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관점에서 새로 쓰는 노자 <도덕경>
서양화는 여백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그와 달리 동양화는 여백이 가장 중요합니다. 모든 것을 촘촘히 말해버리는 서양의 논리적 글쓰기보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쓰지 못하고 멈추는 노자의 글쓰기에 더 친연성을 느낍니다. 머리로 글을 쓰는 것과 가슴으로 글을 쓰는 것의 차이라고 할까요. 말할 수 있는데,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말로는 표현할 수 없기에 말하지 않는 것일 수 있습니다. 다 보여주면 오히려 진실이 감춰질까봐, 수줍게 살짝 보여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밀당’의 기술이 아닙니다. 윤곽선을 지우고 배경과 존재의 경계를 허물어 나와 타자를 이으려는 것입니다. 내가 자연 속으로 들어가고, 자연이 내 속으로 들어오는 이 무경계의 경지를, 나를 비워야 타자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도저한 정신이 수많은 작품을 통해 표현되고 있습니다. 주체와 객체를 차갑게 가로지르는 사유가 아니라, 그래서 주체를 선언하고 객체를 대상화하는 이분법이 아니라, 정반대로 주체를 비움으로, 주체와 객체 모두가 자유롭게 되는 전일적 세계가 글로 쓰여지면 노자의 글쓰기가 됩니다.
진리를 말하면 진리가 되지 못하는 경지, 말로 표현하면 말이 되지 않는 경지를 노자는 바라봅니다. 없음과 있음이 한 세계 속에 있습니다. 말함과 말하지 못함(또는 말할 수 없음, 또는 말하지 않음)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침묵의 언어가 가능하다면 바로 이러한 경지를 표현하는 언어가 되겠지요. 말하면 말이 안 되는 경지, 불립문자(不立文字)의 경지이기에 말을 허물고 소리를 지웁니다. 그곳에 꽃이 피고 조용히 미소가 떠오릅니다. 염화미소(拈花微笑)의 깨달음이 어찌 부처와 가섭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겠습니까.
글쓰기도 그러합니다. 다 말하지 않습니다. 다 쓰지 못합니다. 내가 도달한 그 너머에 어둠이 있습니다. 그어둠은 응시할 수 있으나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슬픔이나 죽음은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아득하여 그 주변만을 더듬을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다 쏟아내지 마세요. 정작 중요한 것은 소중하게 감춰 두세요. 보여주고 싶은 것의 입구까지만 도달하세요. 그 문을 여는 것은 여러분의 몫이 아닙니다.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하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진술에서 차가운 실증주의를 읽어내는 사람도 있지만, 삶의 신비를 읽어내는 사람도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