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와 함께 춤을
최근 저는 어떤 사람에게서 사과를 받아야겠다는 마음을 강하게 품고 있습니다.
몇 달을 두고 곱씹어봐도, 회피와 방관으로 일관하는 그 사람에게 저는 분명한 사과를 요구하고 싶습니다.
칸트가 말했다고 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이성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존재이며,
사과는 그 책임을 수용하는 방식이다.
이를 부정하는 자는 자기 행위의 주체성조차 포기한 셈이다.
주체성조차 포기한 이 사람의 멱살을 붙잡고서, 진심 어린 사과를 받아내고 싶은 나. 이 감정은 대체 어디서 시작되는 걸까요?
사과를 원하는 제 마음이 정의구현을 위해서인지 쓸모없는 집착인지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제가 입은 상처를 명확히 규정하고, 상대의 책임을 분명히 한 뒤 진심 어린 사과를 받는다면, 그것은 정의구현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에게 죄책감을 유도하고, 그 사람이 제 고통을 조금이라도 느끼길 바란다면, 그것은 집착일 수도 있겠죠.
현실적으로 사과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두 가지 감정이 얽혀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 복합성이야말로 인간적인 고뇌일 것입니다.
이번 경험을 통해, 사과가 가능할지는 철저히 가해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절감했습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우리는 대개 그 선택이 불가능한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사과를 요구해야 합니다. 감정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 자체가 생기지 않았을 테니까요.
사과는 본래 가해자의 몫입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사과를 받으려는 사람이 더 많이 애써야 하는 구조가 반복됩니다.
내가 피해자인데, 왜 내가 더 애써야 하지?
사과를 어려워하는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감정 표현에 서툴거나, 갈등을 회피합니다. 비난을 두려워하거나, 낮은 자존감 탓에 사과 자체를 자존의 붕괴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자기 잘못이라는 인식조차 없고, 또 어떤 이는 사과가 권력의 상실이라 여겨 끝내 말로는 사과하지 않으려 합니다.
저는 지금, 회피하고 외면하며 자기감정을 말로 꺼낼 줄 모르는 사람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의 잘못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감정적으로 풀어내고 설득하면서 오히려 제 자신이 점점 고갈되어 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도돌이표 같은 대화. 전진 없는 갈등의 반복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쯤에서 냉정하게 제 자신에게 물어야 하겠죠.
내가 원하는 건 정의인가, 아니면 소진되지 않는 나인가.
알고 있습니다. 상대는 바뀌지 않을 것이고, 이 싸움의 약자는 결국 나라는 것을.
제가 사과를 더 이상 요구하지 않고 혼자 지칠 때까지 그 사람은 계속해서 방관할 것입니다. 그 고집을 제가 감당할 재간은 없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이제 관계는 더 이상 논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깨지지 않는 인식의 벽이 있고, 저를 이해할 의지도 능력도 가해자에겐 없기 때문입니다.
상처를 준 이는 사라졌고, 상처받은 나는 남아 있다.
저는 여전히 그 감정을 붙잡고 해석하며, 혼자 치유하고, 잔해들을 스스로 수습해야 한다는 현실 앞에 서 있습니다. 잔인한 현실입니다.
전문가들은 이렇게 저에게 조언할 겁니다. "이런 경험이 당신을 더 단단하게 만들 거예요."
저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묻고 싶습니다. 단단해져서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말입니다. 슈퍼맨같이 단단한 사람이 돼서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요?
결국, 아직도 사과를 원하는 제 마음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분노와 함께 흔들립니다.
어쩌면 가장 빠른 회복은 이 모든 기억을 지워버리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미래에는 어쩌면 영화 <이터널 선샤인>처럼, 망각 서비스가 실현될 수도 있겠죠. 그때는 이런 집착으로 에너지 소모가 크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