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대에 한국철학계에서 가장 인기를 많이 얻었던 철학자는 한병철이다. 그는 1959년 출생하여 현재 베를린예술대학 교수를 하고 있다. 그는 고려대학교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했고, 브라이스가우의 프라이부르크대학과 뮌헨대학에서 철학, 독일문학, 가톨릭 신학을 공부했다. 이과에서 문과로 방향을 틀었고, 국내에서 해외로 활동지를 이동했다. 그를 일약 스타로 만든 책은 독일과 한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피로사회》(2012)였다. 푸코가 진단했던 규율사회를 뛰어넘어 이제는 21세기는 성과사회의 시대라 말하며 비교분석한 그의 글쓰기는 문체의 화려함과 더불어 깊이있는 현실 진단을 해냄으로써 철학계에 새로운 글쓰기를 가능하게 하였다. 연이어 거의 매년 발표한 책들은 모두 베스트셀러로 등극하였다. 아래의 글은 철학자 한병철의 책을 우리나라의 출간 순서대로 정리해본 것이다. 책명/출판년도/출판사를 적시하고, 핵심내용을 간략히 발췌하였다. 큰 흐름을 한 번 파악해보시기를. 나는 그의 글 전체를 ‘신자유주의 분석과 비판’이라는 주제로 보고 있다.
한병철 교수는 이 책에서 현대사회의 패러다임 전환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자아와 타자 사이의 적대성 내지 부정성을 근간으로 하는 사회(냉전, 면역학, 규율사회)에서 그러한 부정성이 제거된 사회, 부정성 대신 긍정성이 지배하는 사회로의 변화가 20세기 후반 이후 일어났다는 것이다. 한병철 교수는 이 새로운 사회를 성과사회, 그리고 이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을 성과주체라고 명명한다. 과거의 사회가 금지(“해서는 안 된다”)에 의해 이루어진 부정의 사회였다면, 성과사회는 “할 수 있다”는 것이 최상의 가치가 된 긍정의 사회이다. 이 사회에서는 성공하라는 것이 남아 있는 유일한 규율이며, 성공을 위해서 가장 강조되는 것이 바로 긍정의 정신이다(“Yes, we can!”). 그러나 부정성에 의해 제약받지 않는 긍정성은 긍정성의 과잉으로 귀결되며 타자의 위협이나 억압과는 다른 의미에서 자아를 짓누른다. 오직 자신의 능력과 성과를 통해서 주체로서의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자아는 피로해지고, 스스로 설정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좌절감은 우울증을 낳는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한병철은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가속화는 오직 시간에서 역사적 의미와 중요성이 소멸할 때만 가속화로서 지각된다. 가속화가 그 자체로서 주목의 대상이 되고 문제적으로 되는 것은 바로 시간이 무의미한 미래를 향해 휩쓸려가는 때뿐이다.
신화적 시간은 한 폭의 ‘그림’처럼 고요히 놓여 있다. 반면 역사적 시간은 일정한 목적을 향해 진행되는, 혹은 내달리는 ‘선’의 형태를 띤다. 이 ‘선’에서 서사적인 긴장 혹은 목적론적 긴장이 사라져버리면, 선은 방향 없이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점들’로 흩어진다. 역사의 종언은 시간을 점의 시간으로 원자화한다. 신화는 이미 오래전에 역사에 밀려났다. 이에 따라 정적인 그림은 전진하는 선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이제 ‘역사/이야기’는 정보에 밀려나고 있다. 정보들은 서사적 길이나 폭을 알지 못한다. 정보들은 중심도 없고 방향성도 없으며, 우리에게 물밀 듯이 닥쳐온다. 정보에는 ‘향기가 없다.’... 정보는 원자화된 시간, 즉 점-시간의 현상이다. (42쪽~)
투명성은 속이 들여다보이는 유리 인간을 만들어낸다. 여기에 투명성의 폭력이 있다. 무제한의 자유와 무제한의 커뮤니케이션은 전면적 통제와 감시로 돌변한다. 소셜미디어 또한 점점 더 사회적인 삶을 감시하고 이용해먹는 디지털 파놉티콘에 가까워진다.
규율사회의 파놉티콘은 더 효과적인 감시를 위해 수감자들을 격리시키고 서로 대화도 하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디지털 파놉티콘의 주민들은 서로 열심히 소통하며 그 과정에서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노출한다. 그들은 이로써 디지털 파놉티콘의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7쪽)
긍정사회에서 일반화된 판정의 형식은 ‘좋아요’이다. 페이스북이 ‘싫어요’ 버튼을 도입하는 데 일관되게 반대 입장을 고수해온 것은 주목할 만하다. 긍정사회는 모든 종류의 부정성을 피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부정성은 커뮤니케이션에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커뮤니케이션의 가치는 오직 정보 교환의 양과 속도로만 측정된다.(26쪽)
신자유주의는 시민을 소비자로 만든다. 시민의 자유는 소비자의 수동성으로 대체된다. 오늘날 소비자가 된 유권자는 정치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 없다. 즉 적극적으로 공동체를 형성해가고자 하는 의욕이 없는 것이다. 그는 공동의 정치적 행동을 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 그는 궁시렁궁시렁 불평하면서 정치에 수동적으로 반응할 따름이다.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상품이나 서비스에 대해 불만을 늘어놓는 소비자와 똑같다. (「자유의 위기」, 22~23쪽)
바보는 현대의 이단아다. 이단은 본래 선택을 의미한다. 즉 이단아는 자유로운 선택권을 쥐고 있는 자다. 그는 정통에서 이탈할 용기가 있다. 그는 순응의 압박을 용감하게 떨쳐버린다. 이단아로서의 바보는 합의의 폭력에 맞서는 저항의 형상이다. 그는 아웃사이더의 마력을 보존한다. 순응의 압박이 점점 더 강화되어가는 오늘날, 이단적 의식의 날을 벼려야 할 필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절실하다. (「백치」, 114쪽)
진정한 의미의 사랑은 사실상 현대 세계, 세속화된 자본주의 세계의 이 모든 규범에 반항한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결코 그저 두 개인 사이의 기분 좋은 동거를 목적으로 하는 계약이 아니라, 타자의 실존에 관한 근원적인 경험이며, 아마도 현 시점에서 사랑 외에는 그런 경험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한병철은 성적인 사랑을 포함한 진정한 사랑에 관한 일종의 현상학과 오늘날 사랑을 위협하는 실제적 힘에 대한 다양한 조사를 결합한다. [……] 한병철의 주목할 만한 에세이를 읽는 것은 고도의 지적 경험이며, 이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오늘날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투쟁 가운데 하나에 명확한 의식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그것은 곧 사랑의 수호, 혹은 랭보가 말하듯이 사랑의 재발명을 위한 투쟁이다. (알랭 바디우의 서문 「사랑의 재발명」)
“에로스는 타자를 타자로서 경험할 수 있게 하고, 이로써 주체를 나르시시즘의 지옥에서 해방시킨다. 에로스를 통해 자발적인 자기 부정, 자기 비움의 과정이 시작된다.”
내면의 공허를 덮기 위해 셀카의 주체는 자신을 생산하려고 헛되이 애쓴다. 셀카는 공허한 형태의 자아다. 셀카는 공허를 재생산한다. 나르시시즘적인 자기애나 허영심이 아니라 내면의 공허가 셀카 중독을 낳는다. 여기에는 스스로를 사랑하는 안정된 나르시시즘적 자아가 없다. 오히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부정적 나르시시즘이다. (「매끄러운 몸」, 26쪽)
오늘날의 미적 경험은 측면성이 아니라 나르시시즘적인 중심성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그리고 소비주의에 빠진다. 소비의 대상에 대해 우리는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이 소비주의적인 태도는 타자의 타자성을 파괴한다. 우리는 타자를 위해 옆으로 물러나거나 후퇴하지 않는다. 소비주의적인 태도는 타자의 타자성을, 비동일성을 파괴한다. (「미의 정치」, 93쪽)
파괴적인 것을 증오하는 자는 삶 또한 증오해야 한다. 오로지 죽은 것만이 왜곡되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의 비유다. 건강함과 매끄러움을 절대화하는 오늘날의 미의 통치가 바로 미를 철폐한다. 그리고 오늘날 히스테리적인 살아남기의 모습을 띠게 된 단순하고 건강한 삶은 죽은 것으로, 좀비로 변한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 살기에는 너무 죽어 있고, 죽기에는 너무 살아 있다. (「재앙의 미학」, 70쪽)
강력한 권력자는 권력을 펼치기 위해 폭력에 의존하지 않는다. 폭력과 혼란은 포괄적인 권력이 부재하는 곳에서, 권력의 담지자여야 할 정치적 혹은 사회적 심급과 기관이 붕괴하는 곳에서 확산되는 것이다. 긍정적 형태로서의 권력은 형성하고 산출해내며 질서를 부여한다. 권력은 폭력과는 반대로 생산적이다. 권력은 혼란이 생겨나는 것을 막는다. (한국어판 서문, 6쪽)
권력이야말로 사물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권력은 말이 없고 무의미한 강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권력은 달변이다. 권력은 사물들을 명명하고 그것의 ‘어디로’와 ‘무엇을 위해’를 규정함으로써 세계를 표명한다.
권력은 사물들이 그에 의거해 해석되는 의미 지평을 만듦으로써 사물이 의미를 갖게 만든다. 사물들은 권력관계 속에서 비로소 중요해지고 의미를 얻는다. 권력관계가 의미를 구성한다. 의미 그 자체라는 것은 없다. “의미란 관계의 의미이자 관점이라는 것이 필연적이지 않은가? 모든 의미는 권력의 의지이다(모든 관계 의미는 그리로 소급된다).” (제2장 「권력의 의미론」, 55쪽)
권력을 얻었을 때 생기는 쾌락의 감정은 자유의 감정이다. 무력無力은 타자에게 내맡겨졌다는 것이며, 타자 속에서 자신을 상실한다는 것이다. 권력이란 그와 반대로 타자에게서도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는 것, 다시 말해 자유롭다는 것이다. 따라서 쾌락의 강도는 유희의 자유로움이나 다양성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쾌락은 권력과 더불어 자라나는 자아의 연속성에서 기인한다. (제3장 「권력의 형이상학」, 90쪽)
폭력은 무력無力의 표시다. 그에 반해 타자가 자유롭게 에고에게 복종한다면 에고는 타자를 상대로 큰 권력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이 경우 에고는 폭력을 동원하지 않고도 타자에게 자신을 연속시킨다. 이 권력 덕택에 에고는 타자에게서 자기 자신으로 머무른다. 권력은 이러한 연속성을 형성하고 에고 혹은 에고의 의지를 공간화한다. 그에 반해 폭력이나 박해는 갈라진 틈을 더 깊게 하고 공간을 축소시킨다. [……] 혁명 상황에서는 폭력이 등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폭력에만 의존하고 어떤 권력에도 의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 폭력은 공간을 장악할 수는 있지만, 공간을 창출해낼 수는 없는 것이다. (제4장 「권력의 정치학」, 132쪽)
자유는 권력관계를 비로소 가능하게 하는 권력의 중요한 요소이다. 권력은 “자유로운 주체들”에게만 행사된다. 주체들이 자유로워야만 권력관계가 존속한다. “온통 결정되어 있는 것으로만 채워진 곳에서는 권력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철로 된 족쇄에 묶여 있는 한 노예제는 권력관계가 아니다(그것은 물리적 강제관계이다). 인간이 움직일 수 있고 극한의 경우에는 달아날 수 있을 때에만 권력관계가 존재한다. 따라서 권력과 자유는 (권력이 행사되는 곳에서 자유가 사라진다는 식으로) 서로를 배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둘은 훨씬 더 복잡한 놀이Spiel 관계를 갖는다. (제5장 「권력의 윤리학」, 160~61쪽)
타자가 존재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비밀로서의 타자, 유혹으로서의 타자, 에로스로서의 타자, 욕망으로서의 타자, 지옥으로서의 타자, 고통으로서의 타자가 사라진다. 오늘날 타자의 부정성은 같은 것의 긍정성에 밀려나고 있다. 같은 것의 창궐이 사회체社會體를 덮치는 병리학적 변화들을 낳는다. 박탈이나 금지가 아니라 과잉소통과 과잉소비가, 배제와 부정이 아니라 허용과 긍정이 사회체를 병들게 한다. 억압이 아니라 우울이 오늘날의 병적인 시대의 기호다. (7쪽)
신자유주의의 지배하에서 착취는 더 이상 소외나 자기 탈현실화가 아니라 자유와 자기실현, 자기최적화로 진행된다. 여기에는 나에게 노동을 강요하고,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소외시키는 착취자로서의 타인이 없다. 오히려 나는 나를 실현한다는 믿음 속에서 자발적으로 나 스스로를 착취한다. 이것이 신자유주의의 비열한 논리다. [……] 신자유주의의 지배는 망상적인 자유 뒤에 숨어 있다. 지배는 자유와 일치하는 순간, 완성된다. 이 체감상의 자유는 모든 저항, 모든 혁명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무엇에 맞서서 저항해야 한다는 말인가? 억압을 행사하는 타인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데 말이다(61~62쪽)
레비나스에 따르면 한 인간을 만난다는 것은 ˝하나의 수수께끼에 의해 깨어 있게 되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우리는 수수께끼 혹은 비밀로서의 타자에 대한 경험을 잃어버렸다. 타자는 이제 유용성의 목적론에, 경제적 계산과 가치평가의 목적론에 완전히 예속되어 있다. 타자는 투명해진다. 타자는 경제적 객체로 강등된다. 이에 반해 수수께끼로서의 타자는 전혀 가치평가를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은 언제나 다름을 전제로 한다. 타자의 다름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다름도 사랑의 전제다. 사람의 이원성은 자신에 대한 사랑에 필수적이다. ˝다른 한 사람이 우리와 다른, 우리와 대립되는 방식으로 살고 활동하고 느낀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것에 대해 기뻐하는 것 말고 무엇이 사랑이겠는가? 대립하는 것들을 기쁨으로 연결하려면 사랑은 이 대립하는 것들을 제거해서도, 부정해서도 안 된다. 심지어 자기애도 한 사람 속에 있는, 서로 뒤섞을 수 없는 이원성(혹은 다원성)을 전제로 한다.˝
모든 이원성이 사라질 때,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서 익사한다. 이원성이 모두 사라진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과 융합되어버릴 것이다. 이 나르시시즘적인 핵융합은 치명적이다. 알랭 바디우도 사랑을 ˝둘의 무대˝라고 부른다. 사랑은 세상을 타자의 시선으로 새롭게 창조하고 익숙한 것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사랑은 전적으로 다른 것이 시작되게 하는 사건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하나의 무대에서 살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생산관계가 의도적으로 사육하여 생산성을 증대시키기 위해 착취하는 에고는 병적으로 비대해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을 다시 타자로부터, 타자에 대한 관계로부터 새롭게 보고, 타자에게 윤리적인 우선권을 인정해주어야 한다. 나아가 타자를 경청하고 타자에게 대답하는 책임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레비나스는 ˝말하기˝로서의 언어를 다름 아닌 ˝한 사람의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이라고 보았다. 오늘날에는 타자의 언어로서의 저 ˝가장 근원적인 언어˝가 과잉소통의 소음에 파묻히고 있다. (106~7쪽)
아무도 아님(무아無我)
무아는 거울과 유사하다. 거울은 아무도 아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얼굴이 비칠 수 있다. 이는 거울의 친절이다. 거울 같은 무아는 내면성, 영혼 및 자기를 가지지 않는다. 무아에 이르기 위한 선불교 수행의 핵심은 자기를 던져버리는 것이다. 자아가 강한 사람은 늘 자기의 미래를 걱정하는 데 반해, 무아는 현재에 그때그때마다 머무른다. 자기를 버린 무아는 걱정이 없다. 무아는 자기의 정체성 혹은 동일성을 고수하지 않고, 만물의 운행에 따른다. 무아가 경치를 볼 때, 경치는 그에 대립하여 서 있는 대상이 아니라, 그에게 흘러든다. 경치가 경치를 보게 된다. 무아가 그린 그림이나 무아가 쓴 하이쿠는 세계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빛나게 한다. 무아가 내면성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그림과 하이쿠에 심오한 의미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은 깊은 울림을 자아낸다.
어디에도 거주하지 않음(무주無住)
무주는 거주와 대립하는 개념이다. 거주지가 없는 사람은 방랑자이다. 방랑길은 끊임없이 고통스럽게 이별하는 길이다. 하지만 이별의 슬픔은 무겁지 않고, 명랑하다. 모든 형태의 집착에서 벗어난 방랑자는 자유롭다. 만물의 변화에 자기를 맞추고, 오고 가는 모든 것에 친절하다. 방랑은 세계에 등을 돌리지 않는다. 무주는 거주를 긍정한다. 방랑 후의 세계는 기존의 세계와 내용적으로 같다. 하지만 비어 있음만큼 더 가볍게 된 것처럼 느껴진다. 가뿐한 거주는 방랑이 된다. 이제 거주지는 개방되고, 친절한 분위기를 풍긴다. 누구나 무료로 묵을 수 있는 객정(客亭) 같은 집이 된다.
죽음
선불교의 죽음 개념은 서양철학의 죽음 개념과 다르다. 플라톤은 철학을 죽음의 연습으로 본다. 헤겔에게 죽음은 개별적인 것이 보편적으로 상승하는 과정이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은 인간 현존재의 삶을 본래적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죽음에 영웅적으로 맞선다. 그에 반해 선불교는 죽음에 대해 태연한 태도를 취한다. 덧없는 세상의 너머를 보지 않고, 덧없이 지나가는 사물들 곁에 머무른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큰 죽음은 자아 없이 깨어나는 것이다. 그때 자아는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트여서 개방된다. 이제 아무도 죽지 않는다. 무아가 죽는 것이다.
자비(친절)
친절(자비)은 이미 여러 차례 언급되었다. 선불교의 중심에는 무가 있기 때문에, 즉 중심이 없기 때문에 중심부와 주변부를 가리지 않고 어디서나 친절하다. 빈터에서 부드러워진 만물은 서로에게 친절하다. 자아가 없는 무아에게는 모든 사람이 스며든다. 친절한 무아는 방랑하면서 마주치는 모든 것과 함께 간다. 방랑자가 거주하는 곳은 누구에게나 친절하게 열려 있다. 큰 죽음을 맞은 사람은 초월적 세계를 동경하지 않고, 덧없이 지나가는 사물들 곁에 친절하게 머무른다. 선불교의 친절은 자아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 교환되는 것이 아니라, 무아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자비는 사람이 베푸는 것이 아니다. 비어 있음의 몸짓이다.
정원의 시간은 타자의 시간이다. 정원은 내가 멋대로 할 수 없는 저만의 시간을 갖는다. 모든 식물은 저만의 시간을 갖는다. 정원에서는 수많은 저만의 시간들이 교차한다. 가을크로커스와 봄크로커스는 모습은 비슷해도 시간감각이 전혀 다르다. 모든 식물이 매우 뚜렷한 시간의식을 갖는다는 것, 어쩌면 오늘날 어딘지 시간을 잃어버린, 시간이 부족한 인간보다 심지어 더욱 시간의식을 갖는다는 것이 놀랍다. 정원은 강렬한 시간체험을 가능케 한다. 정원에서 일하는 동안 나는 시간이 많아졌다. 누구든 정원에서 일하면 정원은 많은 것을 돌려준다. 내게는 존재와 시간을 준다. 불확실한 기다림, 꼭 필요한 참을성, 느린 성장이 특별한 시간감각을 불러온다. (23~24쪽)
정원에서 일하게 된 뒤로 나는 전에 몰랐던, 강하게 몸으로 느끼는 특이한 느낌을 지니게 되었다. 땅의 느낌이라고 할 만한 이것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어쩌면 땅이란 오늘날 우리에게서 점점 멀어져가는 행복과 동의어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땅으로 돌아가기란 행복으로 돌아가기가 된다. 땅은 행복의 원천이다. 오늘날 우리는 주로 세계의 디지털화라는 행진을 하면서 땅을 떠났다. 생명을 살리고 행복하게 하는 땅의 힘을 우리는 더는 느끼지 못한다. 그 힘은 모니터 크기로 줄어들고 만다.(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