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자아는 단단하지 않다. 지진으로 흔들리는 땅 위에서 해일과 폭풍우를 맞으며 서 있다. 흔들리고 부서지고 퇴락해 사라질 운명이다. 자유의지는 그런 곳에 기거한다. 있다고 말하기엔 약하고 없다고 하기엔 귀하다. 그래서 나는 자유의지라는 것이 있다고도 없다고도 확언하지 못하겠다. 뇌과학을 조금 알고 나니, 나를 포함해 어떤 인간도 무한 신뢰하거나 무한 불신하지 않게 되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도 마찬가지다. 사랑하기엔 흉하고 절멸하기엔 아깝다. 그 운명이 어찌 될지 나는 알지 못하고 책임질 수도 없다. 단지 나 자신의 삶 하나를 스스로 결정하려고 애쓸 따름이다. 악과 누추함을 되도록 멀리하고 선과 아름다움에 다가가려 노력하면서, 내게 남은 길지 않은 시간을 살아내자. 이것이 내가 뇌과학에서 얻은 인문학적 결론이다.
- 유시민,《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돌베개, 2023) 101쪽에서
나는 이과 쪽 과목을 꽤 잘했던 문과 남자다. 수학이나 과학과목에 흥미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나라 입시교육은 문과나 이과 하나만 선택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나는 작가가 되고 싶었기에 문과를 택했다. 꽤나 흥미로웠던 이과 공부가 중단되었다. 대학에 가서는 문과와 이과 캠퍼스 자체가 지역적으로 분리되어 있어서 이과 쪽은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졸업하고 말았다. 성인이 되고 한참을 지나고 나서야 과학교양도서를 기웃거리며 갈증을 달래는 것이 고작이었다. 독서비율로 치면 문과 : 이과 = 100 : 1 정도였을까.
최근 들어 인문학의 인기는 줄어들고 과학의 인기가 치솟고 있다. 과학자나 과학도들의 책들이 쏟아진다. 너무 많아 고르기도 힘들다. 그러던 차 나와 포지션이 비슷한 문과 남자 유시민의 신간이 나왔다. 그가 진행하는 <알릴레오 북스>의 구독자로서 아니 살 수 없다. 출간 전부터 대기표를 끊어놓고 책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받았다. '유시민이 들려주는 과학×인문학 이야기'라는 띠지의 소개문답게 인문학적 주제에 과학적 성과를 잘 버무린 책이었다. 늙어가는 유시민의 관록을 느끼는 재미도 쏠쏠하다.
유시민이 참고했다는 과학책 중 나의 독서이력과 겹치는 부분을 발견하면서 실실 웃음도 나온다.(나도 읽었는데.^^) 과학적 지식을 도구로 쓰는 책이라서 그런지 문장도 꽤나 탄탄하고 쫀쫀하다. '이런 문장력이 없다면 이 많은 과학도서를 이 얇은 책에 녹이기 힘들지'라고 생각하며 탁월한 '지식소매상'인 그가 부럽기도 하다. (부러우면 지는 것이 아니라 따라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 책 덕분에 며칠 정도 나의 뉴런이 춤을 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