라는 개념을 - 절실히 느낄 수 있음과 동시에 '죽은 자'를 애도하는 방법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배울 수 있게 된다. 이와 더불어 동시대인 라캉의 철학(정신분석학)의 난해한 저술이 어떻게 레비나스의 윤리학과 만날 수 있는지, 우치다 다쓰루의 놀라운 통찰력을 통하여 접하게 된다.


3.

우리는 2차 세계대전을 직접 경험하지는 못했으므로 유대인 레비나스 (그는 유대인이자 프랑스 국적을 가졌기에 학살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의 고통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책임의식을 정확히 공유할 수는 없지만, 그와 유사한 사건인 세월호 사건과 이태원 참사를 겪으면서 살아남은 자로서의 슬픔과 책무를 뼈저리게 느끼면서 레비나스 철학에 깊이 공감할 수 있게 된다.

아울러 자신이 직집적인 가해자도 아니고, 오히려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죄책감을 느끼고 책임감을 갖게 되는지에 대해 깊이 있는 이해에 도달하게 된다. 또한 죽은 자를 소환하여 그들을 대신해서 책임을 묻는 자가 아니라, 죽은 자에게 소환당하여 자신의 유책성을 감당하고 살아가는 새로운 윤리적 태도를 배우게 된다. 그것은 저주도 중오도 복수심도 아니고, 타자에 대하여 무한책임감을 느끼는 사랑의 형태일 것이다.


4.

자, 이제 레비나스 3부작의 마지막 책을 읽어볼까?

<추신>

레비나스의 철학에 대하여 관심이 있으신 분을 위해 예전에 올렸던 링크를 다시 올린다.

2021 독서노트 4 : 레비나스와 대담 (brun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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