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9.01 인식은 죽음을 이긴다
내 행동들 중에서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가려낼 능력이 없다는 사실은 나를 전율하게 만들어요.
- 안톤 체호프, 『공포』 중에서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나면, 그 뒤를 잇는 『시지프 신화』를 자연스럽게 찾게 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올해 읽은 도서중 단연 최고다. 이방인보다 좋다.
다음은 이 책의 유명한 첫 문장이다.
"진실로 중요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를 판단하는 일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질문에 답하는 일이다."
우리가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듯 삶도 선택해서 얻은 것이 아니다.
단골집을 갈 때 '음식이 맛있다', '분위기가 좋다' 등의 이유로 방문하듯이
이미 태어나버렸지만 이제라도 내 삶을 살기위한 합리적인 이유를 찾아본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삶을 살고 있는가.
무언가를 원하며 살아가는데 그 무언가는 손에 쉽게 닿지 않는다.
손에 닿았다고 느낄 때에도 어김없이 금세 달아난다.
나중엔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잊어버리기 마련이다.
이 시론의 세 번째 주제를 구성하는 치명적 회피는 바로 희망이다. 이는 우리가 거기로 들어갈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는 내세에 대한 희망, 또는 삶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초월하고 삶을 승화시키고 삶에 의미를 주고 결국 삶을 배반하는 모종의 거창한 관념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속임수를 가리킨다.
그래서 우리는 희망을 갖는다.
다 잘될거라는 희망.
이 정도면 남들보다 나은거라는 희망.
신이 날 도울 것이라는 희망.
하지만 뭔가를 간절히 바라다 그 희망이 꺾이면 사람은 좌절에 빠진다.
굴러 떨어지고 있는 돌을 내려다보는 시지프처럼.
이때 카뮈는 대안을 제시한다.
이런 절망적인 세계의 비합리와 인간의 열망, 그리고 그 사이에 발생하는 부조리.
이 순간, 우리는 '부조리 인간'이 된다.
부조리 인간이란 부조리한 인간이 아니라 '이 세상의 부조리를 의식하는 인간'으로 인식하면 좋다.
사람들에게 무엇을 위해 사는지 물으면 저마다의 답이 나온다.
내집마련, 꿈과 이상의 실현,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만남, 편안한 노후, 사후세계에서의 구원 등.
그리고 초월적 존재, 행운, 노력 등을 설정함으로써 목표로 나아가고 있다.
부조리 인간은 이런 '희망'적인 생각을 거부한다.
희망은 도피다. 죽음을 외면하게 해주는 장치이자, 삶을 초월하려는 속임수다.
사람들은 각자의 이유로 삶을 살지만, 결국 모두 죽는다."
"죽음은 동일하게 찾아온다."
그렇다면 왜 부조리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
이쯤에서 진실을 외면하고 희망을 품고 살다 죽는것과
진실을 받아들이고 희망을 품지 않고 사는것이 무슨 차이가 있는지 의문이 든다.
부조리 인간의 진짜 힘은 바로 살면서 지옥에 들어섰을 때이다.
꿈과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거나,
주변인들과의 관계가 단절된다거나 했을때,
즉 목표를 잃었을 때 진실을 알고 있는 부조리 인간은 한없이 강해진다.
시지프 신화에서, 시지프는 돌을 끊임없이 굴리는 형벌을 받는다.
하지만 부조리인간 카뮈의 시선에 시지프는 행복하다.
오늘날의 노동자는 날마다 똑같은 일을 하고 있거니와, 그 운명은 시지프 못지않게 부조리하다. 하지만 그 운명은 단지 의식이 깨어 있는 흔치 않은 순간에만 비극적이다. 신들 가운데 프롤레타리아인 시지프, 무력하면서도 반항적인 시지프는 자신에게 주어진 비참한 조건의 내용을 모두 인식하고 있다. 그가 산정에서 내려오는 동안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 조건이다. 그의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명징한 통찰은 동시에 그의 승리를 완성한다. 도전으로 극복되지 않는 운명이란 없다.
하산은 흔히 고통 속에서 이루어지지만, 지극한 환희 속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다.
아무리 압도적인 진실도 인식을 거치면 힘을 잃는다.
시지프는 돌을 산 꼭대기로 올려도 다시 떨어질 것을 잘 알고 있다.
이 압도적으로 절망적인 진실도 시지프가 자신의 운명을 명철히 인식하고 있다는 데에서 힘을 잃는다.
나는 시지프를 산기슭에 남겨두리라! 우리는 여전히 그의 무거운 짐을 발견한다. 그러나 시지프는 신들을 부정하고 바위를 들어 올리는 고차원적 성실성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 역시 모든 게 잘 되었다고 판단한다. 이제부터 주인 없는 이 우주가 그에게는 황폐하게도 하찮게도 보이지 않는다. 이 돌 부스러기 하나하나, 어둠이 깊은 이 산의 광물적 빛 하나하나가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 산정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를 상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
희망에 가득찬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그 희망을 오래전 인식으로 바꾼 시지프는 다른 것들이 보인다.
돌 부스러기 하나하나, 어둠이 깊은 산의 빛, 돌을 다시 줍기위해 하산하는 그 사유의 시간.
남들이 보기에는 끝없는 지옥이지만 이제 시지프에게는 지옥이 곧 천국이다.
시지프는 반드시 실패하기에 오히려 패배할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제 그 어떤 신도 그를 벌할 수 없다.
죽음조차 그를 무릎꿇게 할 수 없다.
'부조리 인간'은 좌절이 없다.
애초에 이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냉철한 인식을 놓치지 않기 때문이다.
행복은 인식안에 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할 수 있다.
“기쁨에 들뜨지도 말고, 괴로움에 휩쓸리지도 말며, 한결같은 마음으로 모든 존재를 바라보라.”
- 숫타니파타(Sutta Nipat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