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논어(論語)』을 중심으로
개 같은 공부
“나는 어릴 적부터 성인의 가르침을 배웠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공자를 존경하지만 공자의 어디가 존경할 만한 곳인지 알지 못한다. 이는 난쟁이가 광대놀음을 구경하며 다른 사람들의 잘한다는 소리에 따라 함께 맞추는 장단일 뿐이다. 나이 오십 이전의 나는 한 마리 개에 불과하였다. 앞에 있는 개가 자기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같이 따라서 짖었던 것이다. 만약 누군가 내가 짖은 까닭을 물어온다면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쑥스럽게 웃을 수밖에 없다.”
명나라 말엽에 불꽃처럼 살아간 중국 사상가 탁오(卓吾) 이지(李贄)가 쓴 대표적인 책 『분서(焚書)』에 나오는 말이에요. 공부를 열심히 했지만 왜 공부를 하는지 모르는 채, 그저 남들이 하니까 따라 했다고 고백하네요. 오늘날 공부하는 대부분의 학생들의 고백 같지 않나요?
이지는 그러한 자신을 일컬어 ‘개’라고 말합니다. 자기 자신을 개라고 비유할 수 있는 것은, 이지의 깨달음이 얼마나 절실했는지를 반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지요. 동네 개 한 마리가 짖으면 동시에 짖는 개들처럼, 남들이 하니까 그저 따라 하는 공부처럼 ‘개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하는 것 같지 않나요? 그러다가 왜 그렇게 공부를 하냐고 물으면, 막상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해 입을 다물고 마는 것까지 말이에요.
이렇게 치열한 자기비판 이후에 쓴 책이 『분서(焚書)』이니, 그 책의 불온성을 익히 짐작할 수 있겠지요. 책 제목도 ‘태워야 할 책’이잖아요. 오늘날의 용어로 표현하면 ‘불온서적’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하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서문에 이렇게 써놓았어요.
“(……) 또 하나는 『분서(焚書)』이다. 주로 친구들에게 답장한 편지를 모은 것으로, 거기에서 논한 내용이 근래 학자들의 고황에 깊숙이 파고들어 그들의 고질병을 까발리는 것이 많기 때문에, 그들은 반드시 나를 죽이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태우려는 것이다. 하나도 남기지 않고 태워버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이지는 결국 당대의 유학자들의 시기를 받아 이단의 무리로 탄핵을 받고 감옥으로 잡혀 들어가요. 그리고 76세의 나이에 감옥에서 자결함으로 비참하게 생애를 마감하지요. 그런 그인데도, 우리는 그가 행복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남들이 모르는 공부를 왜 하는지 깨달았으니까 말이지요. 이번 인문학 10계명의 네 번째 주제는 ‘공부하라’에요. 실용적 관점을 벗어나 인문학적인 관점에서 공부에 대하여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 보려구요.
우리나라 평균 독서량
온라인 리서치 전문 기업 ‘두잇서베이’(www.dooit.co.kr)가 2012년 ‘독서의 해’를 맞아 중학생 이상을 대상으로 자체 기획한 ‘우리나라 국민 독서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어요.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3.6%가 지난해 ‘한 달 평균 1권 이상 책을 읽었다’고 답했으며, 나머지 47.5%는 2달에 1권을 채 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한 권도 읽지 않은 응답자도 2%인 것으로 나타났어요. 이 같은 결과는 2008년 OECD 국가 중 독서량에서 최하위권을 차지했던 결과와 다르지 않지요.
그리고 책에 대한 편식도 심해서 소설이나 수필 등이 주를 이루고 철학이나 이론적인 서적들은 거의 읽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어요. 물론 ‘독서=공부’라는 등식은 성립되지 않지만, 책을 통해서 공부의 많은 부분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을 감안해볼 때 좀 창피한 구석이 있지요. 과외로, 2008년 OECD 국가 중 한국이 1위를 차지한 것도 꽤 많아요. 조금만 열거해보면, 읽기 능력 1위, 인터넷 보급률과 이용률은 1위, 청소년 흡연과 탈선율 세계 1위, 어린이 사망률 1위, 사교육비 지출액 1위, 수업일수 1위, 학급당 학생수 1위, 이혼증가율 세계 1위, 저출산과 고령화 진행률 세계 1위, 산재사망률 1위, 한국인 업무 과도 1위, 주당 근무시간 1위, 한국 저임금 노동자 비율 1위, 스타벅스의 커피값 세계 1위, 자살률이 세계 1위, 1인당 세부담 증가속도 1위, 에너지 소비 증가율이 1위, 온실가스 배출량 증가율 1위……. 오 마이 갓! 1위 할수록 창피한 것들이 꽤 되네요. 참 살기 힘든 나라에 살고 있네요.
이렇게 살기 힘든 나라에서 가장 힘들게 공부하고 있는 학생에게 공부하라고 말하면 그건 축복이 아니라 저주에 가깝지요. 특히 자신의 성장과 성숙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경쟁과 입시를 위한 공부의 경우에는 더욱더 스트레스가 심할 테니 말이에요. 공부하라 말하기도 참 힘든 세상이에요. 그래도 ‘공부하라’라는 것이 인문학의 계명이 될 수 있다면, 그건 어떤 측면에서 그런 걸까요? 잠시 과거로 가보자구요.
공부하는 자, 공자(孔子)
동아시아에서 공부하면 떠오르는 사람은 바로 공자(孔子:BC551-BC479)입니다. 공자는 춘추시대 노나라에서 무당(?)인 어머니 안징재와 하급무사 출신인 숙량홀 사이에서 야합하여 태어났어요. 어릴 적 이름은 짱구[구(丘)]. 그나마 아비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힘겹게 성장한 공자가 감히 꿈꿨던 것은 주나라처럼 예의가 넘치는 나라였지요. 하지만 주나라가 서서히 몰락하면서 천 개가 넘는 제후국들이 서로 전쟁을 치르던 무력의 시기에, 무치(武治)가 아니라 문치(文治), 힘이 아니라 도덕으로 중국의 통일을 도모하려 하려 했던 공자의 사상은 당대의 권력자들의 입맛에는 맞지 않았어요. 공자의 사상은 이상적이지만 현실적이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지요. 소위 정치계의 왕따인 셈이지요. 노나라에서 대사구(지금으로 치면 법무부장관)라는 높은 관직에도 오르지만 그나마도 잠깐이었어요. 노나라에서 모함에 쫓겨나 50대 후반과 60대의 대부분을 떠돌이 정치가로 지내지만, 그 어느 나라에도 그를 등용하지는 않았지요. 공자는 ‘상갓집 개’처럼 12년이나 떠돌다가 말년에 겨우 고향인 노나라도 돌아왔지요. 그때의 나이 68세. 정계에서 활동하기에는 너무 늙은 나이였지요. 그래서 고향인 곡부에서 제자 양성에 힘쓰다 5년 후 73세에 세상을 떠나게 돼요.
만약에 말입니다. 공자가 공부와 제자 양육에 힘쓰는 스승이 아니라, 제나라의 관중처럼 위대한 정치가가 되었다면, 오늘날에 공자가 있을 수 있었을까요? 공자의 정치적 실패는 공자 자신에게는 불행이겠지만, 후대의 많은 사상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는 점에서 축복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의 생애는 공부로 시작해서 공부로 끝났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공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 되었지요. 그래서 나는 공자(孔子)를 공부(工夫)의 공(工) 자를 따서 공자(工子)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예요.
즐거운 공부
이 공부의 달인, 공자에게 과연 공부란 무엇일까요? 그의 이야기가 가득 담긴 『논어(論語)』의 첫머리를 이렇게 진술합니다.
“배우고 그것을 때맞춰 실천하면 기쁘지 않겠는가.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온다면 즐겁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화나지 않으면 군자가 아니겠는가.” - 「학이」 1
어떠한 경전이든 그 처음에 그 책의 핵심사상이 대부분 나타나기 마련이지요. 저는 『논어』라는 거대한 책을 압축적으로 요약한다면, 위의 세 문장이면 족하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처음 문장의 핵심은 ‘즐거운 공부’입니다. 배우고[學], 익히는[習] 것의 즐거움을 잊고 사는 세대에게 공자는 배움의 본질을 이야기해주네요. 공부는 즐거운 것이라고, 만약에 배우면서 즐겁지 않다면 그것은 진짜 공부가 아니라고 말이에요. 무엇이 공자에게 배움을 즐거워하게 했을까요? 공자에게 공부는 바로 그가 추구하는 삶 자체였기 때문이겠지요.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 공부, 삶과는 유리된 공부, 그저 하는 공부, 암기식 공부와 공자의 공부는 아무런 관련이 없지요. 후대의 양명학자 이지에게 공자의 학문이 ‘개 같이’ 느껴졌던 이유는, 그가 배웠던 공자가 당대의 삶과는 관련 없는, 그저 관료가 되기 위한, 경전암기식 공부였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마치 예수의 절실한 삶의 공부가 기독교로 정착되면서는 경전화되어 그 생동감을 상실했듯이, 공자의 절절한 삶의 공부도 국학(유학)으로 정착되면서 형해화되었겠지요.
두 번째 문장에서 나는 ‘우정의 공부’를 상상해봅니다. 공자에게 공부가 삶이었듯이, 삶을 살아가는 데에는 반드시 친구가 필요하기 마련이에요. 뜻을 같이 할 수 있는 동지라고 해도 좋겠네요. 그래서 공부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하는 거예요. 벗이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있나요? 그 벗이 자식이 되었든, 부모가 되었든, 스승이 되었든, 제자가 되었든 우리는 항상 벗과 함께 삶을 살아가야 하지요. 인간(人間)이라는 말 자체가 관계론적인 개념이니까요.
세 번째 문장에서 나는 ‘성찰의 공부’를 생각하게 돼요. 자신의 가슴을 뛰게 하는 공부, 자신의 삶을 반성하게 하는 공부, 자신을 나아가게 하는 공부가 아니라면 공부는 아무런 소용이 없지요. 그리고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은 나의 외부의 반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내면의 조용한 소리에 귀기울임에 있다고 공자는 판단했어요. ‘화가 남’은 근본적으로 밖을 의식하는 것이니까요.
공부는 자신에게서 출발하여 친구에게로 확산되고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전진적 순환과정을 갖게 돼요. 공자가 수신(修身)을 그토록 강조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지요. 『대학(大學)』의 8조목의 핵심 또한 수신(修身)에 있는 것이고요.
사람을 알고 사람을 사랑하는 일
그 공부의 순환과정을 통해 공자는 성장했던 것이고, 공부가 완성되어 갔지요. 그러면 공부 과정에서 공자는 무엇을 깨달았을까요? 공자의 제자 중에서 번지(樊遲)라는 사람이 있어요. 이 제자는 공자의 마부 노릇을 자주 했는데, 공자의 겉에 있으나 학문의 깊이는 깊지 않았나 봐요. 그래서 공자에게도 간단한 질문을 했고, 공자도 아주 쉽게 그에게 답을 해주었지요. 덕분에 우리는 공자의 사상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구요.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번지가 물었다, “‘사람다움’이란 뭡니까?”
공자기 대답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번지가 또 물었다. “그럼 앎이란 뭡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사람을 아는 것이다.”- 「안연」 22
공자가 이야기하는 ‘사람다운 공부’가 무엇인지 느낄 수 있는 대목이지요. “사람을 알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공부의 시작이며 끝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람’ 대신에 ‘남’을 넣으면 더 의미가 정확해질라나요? 저는 공자의 학문을 ‘사랑의 인문학’이라고 표현하고 싶네요. 공자 말년에 공자의 제자들이 공자에게 꿈이 무엇이냐고 물었어요. 그때 공자가 이렇게 대답했지요.
“내 꿈은 늙은이를 편케 하고, 벗에게 믿음을 주고, 어린이를 품는 것이다.” -「공야장」 25
어때요? 참 소박하다고 생각하나요? 나는 오히려 참 위대하다고 생각해요. 공자의 공부는 자신으로부터 출발했지만, 그 실질적 내용에 있어서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한 마디도 없잖아요. 흔히 공자의 공부를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고 말하는데, 이를 ‘자신만을 위한 학문’이라고 번역해서는 결코 안 되지요. ‘위기지학’은 차라리 ‘남의 이목 따위는 의식하지 않는 학문’이라고 풀어야 더 정확할 거라고 나는 생각해요. 자신에게 머무르는 학문, 자신만을 위한 학문이 아니라, 자신의 성찰을 기초로 하여, 가족으로, 친구로, 국가로, 전 세계로 확장되는 공부가 바로 공자의 공부지요.
호모 쿵푸스
공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많은 학자 중에 고미숙이라는 고전학자가 있어요. 그가 쓴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는 우리에게 공부에 대한 새로운 안목을 갖게 해 주는데요. 내가 공감이 가서 밑줄 그은 몇 대목을 소개할까 해요.
에피쿠로스는 말했다. “행복해지기 위해 어린아이에게 더 기다리라고, 노인에게 이미 지나갔다고, 노예나 매춘부에게 포기하라고 말해선 안 된다. 누구나 지금, 그 자리에서 함께 행복해야 한다.” 공부 또한 그러하다. 공부하면 이다음에 훌륭한 사람이 되고, 뭔가를 얻게 될 거라고 말해선 안 된다. 공부하는 그 순간, 공부와 공부 사이에 있다는 바로 그것이 공부의 목적이자 이유여야 한다. 고로 공부는 존재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누구나 지금, 그 자리에서 함께 행복해야 한다는 말이 공감가지 않나요? 공부 역시 마찬가지라고 말하지요. 공부하는 그 자리가 행복의 자리가 되어야 한다. “고로 공부는 존재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는 말에는 많이 고개를 끄덕이게 되지요. 그런데 왜 우리 사회는 이러한 행복한 공부가 사라지고 있는 걸까요? 저자의 의견을 좀 더 들어봐요.
“공교육이건 대안교육이건, 대학 안이건 바깥이건, 진정 공부의 대안을 마련하고 싶다면, 거죽을 폼나게 바꾸고 좀 더 그럴듯한 서비스 장치를 가동시키는 것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오히려 그러면 그럴수록, 학교가 쳐놓은 거짓말의 덫에 걸려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만다. 그렇게 빈번한 교육개혁에도 불구하고, ‘교실의 붕괴’, ‘사교육의 비대화’, ‘대학의 위기’ 등은 나날이 심화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따라서 이제는 ‘좀 더 양질의’, ‘좀 더 합리적인’ 것을 지향하는 어설픈 절충이나 미봉책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훨씬 더 나아가 학교식 공부의 기원이자 토대인 근대성 자체를 의심해야 한다.”
이 근대성을 넘어서는 탈근대적 모색을 위해서 고미숙은 이반 일리치의 탈학교적 입장을 취하면서 한편으로는 조선 후기 지성사에 새로운 장을 연 연암그룹의 코뮌 정신을 계승하지고 말해요. 그것의 핵심이 연령과 학벌과 전통의 제한이 없는 배움터의 마련이고, 그 배움터의 핵심방법론이 고전을 중심으로 한 독서지요. 왜 하필 고전일까요? 고미숙이 말하는 고전은 이런 거예요.
“탈근대적 모색에는 아주 다양한 길이 있다. 인터넷이나 첨단 테크놀로지를 활용하여 근대적 시스템으로부터 탈주하는 길도 있고, 전위예술의 힘을 빌려 근대적 습속을 전복하는 방식도 가능할 것이다. 고전 또한 그 가운데 하나이다. 고전이란 시대의 통념과 억압을 뚫고 삶과 사유의 눈부신 비전을 탐색한 전위적 텍스트를 말한다. 고전이 시대마다 서로 다른 의미망을 구성할 수 있는 건 바로 그 전위적 열정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전이야말로 진정, ‘미-래’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고미숙에 따르면, 고전이야말로 낡은 것이 아니라 전위적 열정을 담고 있는 폭발적인 책이지요.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작동하느냐에 따라 그것은 미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고전(古典)이 금전(今典)을 너머 래전(來典)으로 탈바꿈되는 것은 바로 우리 손에 달린 것이겠지요. 고미숙의 어법을 흉내 내보면, 고전으로 현재를 넘어서기! 미래를 선취하기! 쯤 되려나요?
천하를 품는 공부
고미숙은 탈학교적, 코뮌적 공부, 고전을 통해 미래를 선취하는 공부를 이야기하면서 그 모델로 연암 박지원을 중심으로 한 백탑파(연암그룹)를 예로 들었는데요. 그 속에는 박제가, 이덕무, 이서구, 홍대용, 백동수 등이 속해있어요. 그들은 같은 학당에서 공부한 동문수학자들도 아니고, 같은 당파에 속해 있었던 당파조직도 아니고, 같은 계층에 속해 있었던 양반그룹도 아니었지요. 어찌 보면 박지원을 제외한다면 모두가 중인 그룹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과거를 통해서 자신의 뜻을 펼칠 수는 없었던 불우한 지식인들의 공동체라 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들은 모두 불의한 세상에 공분을 품고, 자신의 할 일을 찾아 묵묵히 자신의 내공을 쌓기 위해 자율적으로 공부했던 우정의 공동체라 말할 수 있어요.
박희병 교수는 이렇게 세상에 뜻을 품고 살아가는 지식인들의 공부방법을 모아, 『선인들의 공부법』(창비)이라는 책을 냈는데요. 그 책에 이렇게 써놓았아요.
삶의 지혜와 문명의 비전은 천하의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다. 아니, 천하를 가슴에 품고 나아갈 때라야 그런 지혜와 비전이 가능하다. “사나이의 가슴속에는 늘 가을 매가 하늘을 치솟아 오르는 기상이 있어야 하며, 건곤을 작게 여기고 우주를 자신의 손바닥 안에 있는 것처럼 여겨야 옳다.” 배움이란 무릇 이런 것이다.
박희병 선생이 왜 책을 쓰게 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지요. 천하를 가슴에 품어야만 삶의 지혜와 문명의 비전에 만들어지고, 그것이 곧 배움이라는 말은 우리의 가슴을 우주만큼 크게 확장시키지 않나요? 더불어 우리와 우리의 아이들이 무엇을 위해 공부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것 같지 않나요? 서양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는 하늘을 보고 별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을 일컬어 ‘우주의 아이’라고 말했지요. 하늘을 보고 한숨 쉬는 사람, 땅만 바라보며 고개 숙이고 무거운 발걸음을 걷는 사람, 도서관이나 학원에서 인공조명에 책만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이 새삼 안타까워지지 않나요?
이 시대에 공부법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인문학적 공부법을 정리해보기로 해요. 우선, 우리의 인문학적 공부법은 우리의 공부법 자체를 검토하는 공부법이어야겠네요. 양명학자 이지가 말한 대로 ‘개 같은 공부법’은 아니었는지 점검해보자는 거지요. 그리고 ‘즐거운 공부법’을 찾아보는 거예요.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공부법, 친구와 우정을 나눌 수 있는 공부법,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나지 않는 공부법, 그래서 공부하는 그 순간이 바로 행복한 공부법, 궁극적으로 세상을 끌어안고 우주를 자신의 손바닥 안에 있는 것처럼 여길 수 있는 공부법을 말이에요.
그 공부법 찾기가 인터넷을 통한 것이든, 예술을 통한 것이든, 자연을 통한 것이든, 아니면 고전을 비롯한 책을 통한 것이든 상관없이 너와 나를, 더 나아가 온 천하를 끌어안을 수 있는 공부법을 찾아보자구요. 그게 바로 인문학 십계명에서 말하고픈 ‘공부하라’의 내용이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