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는 공자가 세상을 떠난 지(기원전 479년) 107년이 지난 기원전 372년에 추나라에서 태어났습니다. 기원전 289년에 죽었으니 84세를 살았네요. 동시대에 서양에서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활약하고 있었지요. 맹자의 생애에 대한 가장 짧고 압축적인 소개는 사마천이 쓴 《사기》에 소개된 글인데요. 한자로는 137자밖에 안 됩니다. 한글로 읽어볼까요?
《사기》에 쓰여진 맹자
맹자(맹가)는 추나라 사람이다. 자사의 문인에게서 수업했다. 도가 이미 통하자 제나라 선왕에게 유세했다. 선왕이 능히 기용하지 못하자 양나라로 갔다. 양혜왕이 말하는 바에 실질이 없었다. 맹자를 보고는 세상사에 어둡고 치밀하지 못하다고 여겼다. 이 당시에 진은 상군(상앙)을 등용해 부국강병하고, 초나라와 위나라는 오기를 등용해 약한 적과 싸워 이기고 제나라 위왕과 선왕은 손자(손빈)와 전기의 무리를 등용하니 제후들이 동쪽으로 향해 제나라를 섬겼다. 천하가 바야흐로 합종연횡에 힘써 치고 정벌하는 일을 현명하게 여기는데 맹가는 요순과 하, 은, 주 삼대의 덕을 펼치니 이 때문에 간 곳의 사람들과 의견이 합치되지 않았다. 물러나 만장의 무리와 함께 시경, 서경을 서술하고 공자의 뜻을 펼쳐 맹자 7편을 지었다.
- 사마천, 《사기》 권 74 <맹자순경열전>
풀어서 설명해볼게요. 맹자의 성씨는 맹이고, 이름은 가입니다. 이름인 가(軻)자는 수레를 뜻하기도 하지만, 가난하고 힘들게 산다는 뜻도 있습니다. 한편 맹자가 태어난 추나라는 공자가 태어난 노나라와 가깝지요. 아주 작은 나라랍니다. 맹자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가 가르쳤던 제자에게 배웠어요. 자사는 공자의 제자인 증자(증삼)에게 배웠지요. 그러니까 공자 – 증자 – 자사 – 자사의 제자 – 맹자를 연결하면 맹자는 공자의 4대 제자쯤이 되는 거네요. 공자의 생애를 기록한 《논어》, 증자가 썼다는 《대학》, 자사가 쓴 《중용》과 더불어 맹자와 그의 제자들이 함께 쓴 《맹자》는 후대에 ‘사서’로 알려지며 경전으로 높이 받들어졌어요.
맹자가 살았던 시대를 전국시대라고 하는데, 이 시대에 강대국은 맹자가 찾아갔던 제나라와 양나라(위나라) 뿐만 아니라, 진나라, 한나라, 조나라, 초나라, 연나라 등이 있었어요. 7개의 나라가 영웅처럼 활약했다고 해서 ‘전국칠웅’이라고 불렀지요. 맹자는 강대국인 제나라와 양나라에 갔지만, 두 나라의 왕들은 맹자의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맹자는 전쟁을 통해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어서는 안 되고, 사랑과 올바른 정치를 통해서 벡성들의 마음을 얻어 부강해져야 한다고 주장했거든요. 그래서 맹자의 주장과는 달리 강력한 법을 주장했던 상앙이나 강력한 군대를 양성한 오자(오기)나 손자(손빈) 등을 더 대접했지요. 그런데 맹자는 과거 태평성대를 이룩했던 요순시대나, 하나라의 우왕, 은나라의 탕왕, 주나라와 문왕과 무왕의 예를 들어 힘이 아니라 덕으로 세상을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공자가 중국천하를 돌아다녔지만 공자의 사상이 각 나라의 임금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처럼, 맹자도 세상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지만 실패하고 말았어요. 그래서 말년에는 고국으로 돌아와 제자인 공손추, 만장 등과 함께 《맹자》라는 책을 지었지요.
맹자의 조상과 아버지 : 맹손씨와 맹격
사마천의 맹자소개는 너무 짧아서, 부모님의 이름조차 써있지 않아요. 그래서 다른 책들을 참고해야 해요. 맹자에 대해 가장 소상히 적혀있는 글은 후한시대에 조기라는 사람이 쓴 <맹자제사>인데, 이 글의 내용과 유향이 기원전 6년경에 쓴 《열녀전》 등을 참고하여 살펴보려구요.
맹자의 조상은 공자의 나라인 노나라 귀족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맹자는 본래 노나라 귀족인 맹손씨의 자손이다. 그래서 맹자는 벼슬을 제나라에서 했어도, 어머님이 돌아가시자 장례를 노나라에 돌아와 치렀다. 노나라의 삼대 귀족 중 하나였던 맹손씨의 자손이라고 그 기세가 약해지면, 다른 나라에 들어와 살 수밖에 없었다.” - 조기, <맹자제사>
그러니까 맹자는 몰락한 노나라의 귀족인 맹손씨의 후손으로 나중에는 ‘맹손’이란 성에서 ‘손’을 떼고, ‘맹’만을 성씨로 쓴 것이지요. 맹자의 아버지 맹격은 맹자가 태어난 지 3년 만에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도 있고, 자식을 아내에게 맡기고 성공하기 위해 밖을 떠돌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는 설도 있어요. 어찌되었든 아버지가 없이 홀어머니 곁에서 자라야했던 맹자였기에 어머니나 맹자나 고생이 많았겠네요.
맹자 엄마 : 장씨 부인
맹자의 어머니는 성이 장(仉)씨인 것만 알려지고 이름은 알려지지 않아요. (옛날에는 여성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어요. 참 슬픈 일이지요.) 맹자 어머니는 현명한 어머니로 널리 알려지고 있는데, 그와 관련된 고사로 ‘맹자 어머니가 세 번을 이사하는 이야기’가 유명하지요. 처음 이사한 곳은 공동묘지 근처였는데, 맹자가 장례식을 흉내내며 놀아서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고, 시장 부근으로 이사했더니 장사꾼 흉내를 내서 다시 이사를 갔고, 마지막으로 학당 근처로 갔더니 예절바른 선비 흉내를 내서 더 이상 이사를 가지 않았다는 이야기이지요.
자식의 교육을 위해 좋은 곳으로 이사가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았나 봐요. ‘맹자 엄마가 베를 자른 이야기’도 유명해요.
학문에 전념할 만한 나이가 되자 맹자는 고향을 떠나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쳤던 맹자가 기별도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마침 베틀에 앉아 길쌈을 하고 있던 맹자의 어머니는 갑자기 찾아온 아들을 보고 크게 기뻤지만, 불현듯 찾아온 아들에게 물었다. “얘야, 네 공부가 어느 정도 되었느냐?” 맹자가 대답했다. “아직 다 마치지는 못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맹자 어머니는 짜고 있던 베틀의 실을 끊어버리고는 크게 꾸짖었다. “네가 공부를 중도에 그만두고 돌아온 것은 지금 내가 짜고 있던 베의 실을 끊어버린 이치와 같은 것이다. 이루고자 하는 바가 있으면 전심전력을 다해야 하는데 너는 그러한 자세로 무엇을 이룰 수 있겠느냐?” 어머니의 이 말에 크게 깨달은 맹자는 다시 스승에게 돌아가 더욱 열심히 학문에 집중하였다. - 유향, 《열녀전》
자식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가난한 살림살이를 위해 짜던 베를 끊어버리는 어머니의 엄격함이 놀랍지요. 위의 두 고사는 ‘맹모삼천지교’, ‘맹모단기지교’라 하여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져 있어요. 그보다 덜 알려진 이야기로는 ‘돼지고기를 사 먹인 이야기’가 있는데요. 맹자의 어린 시절 시장근처에서 살던 때 이야기입니다.
맹자가 어렸을 적 어느 날 동쪽 집에서 돼지를 잡았다. 맹자가 이를 보고 어머니에게 "이웃집에서 돼지를 왜 잡아요?"라고 물었다. 어머니는 무심코 "널 먹이려고 잡는 거지"라고 말했다. 말을 마치자마자 맹모는 바로 후회하면서 “내가 이 아이를 가졌을 때 그토록 태교에 힘썼건만, 이제 막 이 아이가 사리 분별을 하게 되었는데 내가 거짓말을 하다니”하면서 한탄을 했다. 그러고는 바로 동쪽 이웃집에 가서 돼지고기를 사와 맹자에게 먹였다. 맹자는 장성하여 학문을 익히고 위대한 선비가 되었다. - 《한시외전》
이처럼 자식을 참되고 바르게 키우던 맹자 어머니는 맹자가 제나라에서 높은 자리(객경)에 있었던 기원전 315년에 돌아가셨습니다. 맹자는 어머니의 장례를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우고 노나라로 가서 어머니의 제사를 성대하게 치르지요. 가난했던 선비시절에 아버지 장례식을 소박하게 치렀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대부의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성대하게 치를 수 있었어요. 하지만 제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삼년상은 치르지 못하고 대신 돌로 자신의 모습을 깎아 어머니를 기렸어요. 지금도 맹자어머니를 기리는 계성침전에서 이 석각상을 볼 수 있지요.
맹자 아내 : 전씨 부인
맹자의 어머니가 자세히 알려진 것에 비해 맹자의 아내와 자식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그의 아내가 전씨라는 것과 역이라는 아들을 낳았다는 정보가 《맹씨보》에 적혀있을 뿐이지요. 하지만 맹자와 아내 사이가 그렇게 좋았던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유향이 쓴 《열녀전》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맹가가 아내를 맞이한 뒤의 일이다. 어느 날, 맹가가 아내의 방에 들어가려 하는데 마침 아내가 상반신을 드러낸 채 쉬고 있었다. 그것을 본 맹가는 기분이 나빠져 도로 나오고 말았다. 그러자 맹가의 아내는 시어머니에게 가서 친정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말했다. “부부란 서로 거리감을 두지 않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한데 제가 방에서 편히 쉬고 있을 때 방에 들어왔다가 그 모습을 본 남편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이것은 저를 남처럼 취급한다는 뜻입니다. 시집와서 남 같은 대우를 받는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니 저를 친정으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그리하여 맹모는 맹자를 불러 말했다. “문을 열고 들어갈 때는 실례한다는 말을 해야 한다는 예법이 있는데, 그것은 남의 입장을 존중하기 위해서가 아니냐. 집에 들어갈 때는 소리를 내라고 하는 것은 그 안에 있는 사람의 주의를 끌기 위함이다. 또한 방에 들어갈 때는 눈을 아래로 두어야 한다는 것은 행여 방 안에 있는 사람의 부주의한 상태를 보지 않기 위함이다. 그런데 너는 말없이 아내의 방으로 들어갔다. 자신이 예를 지키지 않고 어찌 아내의 무례를 나무라려 하느냐?” 맹가는 고개를 숙여 사죄하고 아내를 붙들었다. - 유향, 《열녀전》 <모의전(母儀傳)>
며느리의 처지를 이해한 맹자의 어머니가 맹자를 나무라는 대목입니다. 부부사이에도 지켜야 할 예의가 있는데, 맹자가 먼저 지키지 않아놓고 도리어 화를 낸 것을 나무란 것이지요. 순자가 쓴 《순자》 <해폐편>에서 ‘맹자는 패덕을 싫어하여 부인을 내쫓았는데, 이는 가히 스스로 수신에 힘쓴 것’이라는 글이 있는데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어요. 사실이라면, 맹자의 부부사이는 끝까지 안 좋았던 것이지요.
맹자의 후손들
맹자의 후손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 없어요. 한나라 무제가 유학을 국학으로 삼은 후부터 공자의 집안은 역대 왕조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았지만, 맹자의 후손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맹자 사후 1300여년 동안 맹자의 후손은 역사 속에서 사라진 것 같았지요. 그런데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북송 시대에 공자의 45대손 공도보(985~1039)가 1036년 맹자의 고향인 추현을 관할하는 관직을 얻었을 때 맹자를 기리는 두 가지 일을 진행했어요. 첫째가 맹자의 무덤을 찾는 일이었고, 둘째가 맹자의 후손을 찾는 일이었지요.
공도보는 두 가지 일에 모두 성공합니다. 맹자묘를 찾아서 그 기슭에 사당을 세우고 공식 제사를 모시게 됐지요. 한편 맹자의 45대 후손인 맹녕을 찾아, 그를 조정에 천거하여 벼슬을 얻게 합니다. 추현의 관리가 된 맹녕은 맹자의 제사를 주관하고, 옛집을 수리하던 중 벽장에서 숨겨둔 족보를 발견하게 되지요.
이후로 맹자의 후손들은 맹자의 유적지를 관리하는 맹부에 거주하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어요. 맹부에 가면 맹자의 후손 사진들이 있는데, 현재는 75대손 맹상협이 대만에 거주하고 있어요.
아는 것이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