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광복, 《우리가 매혹된 사상들》(사계절, 2018)
민주화 운동을 했던 이들로서는 자유 민주주의는 아픈 독재의 기억을 담고 있는 단어다. 그러나 경제 성장을 이끌었던 보수 세력의 생각은 다르다. 민주주의를 앞세우는 진보 측 생각이야말로 시장 경제를 무너뜨리려는 공산주의자들의 생각과 닮은꼴 아닌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자유 민주주의라는 용어는 절대 포기할 수 없다!
어느덧 자유 민주주의는 우리 사회에서 보수 세력을 나타내는 꼬리표가 되었다. 그래서 진보 쪽에서는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주로 쓴다. 자유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이제 보수인지 진보인지를 가리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어 버렸다. (60~61쪽)
5월이다. 코로나 19가 진정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오랜만에 인문학놀이터 참새방앗간에 들렀다. 소모임이 가능하도록 깨끗하게 치워져 있다. 10명 이내의 사람에게 적합한 공간이다. 공간 한쪽 벽은 책장으로 장식했다. 물론 책장에는 책들을 가득 채워 놓았다. 반은 읽었고, 반은 아직 채 읽지 못한 책들. 내가 사놓은 책이지만 볼 때마다 새롭다. 책들을 보는 것만으로 나의 과거가 반추된다. 책 장에 책을 한 권 뽑았다. 안광복의 《우리가 매혹된 사상들》(사계절, 2018)이다. 사실 이 책은 2013년에 나온 《교과서에서 만나는 사상》(사계절)의 증보판이다. 살펴보니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항목이 증보되었다. (아이쿠, 가장 핵심적인 사상을 빼놓았구먼!)
편의점에서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책을 훑어본다. (과거에 읽은 책이라 훑어본다는 말이 맞지 싶다. 그렇다고 대충 읽은 것은 아니다.) 340쪽 정도 되는 책에 32가지 사상을 소개했으니, 대략 한 사상 당 10쪽 안팎의 내용으로 정리해놓은 책이다. 사상의 축도 같은 책이라 깊이는 보장할 수 없지만, 친숙한 사례와 대중적 글쓰기로 쉽게 사상을 조망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다.
책은 크게 정치, 철학 예술, 국가, 경제, 사회 등 5장으로 나눠져 있다. 그 속에 들어 있는 사상의 이름만 소개하자면, 공화주의, 계몽주의, 민주주의, 보수주의, 자유 민주주의, 사회 민주주의, 아나키즘, 포퓰리즘, 낭만주의, 니힐리즘, 실존주의, 구조주의, 해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주의 리얼리즘, 제국주의, 민족주의, 파시즘, 프런티어 정신, 대동아 공영권, 마오이즘, 주체사상, 자본주의, 공산주의, 개발 독재, 신유교 윤리, 신자유주의, 기업가 정신, 오리엔탈리즘, 페미니즘, 생태주의, 관료주의 등이 소개된다. 자신이 궁금하거나 읽고 싶은 부분을 찾아 읽어도 아무 문제없다.
소개되고 있는 사상들이 높낮이가 다른 부분도 있어서 왜 이런 식으로 항목을 설정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지만, 학생들이 교과서에서 접했을 개념들을 친절하게 풀어주려는 교사의 친절함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학술적 엄격함이나 항목의 치밀함보다는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그러나 막상 설명하려면 쉽지 않은 사상을 이 만큼 쉽게 설명한 책은 쉽지 않다. 특히 우리나라의 실정을 고려한 ‘자유민주주의’ 항목은(위의 인용구에도 소개된) 학생들에게 ‘자유민주주의’라는 단어가 형성된 지점과 그것이 오늘날 어떤 식으로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는지 소개하고 있어 현실감을 더한다.
이 책으로 배경을 깔았다면, 유시민이 쓴 《국가란 무엇인가》(돌베개, 2017)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안광복의 책이 사상을 평면적으로 쉽게 소개했다면, 유시민의 책은 입체적이면서 역사적으로 조금은 깊이 있게 소개한 책이다. 안광복의 책이 교사의 친절함으로 잘 포장된 책이라면, 유시민의 책은 정치가의 고민이 잘 녹여진 책이다. 독자층으로 말하자면 안광복의 책은 중학교 이상을 독자층으로 한다면, 유시민의 책은 고등학교 이상의 성인을 대상으로 삼고 있다.
현실을 탐구하고 미래를 조망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사상에 대한 깊이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정신이자,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태도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 사회를 읽고 싶다면 좀 더 폭넓은 시선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안광복의 책은 그러한 시선 확보에 첫걸음에 해당하는 책이고, 유시민의 책은 단단하게 지식을 다지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