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십계명 5 : 음미하라

소크라테스를 중심으로

by 김경윤

음미≠속도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는 밥 먹을 때 시간이 얼마나 걸리니?” 아이들이 답했지요. “10분? 15분?” 그러자 한 아이가 웃으며 말합니다. “먹는 데는 그리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아요. 한 5분이면 되지요. 나머지 시간은 놀아야 하니까요.” 헉! 그래서 나도 밥 먹는 시간을 재보았어요. 그랬더니, 10분이면 되더군요. 이렇게 삽니다, 우리가.

뉴욕 타임스에 따르면, 식사시간의 평균을 100분으로 할 때, 프랑스인은 135분, 미국, 캐나다, 멕시코인은 75분, 한국인은 30분 내외라고 합니다. 정말 모든 일을 빨리빨리 하는 우리 민족답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원래 이렇게 빨리 밥을 먹었을까요?

원래의 우리 식문화는 결코 빨리 밥을 먹을 수 없는 구조입니다. 서양처럼 간단히 빵과 우유로 식사하는 것도, 중국처럼 반찬을 밥 위에 올려놓고 긴 젓가락으로 몰아치듯 먹는 것도 아니에요. 밥과 국이 있고, 반찬도 여러 종류인데, 이 모두가 각기 다른 그릇에 담겨 있지요. 음식을 먹는 도구만 하더라도 숟가락과 젓가락 두 종류가 있어, 번갈아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음미하며 식사를 하기에 적절한 식문화라는 거지요.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천천히 밥을 먹는 것을 포기한 것 같습니다. 근대화도 몰아치듯 해치웠듯이, 음식도 몰아치듯 먹고 있어요. 이정우의 표현을 변용해보자면, ‘압축 근대화’에 어울리는 ‘압축 식사법’이지요.

식습관만 바뀐 것이 아니에요. 우리나라처럼 노동시간뿐만 아니라 노동강도가 센 나라는 거의 없지요. 미국에 이민 가서 나름대로 자리를 잡고 성공한 사람들의 성공사례를 보면 다른 나라 사람들은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쉬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공휴일도 없이 일하고, 늦게까지 일하며, 쉬지 않고 일해서 성공한 거래요. 이렇게 바쁘게 살다 보니, 음식 맛을 제대로 볼 시간도 없고, 삶을 성찰할 시간도 없게 되었지요.

삶을 음미하라


이번의 주제가 바로 ‘음미하라’예요. ‘음미(吟味)’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두 가지 뜻이 있더군요. 하나가 (1) 사물의 내용이나 속뜻을 깊이 새기고 감상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가 (2) 음식이나 그 맛과 향을 즐기며 맛보는 것이더군요. 하나가 내적 성찰과 관련된 것이고, 또 하나는 오감을 이용하는 것이지만, 모두가 시간을 들여야지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네요. 그런 점에서 이번 주제는 두 번째 계명인 ‘방황하라’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어요. 우리는 ‘방황하라’에서 주로 속도, 특히 느림에 대해서 살펴보았잖아요. 이와의 관련성을 생각하면서 좀 더 들어가 볼까요? 이번에 우리가 주로 다룰 인물은 소크라테스라는 사람이에요. 소크라테스가 한 말 중에서 “음미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는 말이 유명하거든요. 그러면 먼저 이 유명한 말이 들어간 구절을 한 번 감상해 보죠.

“그렇다면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오, 소크라테스여! 그대가 침묵하며 조용히 지내면 추방당해서도 살 수 있지 않겠소?’ 하고요. 이 점에 대해서 그대들을 설득하기가 무척 어렵군요. 제가 여러분께 그러한 처신은 곧 신을 믿지 않는 것이며 따라서 저는 침묵을 지킬 수 없다고 말하면, 여러분은 제가 딴전을 부린다고 생각하고 제 말을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제가 날마다 덕, 또는 저 스스로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 캐묻는 것들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 사람에게는 가장 좋은 것이며 음미하지 않는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대들은 더더욱 제 말을 믿지 않으시겠지요.”


이 구절은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이 쓴 『소크라테스의 변론』에 나오는 말인데요. 어떤 번역가들은 ‘음미하지 않는 삶’ 대신에 ‘캐묻지 않는 사람’이라고 번역하기도 했어요. 어느 쪽으로 번역이 되었든 삶에 대해 깊이 있는 질문과 반성을 통해 그 의미를 탐색하는 일과 깊은 관련이 있지요. 그러면 소크라테스는 허구한 날 사람들을 만나면 침묵하지 않고 꼬치꼬치 캐묻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일까요? 만약에 그게 사실이라면 왜 그랬을까요?


하루 종일 서 있는 자

소크라테스는 원래 남의 일에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는 오히려 조용히 명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지요. 그가 얼마나 명상을 깊이 하는 사람이었는지는 『향연』이라는 작품을 보면 잘 나타나 있지요. ‘향연’의 헬라스어는 심포지온(Symposion)인데 ‘함께 마신다’는 뜻이에요. 이 작품은 플라톤이 쓴 것으로 BC 416년에 아가톤이 연극대회에서 자신의 비극으로 우승하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저녁에 친구들을 불러 축하연을 베풀었는데,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하여 쓰인 작품이에요. 작품 속에서 향연 자리에 뒤늦게 등장한 소크라테스의 추종자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를 이렇게 묘사해요.

“언젠가 이른 아침에 이 분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어요. 이 분은 한 자리에서 그냥 서서 생각하고 있었죠. 해결이 되지 않았는지 그 자리를 뜨지 않고 계속해서 생각하시더군요. 정오가 되었을 때에도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병사들도 그것을 알고 이상히 여기며, 소크라테스가 새벽부터 줄곧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서 있다고들 말하였죠. 마침내 저녁이 되자, 이오니아 출신 병사 몇 명이 식사를 마치고 – 때는 여름이었으므로 – 이불을 밖으로 가지고 나와 한데서 자기로 했습니다. 이 분이 밤새 서 있는지 가끔 쳐다보려고 해서였지요. 이 분은 새벽이 찾아들고 또 해가 떠오를 때까지 서 있었어요. 그리고는 해를 향하여 기도를 드린 후에 어디론가 가 버렸습니다.”


정말 대단하지 않나요? 이른 아침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최소한 20시간 이상은 한 자리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고 서서 명상에 잠길 수 있는 사람이 도대체 얼마나 될까요? 무엇을 명상했는지는, 주제에 맞춰 무엇을 음미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얼마나 깊이 생각에 잠겼는지는 익히 짐작이 가능하네요.

소크라테스는 남에 대해 묻기 전에 우선 자신에 대해 캐물었던 거예요. 나는 누구인지, 나는 얼마나 아는지,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진리인지, 캐묻고 또 캐물었지요.

그러다가 문득 소크라테스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그는 이 무지를 깨우치고자 많은 사람과 만나 묻고 또 물었지요. 그런데 웬걸? 소크라테스가 만나는 사람마다 사실은 소크라테스가 모르는 것처럼 아무것도 모르면서, 자신은 무엇인가를 확실히 알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그들에게 끝없는 질문을 하고 그들이 본래 무지했다는 것을 깨닫게 했지요. 물론 그에 대한 역효과로 소크라테스에게 자신의 무지가 드러난 사람들은 소크라테스를 싫어하게 되었구요. (사실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노년에 재판을 받고 사형을 당하게 되었던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예요.)

이후로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소크라테스다”라는 신탁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지요. “나는 내가 무지하다는 것을 아는데, 남들은 그들이 무지하다는 것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나는 그들보다 지혜롭다.”는 걸 말이에요. 그 후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의 무지를 깨우쳐 주는 것을 신이 자신에게 내린 명령이라고 생각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캐물으며, 삶을 음미할 수 있도록 노력했어요.


소크라테스 카페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삶에 영향을 받은 사람은 비판 플라톤뿐만이 아니에요. 서양철학자 화이트헤드는 “서양철학은 모두 플라톤 철학의 각주(脚註)에 불과하다.”라고 말할 정도로 소크라테스에서 플라톤으로 이어지는 철학의 흐름을 높이 평가했지요.

우리와 동시대인 중에서도 소크라테스에게 감동을 받아 자신의 삶을 완전히 바꾼 사람이 있어요. 그는 크리스토퍼 필립스(Christopher Phillips)라는 사람인데요. 그는 한때 잘 나가는 직장인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지방 출장을 가던 중에 문득 대학 시절 철학 시간에 배웠던 소크라테스의 한 구절이 떠올랐지요. 우리의 주제이기도 한 “음미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는 구절이 말이에요. 그러자 불현듯 자신이 살고 있는 것이 과연 맞는 삶인가 의심하게 되었고, 그 의심은 그의 삶을 180도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지요.

그는 이후로 소크라테스 카페라는 모임을 제안하며 전국을 돌아다녔고, 만나는 사람이 어떠하든 그들과 소크라테스처럼 질문과 답을 하는 소크라테스식 대화법으로 강의를 하기 시작했어요. 그러한 크리스토퍼의 삶은 철학을 대학이라는 상아탑에 가두는 기존의 흐름과는 다른 흐름을 만들어내었지요. 그는 소크라테스 카페라고 부르는 철학적 대화의 장을 카페나 식당에서, 탁아소, 간호학교, 양로원, 요양원, 심지어는 감옥에서도 열었어요. 그의 강의는 일방적이지 않아요. 오히려 그는 대화를 나누는 상대방에게서 더 많은 배움을 얻기도 하지요. 그는 소크라테스의 사상뿐만 아니라 태도도 실천하고 있지요. 그는 자신의 책 『소크라테스 카페』에서 아래와 같은 소크라테스의 진술을 옮겨놓았어요.


“내가 숨을 쉬는 한, 나다닐 힘이 있는 한, 나는 철학하기를 그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길을 가다가 누구를 만나든지 다가가 열심히 질문을 퍼붓는 일을 그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나의 친구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하며, 지성과 권세 면에서 아무도 감히 견주지 못하는 도시, 아테네의 시민들이여. 어떻게 하면 돈을 조금이라도 더 모을까,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이름을 더 날릴까 궁리하고 마음을 쓰는 자신이 부끄럽지 않을까요? 그러면서도 진리와 지혜, 영혼의 승화를 위해서는 조금도 마음 쓰지 않고 염려하지 않는 자신이 수치스럽지 않습니까?”


그 또한 이전의 자신의 삶을 수치스럽게 여기면서 소크라테스의 음미하는 삶, 즉 진리와 지혜와 영혼의 승화를 위해 마음 쓰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지요.

음미하는 삶

비단 서양인만이 아니에요. 한국의 철학자 중에도 이왕주라는 사람이 있는데요. 그 역시 소크라테스의 후예임을, 음미하는 삶이야말로 가치 있는 삶임을 믿고 따르는 사람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네요. 그의 책 『쾌락의 옹호』에서 그는 ‘음미하며 살아야한다’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고백하고 있어요.


내 삶의 원칙은 음미하며 사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소크라테스에게서 배웠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법정에서 행한 최후의 변론에서 "음미되지 않는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는 말을 인류에게 유언처럼 남겼다. 어떤 대화에서나 대체로 주로 듣는 자, 묻는 자로 머물렀던 소크라테스가 이처럼 무엇인가를 단호한 어조로 주장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음미되지 않는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 무슨 말인가. 일을 이룸의 기쁨, 성장과 번영의 즐거움뿐 아니라 좌절의 슬픔, 쇠퇴와 영락의 괴로움들도 그 마땅한 폭과 깊이에서 느껴져야 한다는 뜻이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산다'는 것은 우리 일상의 모든 켜와 결, 굴곡과 주름들을 깨어있는 정신으로 훑어내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것을 그는 '음미한다'는 멋진 메타포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음미한다’는 말만큼 폭넓은 자장을 가지고 있는 단어도 드물죠. 인생의 의미를 음미하는 것 말고도 말 그대로 맛을 제대로 음미하는 것의 소중함이 오늘날처럼 여실히 다가오는 때도 없다고 생각해요. 맛 이야기로 살짝 넘어가 볼까요.

맛을 음미하라


불가에 전해지는 이야기 한 대목을 들려드릴게요.


원율사(源律師)라는 이가 와서

대주(大珠)에게 물었다.

"화상께서도 도를 닦는데

공(功)을 들이십니까?"

대주가 말했다.

"그렇다. 공을 들인다."

"어떻게 공을 들이십니까?"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잔다."

"모두가 그렇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다.

그들은 밥을 먹을 때에도

백 가지 분별을 일으키고,

잠을 잘 때에도 숱한 망상을 일으킨다.

이것이 그들과 내가 다른 점이다."

이에 원율사가 입을 다물었다.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잔다”는 진술은 너무도 평범하여 깨달음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는 말이지만요. 대주 화상이 이야기하는 밥먹음과 잠잠은 전혀 다른 무게로 다가오지요. 일상사에서 분열과 망상을 일으키지 않고 온전히 먹고 자기가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밥먹을 때는 밥만 먹고, 잠잘 때는 잠만 자고, 공부할 때는 공부만 하고, 놀 때에는 놀기만 하는 경지는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경지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늘 먹어도 먹는 것 같지 않고, 자도 자는 것 같지 않고, 공부할 때도 딴생각, 놀 때도 딴 걱정을 하고 살지요. 일상사마저 이처럼 음미하기가 쉽지 않네요.

밥 먹는 도


요즘 제가 고양생협에서 『금강경』 강의를 하고 있는데요. 참고가 될까 해서 읽고 있는 책 중에서 한형조가 쓴 『붓다의 치명적 농담』을 읽고 있어요. 그런데 거기에서 위의 내용에 대한 아주 매력적인 해석을 읽었지요. 길지만 소개할게요.


속담에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는 말이 있습니다. 바쁜 다른 일이 있거나, 고민해야 할 일이 신경 쓰이거나, 선을 보는 자리거나, 상사나 어려운 분들과 함께 하는 자리에서 음식 맛을 느끼기 힘듭니다. 상념이 음식을 떠나 다른 곳을 헤매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교 경전인 <대학(大學)>에도 그런 경구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음식을 먹지만, 음식 맛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예컨대 가십에 열중하거나, 남을 비난하거나, 두고 온 일을 걱정하거나, 쓸데없는 논쟁에 마음을 빼앗기면 한 순간 이 자각의 끈은 어둠 속으로 홀연히 사라지고 맙니다. 그래서는 음식을 느낄 수 없고, 마음 또한 그에 따라 혼란하고 탁해집니다. 이렇게 상념이 몸을 가로막고 있어서는 소화가 잘 될 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나날이 먹는 음식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습니다. 이 분리를 넘어 음식맛과 조우할 때, 그때가 우리가 우리 자신과 만나는 순간입니다. 다이어트 또한 그 속에 있습니다. 이 자각과 유념의 끈을 붙들고 있으면, 몸은 자연스럽게 자신이 필요로 하는 이상으로 음식을 탐하지 않게 됩니다. 배가 고픈 것을 알게 되는 행복을 맛볼 수 있게 되고, 일주일 정도면 뱃살이 줄어들고 몸이 가벼워 자연스럽게 기지개를 켜거나, 권투 선수처럼 주먹을 슉슉 뻗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장담합니다.

음식 맛을 느낄 수 있으면 도 또한 멀지 않습니다. 불교가 노리는 최상승의 경지를 저는 이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음식의 도(食道)에 이르는 것을 방해하는 두 가지 장애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게 뭐 그리 대단하냐는 의심입니다. 이 의심을 제거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길을 나서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 말을 아니 믿어도 좋으니 앞의 선사의 말씀은 간곡히 들어주어야 합니다. “도는 밥 먹는 데 있다.”

두 번째 장애가 궁금하신가요? 그 부분은 여러분이 책을 사서 직접 읽어 보세요. 힌트만 살짝 드리자면 마음과 관련되어 있어요. (벌써 답을 찾으셨나요?^^)


삶의 정수를 빨아들이라

나는 ‘삶을 음미하라’는 명제를 볼 때마다 떠오르는 영화가 한 편 있어요. (아마 여러분도 저와 같은 영화를 떠올릴 거예요.) 로빈 윌리엄스가 키딩 선생의 역할을 맡아 열연한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지요. 여기서 키딩 선생은 마치 소크라테스와 같은 역할을 하지요.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선고받은 이유 중 하나가 “젊은이를 타락시킨 죄”인데요. 키딩 선생도 그와 유사한 죄목으로 학교를 떠나지요. 생각나세요. 그때 학생들이 책상에 올라가 “캡틴 오 마이 캡틴”이라고 외치는 장면이요.

그 외에도 어떤 장면이 떠오르나요? 아마도 “카르페 디엠, 현재를 즐겨라!(carpe diem, seize the day)”라고 복도에서 속삭이는 대목이 기억나나요? 아니면 그보다 더 시적인 문장인 "시간이 있을 때 장미 봉우리를 거두라.(Gather ye rosebud while ye may.)"라는 문장이 떠오르나요? 아니면 교훈적인 문장인 “교육의 목적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The purpose of education is to learn to think for yourself.)”라는 문장이 떠오르나요?

나는 이번 강의를 위해 이 영화를 한 번 더 보았는데요. 키딩 선생이 시를 가르치는 첫 시간에 서문을 찢으라고 말하면서, 아이들을 모아놓고, 시의 감상하는 목적은 시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일원이기 때문에 시를 쓰고 읽는 것이라는 말을 한 후에 낭송하는 휘트먼의 시가 인상적이었어요.

여러분도 함께 시를 음미해보시지요. 자, 갑니다.


“오, 나여! 오 생명이여! 수없이 던지는 이 의문!

믿음 없는 자들로 이어지는 도시

바보들로 넘쳐흐르는 도시

아름다움을 어디서 찾을까? 오, 나여, 오 생명이여!

대답은 한 가지 ; 네가 거기에 있다는 것

생명과 존재가 있다는 것

화려한 연극은 계속되고

너 또한 한 편의 시가 된다는 것”

O me. O life. Of the questions of these recurring,

Of the endless traind of the faithless,

Of cities filled with the foolish.

What good amid these O me, O life?

The answer, that you are here.

That life exists and identity.

That the powerful play goes on.

and you may contribute a verse.

이 시를 낭송하고 묻지요. “여러분의 시는 어떤 것이 될까?(What will be your verse?)” 여러분에게 똑같은 것을 물어도 될까요? 삶을 음미하고 그것이 시가 되게 하는 것, 그것이 영화의 소크라테스 키딩 선생님이 원했던 것 아닐까요?

키딩 선생님에게 매료된 학생들이 그 이후 키딩 선생님의 뒤를 이어 ‘죽은 시인의 사회’의 일원이 되지요. 밤중에 동굴에 몰래 도착한 학생들은 죽은 시인의 사회의 재결성을 선언하면서, 다음과 같은 헨리 D. 쏘로우의 문장을 낭송하지요. 나도 이 문장을 여러분에게 낭송해드리는 것으로 이번 주제 ‘음미하라’를 마감할까 해요.

“나는 자유롭게 살기 위해 숲으로 갔다. 깊이 파묻혀 삶의 정수를 빨아들이며 살고 싶었다. 삶이 아닌 것을 모두 떨치고 삶이 다했을 때 삶에 대해 후회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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