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봄 Aug 21. 2022

스피드 스케이트 - 마법의 주문을 찾아서




  핸드폰에서 '드르륵드르륵' 밴드 알람이 울렸다. 글쓰기 밴드 동무님들의 글이다. 어떤 글일지 궁금하지만 몸이 꿈쩍하지 않는다. 난 죽었고 청각만 살아 있는 것 같다. 아니다. 다행히 근육이 하나하나 무겁고, 낮에 넘어졌던 무릎에 통증이 느껴지는 걸 보니 아직 죽지는 않았다.


  불타는 스피드 스케이트 때문이다. 스케이트화를 바꿨다. 당근에 깔끔하고 저렴한 스케이트화가 올라왔다. 오래 지켜봤다. 상태에 비해 저렴하게 나온 그 스케이트화가 혹시 팔리지 않는지, 더불어 나의 실력이 늘고 있는지.


  아는 선생님께 얻은 입문용 보급화를 5년 넘게 신었다. 이제 상처 많은 스케이트화를 벗어도 되는 실력일까?  새 스케이트화를 산다면 지금까지 신던 스케이트화는 버려야 한다. 누가 공짜로 줘도 안 가져갈 만큼 낡았다. 그래도 링크에서 앞으로 나가는 스케이트화를 버리고 새(?) 중고 스케이트화를 꼭 사야 할까? 지구에게 스케이트화 쓰레기를 하나 더 얹어도 될까? 장비를 바꾸는 게 보잘것없는 나의 스케이트 실력을 향상시키는데 도움이 될까?


  질문들은 내가 답해주길 기다리며 계속 태어났다. 당근에 올라온 스케이트화도 전문가용에 비하면 저렴이 보급화 수준이지만 소란스러운 질문들 때문에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새 스케이트화는 그동안 신던 것보다 발목이 높다. 발목을 잡아 고정해 주니 스케이트 날을 얼음판에 더 곧게 세울 수 있고, 전보다 편하게 체중을 실을 수 있다. 신기하게도 스케이트화를 바꿨더니 잘 안 되던 반항아리도 탈 수 있게 되었다. 한쪽 발은 직선으로 가고 나머지 발은 반원을 그리며 앞으로 나가는 주법이다. 전에는 어디 고장 난 사람처럼 찌그러진 항아리 모양을 그리며 덜컹덜컹 앞으로 나갔다.

"이번엔 반항아리 해봅시다."

선생님 그 말은 제발 하지 말아 주세요.


  반항아리 성공의 기세를 몰아 일요일에 동네 링크보다 좀 더 큰 의정부 아이스링크로 출동했다. 4시간 동안 반항아리 굳히기 맹훈련에 돌입했다. 중간중간 타다 쉬다 했지만, 저녁까지 먹고 집에 돌아오니 몸뚱이가 젖은 솜이불이 됐다. 침대에 누워 손가락 하나 꿈쩍할 수 없었다.


  체력과 정신을 회복하고 나니 눈앞에 딱 한 계단이 더 보인다. 딱 한 계단이라고 하기엔... 몇 년째 그 앞에서 빌빌대고 있는 대왕 계단이다. 코너를 돌 때 오른발을 들어 왼쪽으로 넘기는 코너 크로스. 그냥 넘기면 된다는데, 어린아이들은 발딱발딱 잘만 넘기던데, 나는 죽을 만큼 겁난다.


  지난겨울에 레슨을 받으면서 코너 크로스에 성공했었지만, 6개월 만에 다시 타보니 깔끔하게 원점으로 돌아왔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크로스를 할 만큼 익숙해져야 했는데 '겨우 성공' 단계에서 레슨을 중단했다. 그러니 이제 생전 크로스는 해 본 적 없는 것처럼 새롭다.


  남편은 코너 크로스에 지나치게 공포를 느끼는 나에게 정신과 상담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한다. 정신과 상담 수준이 아니다. 최면, 주술, 요술, 마법 같은 힘이 필요하다. 


  맨몸으로 11미터 막타워에 올라선 것처럼 오른발을 들어 왼쪽으로 옮기는 게 엄청난 공포다. 넘어지는 것이 아프고 무서운 게 아니다. 낮은 속도와 자세에서 넘어지는 건 생각처럼 많이 아프지 않았다. 넘어져도 죽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얼음 위에서 오른발을 들어 넘기는 건 근원을 알 수 없는 공포다. 마음속에서 무서워 날뛰는 미친 소를 어떤 말로 달래야 공포에서 헤어 나올 수 있을까.


'길을 잃어버릴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그녀는 항상 길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나탈리 골드버그



  고민하던 중에 책에서 나와 비슷한 사람을 딱 마주쳤다.

"반갑습니다. 제 소개를 할게요. 크로스를 하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항상 크로스를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화자의 소망을 담아 문장을 긍정형으로 바꿨다.

"저로 말씀드리면, 크로스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설렘 때문에 항상 크로스를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마음속 두려움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혹은 아무 방법으로 달래고, 어르고, 뒤집고, 메쳐서 궁극의 코너 크로스에 도달하겠다. 언젠가.


  이번 주 주문은 이걸로 정했다.


난 지금 상당히 진지하다고 필체가 말해준다.



매거진의 이전글 스피드 스케이트를 잘 타지 못합니다(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