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관점에서 새로 쓰는 노자 <도덕경>
2015년 JTBC에서 상영한 <송곳>은 부당해고에 맞서는 노동자들의 싸움을 그려낸 인상깊은 드라마였습니다. 특히 노동법률을 상담해주는 구고신(안내상 分)은 드라마 곳곳에서 명대사를 날린 사람이었지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그의 대사 하나. “당신들은 안 그럴 거라고 장담하지마.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 남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처지에 따라서 생각도 바뀔 수 있음을 경고하는 말이지요.
내가 아는 형 한 분도 술자리에서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사람은 말이야. 결국 처지(處地)를 잘 알아야해. 처할 처, 땅 지! 자신이 발 딛고 있는 곳이 어딘지 알아야 자신의 삶을 볼 수 있거든.” 그 말에 어지간히 취한 나도 정신이 번쩍 들었더랬습니다. 내 영혼이 발바닥에 도달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내가 있는 이곳은 어떤 곳인가? 나는 누구와 함께 하고 있는가? 내 발이 향하는 곳은 어디인가? 온갖 질문의 소용돌이가 나에게 몰려왔었습니다.
전도망상(顚倒妄想)에 사로잡히지 않으려면, 진정 새롭게 시작하려면 머리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발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일확천금(一攫千金), 벼락출세를 꿈꾸며 영혼까지 끌어모아 집을 사고, 주식에 투자하다가 영혼마저 털리게 되는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젊은 영혼을 타락시키는 자, 저주받으라!
작가는 무엇보다 대지에 굳게 발 딛고 있는 사람입니다. 단단히 고정된 삼각대 위에 카메라가 얹어질 때 가장 선명한 풍경을 잡아낼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흔들리는 시선으로는 세상이 온통 뿌옇게 보일 뿐입니다. 갇혀 있으란 말이 아닙니다. 좁은 세상에 만족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가장 멀리 보기 위해서라도, 큰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처지를 정확히 성찰하라는 말입니다.
망망대해에서 길을 잃었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자신이 어디 있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발달심리학에서는 이를 메타인지(metacognition)라고 말합니다. 메타인지란 내가 어디에 있는지, 나는 무엇을 알거나 모르는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나는 누구인지 아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메타인지는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힘이자, 앎을 검증하는 앎이지요. 공상에 사로잡히지 않고 맨정신으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능력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현실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 걸음이라도 제대로 걸어갈 수 있습니다. 영화 <메트릭스>에서 네오에게 모피어스가 빨간약과 파란약을 내밀었을 때, 네오는 기꺼이 빨간약을 선택합니다. 환상의 세계에서 전도망상에 사로잡혀 사느니, 아무리 비참한 현실이라도 용감하게 대면하여 돌파하겠다는 용기를 내는 것이지요. 그럴 때만이 네오(Neo, 新)의 이름처럼 새로운 공간과 시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폐허가 된 인간의 자리에 새로운 희망을 심을 수 있게 됩니다. 작가 또한 그런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