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십계명 6 : 성찰하라

장자의 『장자(莊子)』를 중심으로

by 김경윤

윤동주의 거울


아침마다 일어나 화장실에 들러 세수를 하고 거울을 봅니다. 거울 속에는 내가 있습니다. 한창 젊었을 때의 풋풋함은 사라지고, 이제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남자가 나를 보고 있습니다. 세월의 흐름이 고스란히 나에게 되비춰져 내가 나를 바라봅니다. 거울은 그런 것이지요. 나를 낱낱이 되비추어 나를 알게 합니다.

일제시대 시인 윤동주가 보았던 거울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시를 읽어봅니다.

영화 <동주>의 화면 위에 쓰인 '참회록'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어 있는 것은

어느 왕조(王朝)의 유물(遺物)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가.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 줄에 주리자.

-- 만 이십 사 년(滿二十四年) 일 개월(一個月)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든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懺悔錄)을 써야 한다.

--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든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어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참회록>이라는 시이지요. 이 시에 나타난 윤동주의 거울은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입니다. 그런데 그 거울에 비추어진 자신의 모습을 ‘욕되다’고 표현하네요. 참회를 해야 할 정도로 말이에요. 그의 참회행위는 그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온몸’으로 거울의 녹을 제거하는 것이지요. 그 행위는 부끄러움을 제거하는 행위이며, 자신의 살아가야 할 길을 밝히는 것이기에 자아성찰과 밀접한 관련이 있지요.


성찰, 되비춤


‘성찰(省察)’이란 말의 뜻은 “자신의 일을 반성하며 깊이 살피는 행위”를 뜻합니다. 그것은 ‘반성(反省)’과 같은 맥락의 것이지요. 반성이 “자기 언행에 대해 잘못이나 부족함이 없는지 돌이켜보는 행위”입니다. 영어 사전을 뒤져봤더니, self-examination, self-reflection, reflection, introspection 등이 나오더군요. 자아를 검사하고, 자아를 반성하고, 자신의 내면을 비추는 행위가 바로 성찰입니다. 그러니 ‘거울’의 이미지와 꽤나 잘 어울리는 단어지요. 거울이야말로 되(re)+비추는(flect) 도구이니까요. 그 역할을 내면에 적용하면 자신의 안쪽(intro)을 바라보는(spect) 행위가 되겠지요.

그러면 그러한 성찰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나는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자유는 안으로는 얽매임과 편견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고, 밖으로는 자기를 속박하는 사회적 관습이나 제도에서 해방되어, 결국에는 온전한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지요. 일찍이 전국시대에 중국의 사상가 장자(莊子)가 추구했던 경지가 바로 그러한 자유였습니다.


장자라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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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바야흐로 전국시대(戰國時代). 중국의 각 나라들은 중국 재패를 목표로 치열한 전쟁을 치르는 시기입니다. 그 시기에 정나라의 몽(蒙)에서 태어난 것이 장자예요. 이름은 주(周). 그의 경력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후대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열전’에 보면, 장자를 고향에서 ‘칠원의 관리’를 했다고 전해지죠. ‘칠원’을 정원이라고도 하고 사냥터라고도 하지만, 뭐가 되었든 장자는 낮은 직위를 가진 가난한 사람이었음에 틀림없어요. 한 나라의 사관을 지냈던 노자와는 대조적이라 할 수 있죠. 한편 그의 가난은 ‘자발적 가난’이었을 가능성이 높아요. 장자 ‘추수(秋水)’편에는 초나라 임금이 높은 벼슬을 주겠다며 장자를 초대하는데, 장자가 ‘신령한 죽은 거북’과 ‘진흙에 묻혀 사는 산 거북’을 비교하며, 자신은 진흙에 꼬리를 끌고 다닐지언정, 신령한 거북으로 대접받으며 죽은 듯이 살 수 없다고 말하며 초대를 고사하는 대목이 나오는데요. 장자의 반정치적 성향을 잘 알 수 있는 사례라 할 수 있죠.

일찌감치 정치와 거리를 두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의 글에는 당시 위정자를 비판하는 내용과 당시의 전통과 고정관념을 부수는 비유적 표현들이 많이 나와요. 그렇게 기존 세계를 허물어뜨린 장소 위에 새로운 상상력으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지요. 그리고 그렇게 세워진 『장자』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하네요.


가장 작은 것이 가장 큰 것


그러면 그 자유의 세계로 들어가 볼까요. 『장자』 내편(內篇)의 첫 편 제목이 ‘소요유(逍遙遊)’입니다. 풀어보면, ‘어슬렁거리며 놀아라’이지요. 이렇게 유머러스한 제목을 달고 있는 첫머리에 다음과 같이 황당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북해에 한 물고기 있는데 이름은 곤(鯤)이라 한다.

곤은 그 크기가 몇천 리인지 알 수 없다.

이것이 변하여 새가 되는데 이 이름을 붕(鵬)이라 한다.

붕의 등 넓이도 몇천 리인지 알 수 없다.

한번 노하여 날면 그 날개가 하늘에 구름을 드리운 것 같았다.

이 새는 바다가 움직이면 남명으로 이사를 간다.

남명이란 ‘천지(天池)’다.


장자의 권위자 버튼 와트슨(Burton Watson)은 이 대목에 이렇게 주를 달아놓았습니다. “곤은 물고기 알이다. 그러니까 장자는 역설로 시작된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작은 물고기가 또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물고기가 될 수 있다는 역설.” 거기에 나는 이렇게 덧붙일 수 있습니다. “아니다. 그건 약과다. 물고기 알이 물고기가 된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았지만 물고기가 새가 된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봤을 것이다. 그것은 아예 불가능한 것이니까!”

이 작은 곤이 붕이 되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장자가 하고 싶은 말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것은 혹시 전국시대를 살아가는 보잘것없는 존재[鯤]처럼 살아가는 민중에게 큰 꿈을 불러일으키고 싶었던 것 아닐까요? “남들이 보기에 우리가 비록 보잘것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여러분은 아주 크나큰 존재이다. 곤이 붕이 되듯이!” 장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사실 쓸모없는 존재가 더욱 쓸모 있는 존재로 탈바꿈하지요. 존재의 역전 드라마가 곧 장자에 이야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을 가두고 있는 사고의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야 해요. 자신을 가두는 존재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의 마음감옥부터 벗어나야지요.

주인의 마음감옥


어떻게 하면 그 마음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한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하지요. 조삼모사(朝三暮四) 이야기인데요. 잘 알고 계시지요?

신명을 수고롭게 하며 한쪽을 좋다고 하면

그것이 크게는 같다는 것[大同]을 모른다.

이것을 ‘조삼(朝三)’이라 한다.

무엇을 ‘조삼’이라 하는가?

원숭이 주인이 아침먹이로 알밤을 주면서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를 주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원숭이들은 모두 성을 냈다.

이에 주인은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주겠다고 말했다.

원숭이들도 모두 좋다고 했다.

명(名)도 실(實)도 덜어낼 것이 없는데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만들어내는 것이니

이것은 기호(嗜好)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시비를 화합하여

하늘의 자연균형에 머물게 한다.

이것을 ‘양행(兩行)’ 즉 ‘양시론’이라 한다.


이야기는 간단해요. 자신의 원숭이들에게 호의를 베풀려는 주인, 그런데 그러한 호의에 도리어 화를 내는 원숭이들! 이야기가 여기까지 진행되면 일반적으로 주인의 반응은 간단하지요. 화를 내며 호의를 철회하거나, 원숭이를 혼내주거나.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주인은 결코 자신의 마음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지요. 자유롭지 않게 돼요. 호의가 오히려 악화를 낳게 되잖아요. 그러면 주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인의 모습을 보세요. 주인은 자신의 이전 제안을 거두고, 원숭이에게 새로운 제안을 해요. 그 제안은 주인에 입장에서 보면 원래의 제안과 그리 다를 것이 없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두 번째 제안에 원숭이들은 모두 좋다고 해요. 왜 원숭이들은 좋아했을까요? 주인의 입장에서는 알 수 없지요. 하지만 이 두 번째 제안으로 인해, 주인도 만족하고 원숭이도 만족하는 결과를 낳지요.

이를 장자는 ‘시비를 화합하여’ ‘하늘의 자연 균형[천균(天均)]’에 머무는 ‘양시론[양행(兩行)]’이라고 말했어요. 주인의 입장에서의 옳고 그름, 원숭이의 입장에서의 옳고 그름 중 둘 중에 하나만으로 진위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균형 잡힌 입장에서 ‘옳음-옳음’을 만들어낸 것이지요. 요즘 말로 하면, 제로섬(Zero-sum) 게임이 아니라, 윈-윈(win-win) 게임이 되는 겁니다.

마음감옥에서 벗어나는 길이 열렸네요. 그것은 자신의 판단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괄호를 치는 겁니다. 이를 현상학에서는 ‘판단 중지’라고 하지요. 불가에서는 ‘분별심(分別心) 버리기’라고 하고요. 이 길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과 그에 따른 판단, 그리고 그가 살고 있는 보편적인 가치관과 세계관 속에 살아가기 때문이지요. 한번 이러한 가치관이나 세계관이 정해지면 좀처럼 바꾸기 힘든 것이 마음입니다. 어찌 보면 편견에 불과한 입장도 오랫동안 의심 없이 지속되면 진리처럼 여겨지는 것이지요. 이 마음감옥을 서양철학자 니체는 『아침놀』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 눈이 지금 좋든지 나쁘든지 간에 나는 아주 가까운 거리밖에 보지 못한다. 내가 활동하고 사는 공간은 이렇듯 작은 곳이다. 이 지평선이 크고 작은 직접적인 내 운명을 규정하고, 나는 이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와 같이 모든 존재는 그 자신에게 특유한 하나의 원에 둘러싸여 있으며, 이 원에는 중심이 있다. 마찬가지로 귀도 우리를 하나의 작은 공간에 가두며, 촉각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감각은 우리를 감옥의 벽 속에 가두듯이 가두는데, 우리는 이런 지평에 따라 세계를 측정하면서, 이것은 가깝고 저것은 멀며, 이것은 크고 저것은 작고, 이것은 딱딱하고 저것은 부드럽다고 부른다. 우리는 이러한 측정을 감각이라고 부른다. 이 모든 것은 오류 그 자체다!”


「감옥에서」라는 제목의 글의 일부예요. 우리는 우리의 공간 안에서만 살아가지요. 그래서 그 세계가 모든 것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착각일 뿐이지요. 니체는 이러한 상태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감각을 ‘오류 그 자체’라고 하네요. 장자도 말했어요. “아침에 돋아나는 버섯은 그믐과 초하루를 모르고, 매미는 봄과 가을을 모른다. 이것들은 사는 기간이 짧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우리가 느끼고 있는 감각,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 우리가 좋다고 판단한 가치들만을 유일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었던 것 아닐까요?

이러한 확신에서 벗어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타자의 등장’입니다. 자신의 경험과 판단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의 등장은 확고하고 완고한 태도를 당황하게 만들고, 판단을 혼란스럽게 하지요. 그때 자신의 감옥에 갇혀있었던 자아가 이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판단을 의심하고 성찰하게 된다면, 그는 마음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감옥은 결국 자신이 만들어놓은 것이니까요.

원숭이를 키운 주인에게 생긴 일이 바로 그러한 사태입니다. 자신의 호의를 거부하는 원숭이가 바로 타자지요.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고 착각했던 원숭이의 예기치 못한 반항, 여기가 바로 주인이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는 지점입니다. 마음의 감옥에 더 큰 자물쇠를 채우느냐, 아니면 그 자물쇠를 풀고 자유로운 세상으로 한 발 내딛을 것이냐, 두 갈래의 길이 놓여있습니다.


나를 잃고 나를 찾다


사실 자신의 마음감옥에서 벗어나 자유로 향한 길을 나서려는 사람은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기반을 잃어버리는 것 아닌가 하는 공포나 불안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장자는 자기를 잃는 것이야말로 자기를 찾는 것이라는 역설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남곽의 자기는 책상에 기대어 앉아 있다.

하늘을 우러러 숨은 쉬며, 멍하니 몸을 잊은 듯했다.

제자인 안성자유가 앞에서 모시고 있다고 물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몸은 꼭 마른 고목 같고

마음은 꼭 죽은 재처럼 하고 계시니…….

지금 선생님의 모습은

어제의 선생님이 아닌 것 같습니다."

자기가 말했다.

“언아! 훌륭하구나! 그것을 질문하다니.

지금 나는 내 몸을 잃었다.[吾喪我] 너는 그것을 아느냐?

아마 너는 사람의 음악은 듣지만 땅의 음악은 듣지 못하고

땅의 음악은 듣지만 하늘의 음악은 듣지 못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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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인 남곽의 자기와 제자인 안성자유가 이야기하네요. 제자가 어느 날 스승의 모습을 보았더니, 모습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지금 선생님의 모습은 어제의 선생님이 아닌 것 같습니다.”라는 진술에서 안성자유의 놀라움을 발견할 수 있지요. 그때 스승은 제자의 발견을 칭찬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지금 나는 내 몸을 잃었다.” 한문으로는 오상아(吾喪我)라고 말하지요. 여기서 상(喪)은 ‘죽다, 잃다’라는 뜻이에요. 장자에는 이와 유사한 표현들이 많이 나오는데요. 망아(忘我), 심재(心齋) 등이 그러한 것들이에요. ‘나를 잊다’, ‘마음을 굶기다’라고 해석하지요.

불교에서도 이러한 경지를 최상의 경지로 여겼지요, 불교의 무아(無我)사상이야말로 불교의 핵심이지요. ‘나’라는 것을 실체(substance)로 여기는 아집에서 벗어나, “나란 없다”는 경지에 도달하는 자만이 불교의 핵심에 도달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요. 기독교에서도 예수는 자신을 따르려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버리고” 따르라고 명령했어요. 사도 바울은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라고 고백하기도 했고요.

우리는 자유의 조건으로 ‘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나’라는 생각이 고착되면 고통이 따르게 돼요. 그래서 그 ‘나’를 유지하기 위해 온갖 집착, 분노, 어리석음 등의 상태에 놓이게 되지요. 그러나 그 ‘나’를 버리면, 공포와 고통이 따르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행복과 자유가 따른다고 지혜자들은 전하지요. 현대의 영성가 데이비드 호킨스(David R. Hawkins)는 『의식혁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에고가 무(無)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며 자신의 존재에 매달릴 때 공포의 순간이 뒤따랐습니다. 하지만 에고가 죽자, 무가 되는 대신 그 자리에는 ‘일체임Everythingness’, ‘전부All’로서의 참나가 들어섰습니다. 그 속에서 일체는 자신의 본질의 완벽한 표현으로 알려져 있고 자명합니다. 비국소성과 더불어, 사람은 항상 존재해 왔고 혹은 존재할 수 있는 전부라는 앎이 왔습니다. 사람은 모든 정체와 성별을 넘어, 심지어는 인간존재 자체를 넘어서 전체적이고 완전합니다. 다시는 괴로움과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아성찰 끝에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깨달음에 도달했고, 부처는 “나란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남곽의 자기는 “나를 잃었다”는 고백을 합니다.


쓸모없이 살아라


나를 잃고 길 위에 서니 익숙한 길이 낯설어집니다. 내가 가지고 있었던 가치관과 세계관이 갑자기 사라진 것처럼 불안합니다. 하지만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이전에는 내가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고, 듣지 못했던 소리가 들립니다. 기적입니다. 가치가 뒤집힙니다. 귀중한 것이 쓸모 없어지고, 쓸모없던 것들의 보배가 됩니다.

송나라에 형씨(荊氏) 들의 소국이 있었는데

가래나무, 잣나무, 뽕나무가 많아서 그런 이름을 얻었다.

그것이 한두 줌 이상 크면

원숭이 말뚝으로 베어 가고,

서너 아름이 되면

고관 집 용마룻감으로 베어 가고,

일고여덟 아름이 되면 귀인 부잣집의

널판잣감으로 베어 간다.

그래서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중도에 도끼에 찍혀 죽고 만다.

이것이 쓸모 있는 재목들의 환난이라는 것이다.


쓸모 없는 나무.png

나라의 동량(棟樑)이 되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곧게 자라 나무들은 쉬이 베어져서 원숭이 말뚝으로, 고관집 용마루로, 부잣집 널판잣감으로 쓰이지요. 고이 자라고 곧게 자란 나무일수록 이런 운명에서 벗어날 길이 없지요. 장자는 이를 ‘재목(材木)들의 환난’이라고 말하네요. 쓸모가 있어 그 수명이 더욱 짧아지는 것이지요.

그런데 나무의 쓸모는 도대체 누가 정하는 걸까요? 본문을 보니 인간이 정하네요.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시선과 용도에 따라 정해져 버렸네요. 하지만 나무의 진정한 쓸모가 재목이 되는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푸르디푸르게 자라 자신의 후손을 더욱 번창하게 만드는 것일까요? 나무 차원에서 보자면 인간에게 더욱 쓸모없어 보일수록 장수하게 되는 역설적 운명이 아닐 수 없네요.

그렇다면 이러한 운명이 비단 나무에게만 일까요? 인간이 자신의 명대로 다 살지 못하고 단명하고 마는 것은 남에 의해 자신의 쓸모가 정해지기 때문 아닐까요? 쓸모가 있을수록 더욱 불행한 사태를 맞이하는 것 아닐까요? 속된 말로, “단물 쓴물 쏙 빨아먹히고 버림당하”는 운명에 처하는 사람은 쓸모있는 사람들 아닐까요? 유용함의 관점에서 보자면 쓸모 있는 자가 필요할지 모르지만, 생명의 차원에서는 쓸모없음이 절실히 필요한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쓸모없음의 쓸모[無用之用]’의 지혜가 절실하네요.


장자의 거울


장자는 우리에게 성찰의 위대함을 알려줍니다. 그것은 자신의 아집을 쌓아하는 성찰이 아니라,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자신을 열어가는 성찰입니다. 마음감옥에서 벗어나 나를 잃게 되는 경지에 도달하게 합니다. 그렇게 자신을 잃으니 이전의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합니다. 이제 기존의 가치는 반성과 거부의 대상이 됩니다.


명예의 우상이 되지 말고,

꾀함의 중심이 되지 말며,

섬기는 관리가 되지 말며,

지혜의 주인이 되지 말라.

무궁을 체현하고 내가 없는 경지에 노닐라.

하늘에서 받은 본성을 다할 뿐,

앎을 나타내지 말고 비어 있을 뿐이다.

지인의 마음 씀은 거울과 같아서

보내지도 않고 맞이하지도 않는다.

다만 변화에 응하되 마음에 두지 않는다.

그러므로 능히 외물(外物)을 극복하고 상하지 않을 것이다.


명예, 꾀함, 섬김, 지혜는 우리가 평소에 너무도 간절히 추구하는 바지요. 그런데 장자에게는 이러한 것들이 모두 거부되어야 할 것이 되네요. 우상, 중심, 관리, 주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목숨을 내놓지요. 남들에게 섬김을 받는 우상, 세상의 중심, 모든 것을 총괄하는 관리나 모든 것을 소유하는 주인, 이 얼마나 멋진 상태입니까? 하지만 장자는 이것 또한 부정합니다. 아니, 되지 말라고 간곡히 당부하네요.

대신 ‘내가 없는 경지’에서 노닐고 ‘텅 빈 채’ 앎을 나타내지 말라고 말합니다. 도대체 그러한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이나 할까요? 그래서 장자는 ‘거울’을 비유로 듭니다.


자, 한 번 생각해보세요. 거울이 스스로 형상을 만드나요? 아니지요. 거울을 형상을 되비출 뿐이지요. 그러면 거울은 거울이 비추어진 형상이 아름답다고 해서 간직하나요? 아니죠. 그러면 거울이 아니라 액자지요. 그러면 거울에 흉측한 형상이 비친다고 거울이 거부하나요? 그도 아니지요. 거울은 분별심이 없으니까요? 거울은 어떠한 것도 다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간직하지는 않지요. 오면 맞이하고 떠나면 배웅할 뿐이에요. 어디에도 머물지 않지요.

한편 거울에 불을 비춘다고 거울에 비춘 불이 뜨겁나요? 거울에 얼음을 비추면 거울에 비춘 얼음이 차갑나요? 거울은 타지도, 얼지도 않아요. 그래서 상함이 없지요.

그래서 장자는 거울에 대해 “보내지도 않고 맞이하지도 않는다. 다만 변화에 응하되 마음에 두지 않는다. 그러므로 능히 외물(外物)을 극복하고 상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상태가 거울과 같다면 참자유를 누릴 수 있지 않을까요?


참다운 자유는 어떠한 지위나 상태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지위나 상태를 거부하는 것이지요. 참다운 자유는 ‘나’ 속에 머물면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없는 경지’에 도달해야만 느낄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자유를 누리겠다고 지식을 쌓고, 재산을 늘리고, 명예나 학식을 높이지 마세요. 그것은 적어도 장자가 말하는 자유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거니까요. 차라리 자신의 마음을 청정무구하게 닦아 모든 것을 비추는 자가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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