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성론의 탐구, 선함이란 무엇인가?
지난 시간엔 맹자의 시대와 생애, 그리고 불행한 인간 루소의 시대와 생애에 대해 살펴보았다면 오늘은 사상의 핵심에 해당하는 부분을 살펴보려고 해요. 특히 인성론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왔다 갔다 하지 않고 맹자 쭉~, 루소 쭉~ 살펴보겠습니다.
인성론을 다룬 사람은 맹자만 있는 것은 아니에요. 인성론, 인간이 선하냐 악하냐, 대학교 논술 문제에서도 자주 나오는 주제거든요. 인간이 선한가요, 악한가요? 관점에 따라 다른 거예요. 인간이 선한지 악한지 알 길이 없어요. 선한 면이 있기도 하고, 악한 면이 있기도 하고. 과학적인 면으로 접근할 순 없어요. 사실은 인간만이 아니라 새도 선한지 악한지, 어찌 보면 굉장히 선한 것 같아요. 엄마가 먹이를 물어다가 배 고파도 지가 먼저 먹지 않고 새끼에게 먼저 주잖아요. 동물도 그런 측면에서는 선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선하냐 악하냐 하는 것은 어떤 생물학적인 접근은 아니에요. 그런 점에서 애들을 봐라, 만날 남의 것 뺏으니까 악하다, 아니다, 천사 같은 눈을 봐라, 선하다 하는 것은 초딩이나 하는 얘기구요, 선하다 악하다 하는 논의의 배경에 뭐가 있는지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베이스를 깔기 위해서 인성론이 시작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법을 통해 세상을 다스려야 한다는 사상이 법가 사상이지요? 법이라고 하는 것은 법이 없는 사회는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에요. 그럼 어떤 생각을 전제하겠어요? 인간은 악하다? 선하다? 악하다는 생각을 전제하겠지요. 악하니까 악을 다스리기 위해서 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에요. 반대로 그런 폭압적인 정치가 아니라 인간의 본래의 모습을 잘 살려주면 인간의 삶은 아름다워진다고 생각하면 인간은 선하다는 생각을 전제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는 그보다 좀 더 순정한 차원에서 보자면 인간은 태어날 때는 그 자체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데 선한 환경을 만나면 선해질 수 있고, 악한 환경을 만나면 악해질 수 있다. 마치 아이가 정글에서 태어나면 정글의 아이로 자라고, 문명사회에서 태어나면 문명사회의 아이로 자라나는 것처럼 선천적인 게 문제가 아니라 후천적으로 인간의 삶은 다르게 살아갈 수 있다, 뭐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베이스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봐요. 실체론, 본질론의 접근이 아니라 사회론이고 정치론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오히려 인성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고자 대 맹자, 성무선악설과 성선설
고대 중국에서는 인성론이 굉장히 많아요. 대표적인 인성론이 세 가지 있습니다. 그 세 가지 중에 두 가지를 <맹자>가 다루고 있어요. <맹자>에는 ‘고자(告子)’라는 파트가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고자 말고. (웃음) 이 양반은 제나라의 대 학자예요. 사상적 계보로 치면 약간 도가 쪽의 사상가예요. 도가(道家), 하면 뭐가 떠오르나요? 자연이 떠오르시죠? 도가에서 자연은 악한 것이 아니잖아요?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은 것이거든요. 고자도 인간은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다고 생각했어요. 용어로 굳이 말하자면 성무선악설(性無善惡說), 원래 본성이라고 하는 것은 선과 악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고자는 성무선악설을 이야기하면서 몇 가지 사례를 들어요.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뭔가 하면 물이예요, 물. 물은 이렇게 탕탕히 흘러가요. 막히면 고이기도 하고, 돌아가기도 하고, 넘쳐 흐르기도 하고. 고자가 보기에는 물의 성질은 인간의 본성과 유사하다는 것이에요. 막 움직이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이 물은 움직이고 싶은데 물길을 동쪽으로 트면 물이 동쪽으로 흘러가겠죠? 서쪽으로 트면 물이 서쪽으로 흘러가겠죠? 그런 것처럼 동쪽이 악한 쪽이고 서쪽이 선한 쪽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본성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고 그저 물처럼 흘러가고 싶은 것이 본성인데, 그것을 선한 쪽으로 이끌면 선하게 되고, 악한 쪽으로 이끌면 악하게 된다라는 것이 고자의 기본적인 생각이에요. 오히려 선과 악 이전에 인간의 본원적인 생명력, 탕탕하게 흘러가는 본원적인 생명력을 좀 더 강조하는 입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자가 그렇게 말하니까 맹자가 어떻게 대꾸해요. 그렇지요. 동쪽으로 흘러가기도 하고 서쪽으로 흘러가기도 하지요. 그런데 근원적으로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지 않습니까?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인간의 본성은 선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인위적인 조치를 취해서 물을 거꾸로 치솟게 할 수도 있어요. 분수가 그런 케이스잖아요. 분수가 인위적으로 물을 뿜어 올리는 거잖아요? 그러나 그 힘이 다 하면 분수는 또다시 밑으로 내려가잖아요. 끝없이 올라가는 게 아니잖아요. 그처럼 인위적으로 인간을 악하게 할 수 있으나 본성을 잘 살려보면 인간은 당연히 선한 방향으로 흐르게 되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누가 이긴 걸까요? 이기고 지고 없습니다. 제가 맹자의 비유를 간단하게 박살 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밑으로 흐르는 것이 선한 방향이라고 맹자는 이야기했지만, 나는 밑으로 흐를수록 악한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밑이 악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인간은 아무리 착하게 되려고 노력하지만 결국은 악으로 간다. 이렇게 비유할 수 있는 거예요. 비유가 가지고 있는 한계죠. 어쨌든 고자가 비유로 이야기하니까 맹자 또한 비유로 답변을 하지요.
또 고자가 이런 말을 해요. 인간의 본성은 버드나무와 같다, 이 버드나무를 가지고 그릇을 만드는 것이 버드나무가 원하는 것이겠느냐? 버드나무는 그냥 버드나무로 살고 싶은데, 인간이 거기에 어떤 인위적인 노력을 해가지고. 다시 말해 버드나무를 자르고 휘고 파서 그릇을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그건 버드나무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본성은 아니라고 이야기하니까, 맹자가 또 뭐라고 대꾸하냐 하면, 버드나무가 부드럽게 휘는 본성이 있기 때문에 그릇을 만들 수 있는 것이지, 휘는 본성이 없다면 그릇을 만들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버드나무가 부드럽게 휘어서 그릇을 만드는 것은 버드나무의 본성에 위배되는 게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해요. 이렇듯 <맹자>에 들어있는 ‘고자 편’을 보면 굉장히 다양한 비유를 통해 인간은 선하다, 악하다 하는 주제를 가지고, 고자는 끊임없이 인간의 본래의 자연스러운 성품,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자기 본 모습 그대로 살고 싶어하는 인간의 자발적인 능력, 충동, 이런 것을 강조해요. 그에 반해 맹자는 그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선을 향해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다양한 비유를 들면서 강조하지요.
이 두 분이 돌아가시고 나서 순자가 자기 책을 통해서 맹자를 깝니다. 만약에 인간이 본성상 선하다고 한다면 법률이니 교육이니 하는 것이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맹자는 끊임없이 교육을 이야기했는데, 인간이 선하다면 교육이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그런데 인간은 법률을 통해 행동을 제약하고, 교육을 통해 순화시켜야 되는 이유는, 바로 인간의 본성이 악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순자는 이야기하지요. 악한 모습의 강조는 곧 법률이나 교육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죠. 그렇듯 자기가 어떤 측면에서 인간을 접근하느냐, 어떠한 입장을 통해서 사회를 바꾸어보려고 하느냐에 따라서 인성론은 이렇게 저렇게 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춘추시대만 하더라도 인간이 그렇게 악하게 행동하지는 않았어요. 춘추시대는 예가 살아있었던, 요즘 말로 매너가 있었던 시대였다는 말이지요. 왜 그럴까요? 아직은 중국의 종주국인 주(周)나라가 영향력을 행사했던 시대였거든요. 하지만 주나라의 정치적 영향력이 극도로 약화된 전국시대에는, 주나라의 눈치를 볼 것 없이 각국이 서로가 서로의 나라를 빼앗는 전쟁의 시대가 됩니다. 전쟁의 시대에는 예가 필요 없지요? 무자비함이죠. 잔인함, 난폭함이 거의 전면적으로 드러나는 시기에 맹자가 활동했어요. 그런데 맹자는 그 잔인하고 난폭한 현상 속에서 오히려 인간의 선함을 주장해요. 역설적으로 맹자의 그런 점이 굉장히 선구적인 면입니다. 맹자가 이상주의자가 아닙니다. 골방에 처박혀 공부한 사람이 아니라, 끊임없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참혹한 세상을 파악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혹한 현상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를 잃지 않고 그것을 자기 정치사상의 베이스로 깔았다는 점에서 맹자는 굉장히 독특한 지점에 있는 사람이에요.
그렇다면 공자는 인간을 선하다고 봤을까요, 악하다고 봤을까요? 공자의 문헌을 아무리 뒤져봐도 공자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이야기 한 적이 없습니다. 굳이 있다면, 공자님께서는 하늘과 본성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하지 않으셨다, 이런 말이 있고, 또 하나를 꼽자면, 인간은 태어날 때는 가까운데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따라 점점 멀어진다, 예를 따라가는 사람은 보다 성인에 가깝고, 예를 버리고 욕망을 따라 사는 사람은 점점 더 나빠지더구나. 처음엔 비슷했지만 각도가 틀어지면 나중에는 한없이 멀어지는 것처럼 인간은 자기의 삶을 어떻게 운영하느냐에 따라서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 주더구나 하는 것이 공자의 기본 입장이에요. 이런 입장을 종합해 보면 공자는 인성론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고, 인간이 바르게 살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 지에 주목했던 사람이지요.
그러니까 사실 맹자가 공자 사상을 이어받았다고 하지만, 고스란히 이어받았다기보다는 춘추시대의 공자 사상을 전국시대에 맞추어 다시 재창조 한 사람이라고 봐야 합니다. 만약에 맹자, 공자가 서로 만났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요? 공자님이 나 그렇게 말한 적 없다? 이렇게 말하면 맹자는 공자님이 이런 시대에 사셨다면 이런 말씀을 하셨을 거라고 확신했던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독특한 지점이지요.
불인인지심, 사단론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하는 것을 맹자는 또 다른 측면에서 접근합니다. 뭔가 하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마음입니다. 제선왕이 보니까 제사 때에 쓰려고 소 한 마리가 쓱 지나가는데 소가 눈물을 뚝뚝 흘리는 거야. 왜 그렇게 눈물을 흘리냐? 물었더니, 제사 때 쓰려고 끌고 가니까 슬퍼서 운다는 대답을 들어요. 그러니까 재선왕이 너무 불쌍해서 안 되겠다, 쟤를 살려주고 양으로 잡으라고 명령합니다. 소는 뭐 울고 양은 안 우나? 그렇지만 눈에 보이는 소가 울고 있는 거야. 그런데 이게 소문이 나쁘게 나요. 왕이 제사 지내는데 좀 근사하게 소를 잡아야지 쫀쫀하게 양을 잡고. 이런 쫌생이같은 임금이라고. 그래서 제선왕이 조금 삐졌어요. 그런데 맹자가 이 사례를 듣고 제선왕에게 가서 말해요. 잘 하신 거라고. 제선왕은 여태까지 욕만 들었는데 맹자에게 칭찬을 들은 거예요. 왜, 왜 잘했는데? 그랬더니 맹자가 대답해요. 임금님께서 눈물 흘리는 그 소를 보면서 죽이지 못하는 마음, 그걸 ‘차마 어쩔 수 없는 마음[不忍人之心]’이라고 합니다. 바로 그 마음으로 선정을 베푸십시오. 눈 앞에 소도 불쌍히 여겨 죽이지 못하는 데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혹독한 마음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임금님의 마음이 바로 제가 원하는 마음입니다. 뭐 이런 식으로 이야기해요. 쫀쫀한 임금이 아니라 선정을 베풀 수 있는 임금이라는 칭찬을 들은 제선왕은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맹자는 레토릭이 장난 아니지요?
이건 나중에 맹자의 ‘사단(四端)론’으로 좀 더 정교해집니다. 사단론이란, 인간의 마음속에는 네 개의 단서가 있다는 거예요. 사단(四端), 네 개의 근거, 씨앗. 마음 밭에는 네 개의 씨앗이 있다는 거예요. 그 네 개의 씨앗을 뭐라고 말하는가 하면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 이렇게 네 개의 씨앗이 있다는 건데, 이 중에서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설명해볼게요. 우물에 아이가 빠지려고 해 지금 막. 아무것도 모르는 애가 우물에 빠지려고 하면 사람들이 우우~ 하면서 달려가서 구해주려고 할 거란 말이지요? 구해 줄 때 내가 얘를 구해주면 백 만원 정도는 최소한 부모가 나한테 주겠지? 이런 마음으로 구하지는 않을 거라는 거죠. 또는 내가 안 구해주면 다른 사람들이 욕 하겠지? 이러지는 않을 거라는 거죠. 그냥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거의 오토매틱으로 가서 구해준다는 거죠. 또는 직접 구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어어, 저러면 안 되는데? 이런 마음을 가질 거라는 거죠. 철없는 애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아무리 나쁜 놈이라도 오 예~, 한 발만 더! 음, 죽었군. 인구 하나 줄었어. 이러지는 않을 거라는 얘기죠. (웃음) 인간이라면 아무리 악한 놈도 그런 상황을 보면 그 아이를 불쌍하게 생각하고 그 아이를 건지려고 하는 그 마음이 있다는 거죠. 그게 바로 측은지심이라는 겁니다. 이 측은지심이 마음에 있어, 그래서 심(心)이지요. 그 마음을 잘 키우면 거기서 열매가 맺혀져요. 그게 바로 인(仁)이야, 사랑. 그러면 인한 사람이 되는 것이죠.
그 다음에 수오지심(羞惡之心)은 뭔가 하면 창피해하는 마음,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 가령 컨닝을 했어요. 안 들켰네? 성적이 올랐네? 오르면 기분은 좋네? 그런데 좀 찜찜해. 들키지는 않았으나, 선생님도 짝꿍도 아무도 모르나 내가 컨닝했다는 그 마음은 나한테 통쾌하지는 않아요. 좀 창피해, 찜찜해. 남의 봐서 그런 게 아니라 나 스스로가 창피해. 적어도 인간은 이런 마음을 갖는 거지요. 이런 마음이 잘 커지면 정의[義]라고 하는 열매를 맺는다는 거예요. 정의라고 하는 건 뭔가 하면 자기가 삶을 살면서 이렇게 살려고 했는데 그렇게 못 살았구나, 하는 그 마음. 그 마음을 잘 키우면 그렇게 살게 되잖아요? 정의라는 것은 그런 것이죠. 어디 먼 곳에 있는 게 아니라 자기 마음 속에서 이렇게 살아야 하는데 못 살아서 부끄럽구나, 하는 마음을 잘 키우면서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고치면 정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사양지심(辭讓之心). 사양지심은 뭔가 하면 내가 먼저가 아니라 너 먼저. 사양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맛있는 게 있으면 먼저 먹고 싶죠? 맛있는 거 딱 있으면 먼저 먹고 싶은 것이 인간적인 근원적인 욕망이겠죠? 그런데 맛있는 거 딱 보자마자 새끼가 떠올라. 아이들이 이거 좋아하는데. 치킨 다리 딱 들었는데 갑자기 아들이 떠올라. 이거 먹으면 굉장히 좋아할 텐데. 뭐 이런 생각이 든단 말이죠. 물론 난 눈 딱 감고 먹습니다. (웃음) 먹은 다음에 한 마리 더 시켜서 갖다 주지요. 그 때에 아, 이거 내가 먹고 싶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고 싶은 마음, 부모님한테도 그런 마음이 생길 것이고, 그런 마음이 인간에게는 근본적으로 있다. 그 마음을 잘 키우면 그게 바로 예(禮)가 된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시비지심(是非之心).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사실은 뭘 배우고 대학 나와야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아니에요. 옳고 그름은 개도 알아요. 개장수가 오라고 하면 안 와요. 으르릉~! 주인이 부르면 발로 차려고 해도 와요. 주인인 걸 알잖아. 그런 것처럼 옳고 그름은 배워서 아는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의 마음속에 그런 마음이 있는 거지요. 그걸 잘 완성하면 열매가 뭐야? 지혜[智]. 그래서 인의예지(仁義禮智)라고 하는 인간이 도달해야 할 최고의 덕목, 유학에서 말하는 인의예지는 다른 곳에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의 마음 속에 그 씨앗이 있고, 그 씨앗을 잘 발현시키면 완성된 인간이 된다고 하는 겁니다. 마음에 있다는 거죠.
양심, 양지, 양능
그래서 맹자는 뭐라고 얘기하는가 하면, “인(仁)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고, 의(義)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가야 할 길이다.”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정의의 길을 걸어라. 멋있잖아요? 그러면 이 사단의 마음을 한 단어로 뭐라 했느냐? 그걸 ‘양(良)’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양심(良心) 좀 가져라, 할 때 그 양심 있죠? 그 양심의 어원이 맹자한테서 온 거예요. 이 ‘양’자가 무슨 ‘양’자인가 하면 ‘좋을 양’자예요. ‘굿(good)’ 이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원래 양은 좋다는 뜻도 있지만, ‘본래의, 고유한’이라는 뜻도 있어요. 양심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좋은 마음이다. 이 양심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양지(良知), 좋은 앎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그리고 양능(良能), 양능이란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도 인간에게는 기본적으로 있다고 봤어요. 이처럼 모든 인간에 대한 근원적 신뢰를 가지고 있는 사상이 맹자의 생각입니다.
이건 전국시대 때 보기 드문 사상입니다. 공자님이 맹자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럴 듯한데?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을 수도 있어요. 공자님은 인의예지, 이걸 세트로 한 묶음으로 말한 적은 없어요. 논어에서는 이걸 세트로 설명하지는 않아요. 그냥 각각의 고유한 주어, 또는 술어의 역할을 해요. 그런데 맹자에 와서 이 네 개를 한 묶음으로, 인의예지라고 하는 한 묶음으로 개념화한 거예요. 그래서 인의예지를 아세요? 그러면 공자님은 뭔 얘기여? 그러실 거예요. 몰라. 맹자가 세팅한 거니까. 사실 공자의 예라고 하는 것은 주나라의 예죠. 어찌 보면 인간의 마음이 아닌 제도에 있는 거라고 볼 수 있어요. 공자의 가치관은 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나라의 아름다운 제도 속에 있는 것이었어요. 그것을 내 걸로 구현하는 삶이 공자의 삶이었어요. 그런데 맹자가 활동했던 시기는 주나라가 망하던 시기예요. 다시 말해 예(禮)라고 하는 것을 외부적으로 설정할 수 없었던 시대예요. 그렇다면 어디에 설정해야 하겠어요? 내 마음속에 설정하는 거죠. 그런 점에서 맹자는 칸트하고 비슷해요. 칸트가 인간의 선함, 인간의 이성, 이런 것을 신적인 영역으로 넘기지 않고 자기 내부의 영역으로 설정해놓고 인간의 휴머니즘을 중심으로 새로운 철학을 펼치고자 한 사람이거든요. 그런 칸트하고 유사한 생각이 맹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뭔가 하면 이렇게 본래는 훌륭한 인간들이 왜 이렇게 개같이 사는 거야? 왜 이렇게 서로 싸우고 난리가 나는 거야? 훌륭한 인간이라면 훌륭하게 살아야 하는데 왜 그렇게 형편없이 살아가게 되었느냐? 이 질문에 대답 못하면 맹자 이야기는 그냥 판타지인거죠. 인간은 착해, 울면 안 돼, 우는 아이에겐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안 줘, 이런 거와 비슷한 동화 같은 이야기가 될 거예요.
본성과 현실의 이 괴리에 대한 해명으로 맹자는 우산(牛山)에 대한 사례를 듭니다. 우산이 뭔가 하면, 맹자 시대에 제나라의 수도가 임치(臨淄)거든요, 임치에 있는 큰 산이 우산이에요. 큰 도시를 건설하고 유지하려면 나무들이 많이 필요하겠죠? 그래서 원래 이 우산에 숲이 우거졌는데 건물을 짓는다, 땔감을 쓴다 해 가지고 나무를 베기 시작했어요. 개발한거죠. 그래가지고 나무들을 전부 다 건물 짓고 땔감용으로 쓴 거예요. 그래서 그 울창했던 산이 민둥산이 된 거예요. 이러한 사실을 당대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맹자는 우산의 사례를 들면서, 저 우산을 봐라, 저 우산이 원래부터 저렇게 민둥산이었는지 아느냐, 지금 보면 민둥산처럼 보이지만 원래 우산은 나무가 우거지고 생명이 넘치는 그런 아름다운 산이었다, 그런데 인간이 욕심으로 제 멋대로 써 가지고 저렇게 벌거숭이 산이 된 것이다. 인간은 저 우산과 같다. 본래의 선한 모습으로 있었는데 인간의 욕심과 욕망이 그것을 잘라서 끊임없이 썼기 때문에 자기 마음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자기 눈의 소리, 귀의 소리, 이걸 이목지관이라고 하는데, 눈과 입에 보기 좋은 거, 듣기 좋은 거, 먹기 좋은 거, 이런 것만 추구하다보니, 마음의 소린 듣지 못하고 육체의 욕망에 따라 살다 보니 저렇게 민둥산이 되어 버린 것이다. 만약에 자기 마음의 소리만 들어본다면 저 산이 저렇게 민둥산이 되었겠느냐? 이렇게 말한 거지요.
욕망의 우선순위
실제로 이전에 녹화사업이라고 있었잖아요. 우리나라 녹화 사업은 굉장히 정치적인 사업이었지만, 식목일날 나무심기 그런 거 있었잖아요. 그런 것처럼 자기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줄 수 있다면 민둥산이 민둥산으로 남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뭐예요, 인간은 본래 선하게 태어났으나 자신의 본래 모습을 지키지 못하고, 선한 모습을 꺾어버리고 잘라버리고 제거해 버림으로 악한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이 맹자의 진단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면 이제 자연스러운 원인이 규명되었으니까 원래의 선한 모습을 되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원인이 규명되면 해결방법도 나오게 되는 것이지요. 해결 방법이 뭔가 하면 욕망이예요. 욕망의 우선순위를 정하라! 맹자라는 책을 보면 맹자 이 사람은 뜬구름 잡는 얘길 하는 게 아니라 굉장히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요. 특히 신체와 관련된 이야기는 엄청나게 비유를 잘 드는구나, 알 수 있어요. 수사학을 제대로 배운 사람인거죠. 예를 들면, 내가 배가 고파. 물고기를 잡아 줘. 그러면 물고기를 맛있게 먹죠. 배가 고픈데 요리가 두 개가 나와. 하나가 곰발바닥 요리이고 하나가 물고기 요리야. 물론 곰발바닥 요리 못 먹어보셨죠? 아마 물고기를 택할 수도 있어. 중국 사람들에게 물고기가 천 원이면 곰발바닥은 백만 원쯤 한다치고. 그러면 당연히 두 개 중의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 곰발바닥을 택하겠죠. 금이 있고 은이 있다, 그러면 뭘 택할까요? 금을 택하겠죠. 하늘이 주는 것이 있고 사람이 주는 것이 있다, 뭘 택할까요? 하늘이 주는 걸 택하겠죠. 이런 식으로 자기 삶에서 욕망의 우선순위를 정해서 귀한 것을 먼저 택하자는 거죠.
이런 비유도 있어요. 손가락이 아파. 손가락이 살짝 구부러졌어요. 살아가는데 별 문제 없어. 그런데 용한 의원이 이걸 딱 펴는 능력이 있다는 거야. 살아가는데 별 문제 없고 좀 흉측할 뿐인데 딱 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거야, 그러면 ktx타고 날라가겠죠? 이걸 펴려고. 사람들은 요정도 불편한 손가락을 가지고도 고치려고 부산으로 날아가는데, 마음이 구부러진 것은 절대 안 펴려고 해요. 마음 구부러진 게 훨씬 귀한 건데, 마음은 안 펴려 하고 손가락은 펴려고 한다는 거야. 정말 보살펴야 할 것을 보살피지 않고 보살피지 않아도 될 만한 그것, 그걸 쫙 펴려고 온갖 돈을 들여서 달려간다는 거야. 그런 의미에서 당시 사람들은 육체를 아름답게 꾸미고 육체의 만족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별의 별 짓을 다 하지만, 자기 마음을 아름답게 꾸미고 살피는 데는 별로 돈을 안 쓴다는 거야. 마음 꾸미고 마음 살피는 게 뭐예요? 인문학이잖아요. 그래서 여기 있는 거잖아요, 지금.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굉장히 훌륭한 자리에 있는 거예요. (웃음) 내가 갑자기 삼천포로 빠졌네요. (웃음)
천착을 따라라
맹자는 그런 비유를 들면서 욕망의 우선 순위를 정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마음을 팍 놓아버리면 안 된다는 거예요. 마음을 팍 놓아버리는 것을 뭐라고 하는가 하면 방심(放心)한다. 아, 이번에 방심했어, 이런 얘기 하죠? 맹자의 얘기예요. 방심의 반댓말이 뭔 줄 아세요? 조심(操心)이예요. 이것도 맹자의 개념이지요. ‘조(操)’라는 것은 ‘조절한다, 컨트롤한다.’는 뜻이에요. 맹자의 용어 중에는 ‘구방심(求放心)’도 있어요. 방심한 너의 마음을 구하라. 너의 마음을 구해서 너의 마음을 조심해라. 너의 마음을 잘 컨트롤해라.
그 마음의 소리를 잘 들어서 하늘이 주는 지위를 따라가라. 그걸 ‘천작(天爵)’이라고 해요. 사람이 주는 지위[人爵]는 오래 못가요. 가령 임금이 문화부장관 시켰다가 잘 못하면 한 달만에 교체할 수도 있잖아요. 사람이 주는 지위는 그것이 굉장히 높아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형편없이 낮은 것일 수도 있다는 거예요. 언제 바뀔지 몰라. 그러나 하늘이 주는 지위는, 자기 양심을 지키고 사는 사람은 요순과 같은 사람이에요.
맹자는 놀라운 이야기를 했어요. 요임금도 나도 똑같은 사람이다. 내가 요임금처럼 생각하고 요임금처럼 살면 내가 요가 될 수 있고, 순임금처럼 생각하고 순임금처럼 살면 나는 순이 될 수 있다. 요순도 일개 인간에 불과하다! 당시 요순(堯舜)은 유학으로 치면 엄청난 우상과 같은 존재예요. 그런데 맹자는 그 요순임금조차도 나하고 똑같은 인간이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인간에 대한 근원적 신뢰를 가지고 있었어요. 요즘 식으로 이야기하면 내가 곧 대통령이다, 이 얘기예요. 내가 대통령처럼 생각하고 대통령처럼 살면 내가 대통령이 될 수 있다. 그러면 자기의 마음의 소리를 듣고 마음의 소리대로 살아가면 요임금도 되고 순임금도 될 수 있다면, 요임금과 순임금이 하늘의 명령을 따라서 임금이 된 거잖아요, 그걸 천작이라고 한다고. 하늘이 준 작위는 인간이 함부로 바꿀 수 없는 거예요. 반면 인간이 준 지위는 딱딱 바뀌죠. 그러니 천작을 따르고 인작을 따르지 말라고 한 맹자의 이야기가 참 위대하게 들리는 거예요.
우리는 때로 유혹에 굉장히 약해져요. 월급을 많이 주면 양심에 위배되어도 솔깃해지죠. 또는 엄청난 재물, 엄청난 지위를 준다고 하면 자기 양심의 소리는 잠깐 저버리고 그걸 따르기도 하죠. 맹자의 놀라운 점은 한 번도 생애에서 그래 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사실 맹자가 조금만 마음을 방심했더라면 맹자는 굉장히 높은 지위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사람이었거든요. 맹자는 그러한 직위를 원하지 않았어요. 왜? 맹자는 임금을 가르칠 수 있는 스승이다, 나는 하늘의 지위가 나에게 내려져 있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에요. 이러한 사람이기 때문에 맹자는 자기에 대한 프라이드라고 할까요? 선비의식이 하늘로 찌르는 거지요. 이 맹자의 사상이 고스란히 전해진 곳이 바로 조선이에요. 조선의 사대부가 왜 그렇게 임금한테 개겼겠어요? 사대부는 관직에 있을 때는 신하죠. 그러나 관직에 없을 때는 왕의 스승도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예요. 그래서 상소문 올리는 거야 왕한테. 상소문 올린다는 게 뭐예요? 왕을 가르친다는 거예요. 내가 널 가르치니 이런 걸 하라! 이런 꼬장꼬장한 정신은 맹자에게서 배워서 나오는 거예요. 맹자는 그런 의지가 있었던 거예요. 굉장히 터프하면서도 강직한 그런 사람이죠.
그렇기 때문에 맹자는, 심하게 말하면 임금 알기를 우습게 알았어요. 맹자는 이런 말을 했잖아요. 나라가 있으려면 군주가 있고, 사직이 있고, 백성이 있어야 하고. 이 중에서 제일 가벼운 게 임금이다. 임금은 잘못하면 갈아 치우면 돼. 사직은 쉽게 갈아치울 수 없어. 그리고 백성을 더더욱 갈아 치울 순 없다! 그러므로 백성의 소리가 하늘의 소리요, 백성의 마음이 하늘의 마음인거예요. 잘못된 지도자 한 명을 바꾸실래요, 백성을 바꾸실래요? 너무나 당연한 거잖아요? 그걸 이야기했다니까, 맹자가. 그러니 절대 군주에 속한 사람들은 맹자가 굉장히 괘씸한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역사상으로 보면 절대군주에게 맹자는 절대로 인기 있는 인물이 아니었어요. 나중에 송나라 때 가서 주희가 겨우 살려내 가지고 역사적 지위가 올라갔지, 그 전에는 <맹자>는 거의 금서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맹자는 백성이 귀하고 오히려 군주가 가볍다는 민본주의적 사상을 펼친 사람이에요.
근대서양의 인성론
이번에는 루소로 갑니다. 루소 때에도 인성론이 나와요. 당시 루소만 인성론을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로크, 홉스, 루소 등이 인성론을 이야기하지요. 이 세 세람의 공통점이 뭘까요? 사회계약론자라는 거예요. 사회계약론이 뭔가 하면, 옛날에는 신이 임금을 임명하는 거죠? 중세 때는 신이 임금을 세워서 쓰는 거예요. 그러면 나라의 땅은 누구 거지요? 임금의 거예요. 왕의 거예요. 그러니까 신, 왕, 그 다음 백성이에요. 그런데 근대 사회로 넘어오면서 왕이 모든 걸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들이 등장하거든요. 부르주아들은 자기의 땅을 비롯해서 소유가 꽤 많잖아요? 그러니까 그 소유를 보장해야 하는 거죠. 그러면 각각의 자기 소유를 가지고 있는 시민들이 생겼어. 그렇다면 이 시민들에게 국가가 필요할까요? 필요하다는 거야. 왜 필요한가 하면, 시민들이 각자 각각의 욕망에 따라 살면 전쟁이 날지 몰라. 그래서 이 욕망을 조절하기 위해서 이 시민들의 각각의 힘보다 더 강한 힘이 필요하다고 약속을 한 거야. 그렇게 해서 자기의 권리와 힘을 양도하는 계약을 맺은 것으로 근대 국가를 설명하는 거예요. 실제로 왕하고 시민하고 만나서 서로 계약서에 사인하고 그런 적은 없어요. 내 권리를 이만큼 드립니다, 사인 한 적은 없어. 그런 점에서 사회계약론은 일종의 가설이죠, 가설이긴 한데, 이것 또한 재미난 가설이에요. 가령 국민의 상태가 아주 엉망이야. 그러면 강력한 왕이 필요할까요, 부드러운 왕이 필요할까요? 강력한 왕이 필요하죠? 홉스(Thomas Hobbes, 1588~1679)가 그런 사람이야. 홉스는 그냥 국민을 그대로 내 버려두면 국민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서로 물고 뜯는 늑대 같은 사이가 될 거다. 그러므로 이 늑대와 같은 인간들을 컨트롤하려면 어마어마한 괴물이 필요하다, 그래서 ‘리바이어던’, 레비아탄이라고도 하죠? 괴물이 있어야 한다, 군주를 그 괴물에 비유한 거예요. 절대적 권력을 가진 괴물과 같은 군주. 절대적 권력을 갖는 거죠. 홉스가 상상하는 백성은 악한 존재들이예요. 그러니까 이걸 콘트롤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군주가 필요하다, 라고 하는 절대 군주론을 기초로 한 주장을 편 거예요. 홉스가 쓴 책의 제목도 <리바이어던>이에요.
이보다 살짝 유화된 사람이 로크(John Locke, 1632~1704)예요. 이 양반은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인간은 ‘빈 서판[타블라 라사]’과 같다고 봤어요. 무엇을 그리느냐에 따라서 인간은 변한다는 거지요. 그런 의미에서 백지상태인 인간에게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는 군주가 필요하다, 그 인간들을 잘 화합시키는. 계약을 할 때 이러는 거야. 우리를 잘 다스려 주세요, 계약을 맺었네? 그런데 군주가 그 계약을 어겨, 그럼 어떻게 되는 거죠? 계약은 파기되어야죠? 그러므로 로크에게 와서 일종의 혁명권, 저항권 이런 것을 사회계약의 부대조건으로 넣어요. 그래서 이 계약이 잘못되었을 경우에 군주에 대해서 뒤집어엎을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본 거예요.
한편 가장 급진적인 루소는 어떠했을까요? 루소가 보기에는 국가 자체가 악이에요. 군주와 권력이 악인 거예요. 이런 관점인데 군주와 권력이 지배하는 세계가 되면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안되겠죠? 그런데 당시에는 군주제가 보편적인 제도였었어요. 그러니까 뭐라고 얘기하는가 하면, 군주는 있다, 그러나 군주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휘두르는 사람이 아니라, 국민들의 일반 의지, 국민들의 선한 의지를 대행하는 자일뿐이다. 그가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국민들의 일반 의지를 대행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소유권 비판, 주권재민
이러한 입장은 근본적으로 루소가 가지고 있는 문명에 대한 근본적 회의와 관련이 있어요. 루소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민주주의가 역사에서 실제로 실현되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루소는 어찌 보면 민주주의가 과연 완벽하게 실현될 것인가에 대해서 회의했던 사람이에요. 왠고 하니, 인간이 사회를 이루면서, 인간이 소유를 갖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타락했다고 보았기 때문이지요. 루소는 기본적으로 야만 사회로 돌아가기를 원했어요. 야만이라고 표현하지만, 본래의 원시 본연의 사회로 돌아가고 싶었던 사람이지요. 그때는 인간에게는 선도 악도 없는 거예요. 악의 개념도 없으므로 선의 개념도 없지요. 그래서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는 이런 구절도 있어요. “미개인은 선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악하지 않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정념이 평정을 유지하고 악덕을 모르기 때문이다. 자연 상태에서는 누구나 속박에서부터 자유로우며, 강자의 법칙은 무용지물이 된다.” 강자의 법칙은 무슨 법칙이냐 하면 소유의 법칙입니다.
동양사상가로 치자면 그런 의미에서 루소는 맹자보다는 맹자와 논쟁을 벌였던 고자에 가깝지요. 자연 그 상태. 선도 악도 모르는 사회, 완전히 순진무구한 사회. 그것만이 선이라고 할 수 있다면 선인 거죠. 그러나 선이라는 개념도 악이라는 개념도 없는 사회, 이것이 가장 아름다운 상태라고 본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언제부터 선과 악을 구분하게 되었느냐? 인간의 본성 때문이냐? 아니라는 거예요. 소유 때문이라는 겁니다. 인간은 본래 소유가 없었어요.
로크 얘기 잠깐 합시다. 로크에게 있어서 원래 자연은 아무의 것도, 누구의 것도 아니에요. 아무의 것도 아니지만 인간의 노동을 들여. 그래서 사과나무가 있는데 사과가 열렸어. 그러면 내 노동을 들여서 그 사과를 따. 그러면 이건 내 노동을 들였기 때문에 내 것이 되는 거야. 이게 로크의 소유권이예요. 내 노동, 내 힘이 들어가서 만들어진 건 내 거예요. 그럼 부르주아지는, 시민은 자기의 노동에 의해서 뭔가 얻었기 때문에 내 것,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땅에 말뚝을 박았어. 그러면 자기 노동에 의해서 땅에 말뚝을 박은 거죠? 그러면 그 땅은 땅 주인 거. 이렇게 되는 거야.
그런데 문제는 그 땅에서 어떤 사람이 농사를 지었어. 그래서 거기서 아름다운, 맛있는 열매가 맺어졌어. 그럼 그건 누구 거? 원래 농사 지어가지고 노력을 해서 열매를 맺었으니까 열매 맺도록 노력한 사람 거가 되어야 하잖아? 그런데 이제는 어떻게 되요? 한 번 땅의 주인이 정해지면 거기다 별의 별 짓을 다 해도 땅 주인의 것이 되죠.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루소가 주목한 지점이 바로 그거예요. 본래 로크의 생각대로 한다면, 거기서 만약에 땅에 바리케이트 쳐놓고 노력한 사람이 뭘 얻었다, 그러면 그 사람 거 아니냐, 그런데 그렇게 하면 소유권이 생겨요, 안 생겨요? 안 생기죠? 그래서 그렇게 울타리 쳐 놓은 모든 것은 땅 주인 거! 라고 정해진 게 법이고, 그것이 선한 것이라고 말하는 게 윤리이고, 그런 세상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하는 게 예술이고, 그것이 정당하고 이성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게 철학이라는 거예요. 본래 모든 사람의 것이어야 하는데, 한 번 울타리 쳐 놓은 것으로 영원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게 하는 그것! 그건 사기다 이거예요. 루소는 차라리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칩니다. 소유도 지배도 없는 자연상태야 말로 루소가 간절히 원했던 사회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근대의 소유권은 루소에 와서 무너져요. 루소는 끝까지 가잖아요. 그러면 루소는 그 누구의 소유가 영원히 보장될 수 없는 그런 세상을 주장해요. 소유가 없으므로 선함도 악함도 없고, 선함과 악함이 없으므로 그걸 제재할 법률도 국가도 필요 없는 사회, 이게 어찌 보면 루소가 차마 이야기는 못 했으나 상상하고 추구했던 사회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그래도 현실에서 나라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그 권력이 왕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국민으로부터 와야 한다는 주권재민의 사상을 펼쳤던 것이 루소지요.
지금까지 우리는 맹자와 루소의 인성론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맹자는 모든 사람에게는 선한 마음이 있다는 전제하에, 그러한 선한 마음을 잘 키워서 욕망에 따르는 삶이 아니라 양심에 따르는 삶을 살라고 이야기하네요. 그리고 정치의 근본을 하늘에 두고, 민심을 귀중히 여기라고 충고합니다. “백성과 국가와 군주 가운데 백성이 가장 존귀하고 군주가 가장 낮다.”는 민귀군경설(民貴君輕說)은 당대에 많은 군주들에게 무서운 충고가 아닐 수 없었을 겁니다. 한편 루소는 경우는 근대문명이 만들어놓은 학문과 문학, 정치와 제도 등이 인간을 오히려 선과 악으로 나눈다고 주장하면서, 본래 자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자유로운 사회가 될 것이라 이야기합니다. 설령 권력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철저히 인민에게 주권이 있고, 정부는 이를 집행할 따름이라는 ‘주권재민(主權在民)’을 주장하지요. 군주보다는 백성이 귀하다는 맹자의 사상과, 주권은 인민에게 있고 정부는 이에 대한 집행기관에 불과하다는 루소의 사상은 2천년의 격차를 넘어 우리 사회에 울림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금 자유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이야기하는 자유민주주의는 두 가지를 강조합니다. 소유의 자유와 시장의 자유. 소유의 자유와 시장의 자유가 모든 국민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면 좋겠지만, 오히려 가진 자의 소유만을 정당화하고 국민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문제는 달라지겠지요. 분배 없는 소유는 결국 국민간의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국민복지를 축소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국민의 피폐한 삶을 기초로 오래가는 사회는 없습니다. 착한 국민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정치와 제도개혁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에 맹자나 루소가 우리 사회에 부활한다면 무슨 이야기를 할까요? 민본주의와 주권재민은 찾을 수 없고, 권력자의 입맛에 놀아나는 사회를 보면서 개탄하지 않겠습니까? 삶이 팍팍해지고 있습니다. 맹자와 루소가 그리워지는 오늘입니다. 건강하십시오. 오늘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