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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숙 May 07. 2021

한자를 쓰는 시간

읽지 못하는 사람들과 불친절한 도시

    한자 3급 시험을 치른지 2주가 지났다. 휴학을 한 뒤에 결심했던 나름 큰 목표 중 하나였던 터라 조금은 호들갑스러울 수 있지만 과정과 결과 모두에서 느꼈던 것들을 한 바닥에 정리하고 싶었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곳은 옛날에는 가리봉동으로 불리던 가산디지털단지이다. 사실 가리봉동이 ‘가산디지털단지’라는 세련되지만 어딘가 날카로운 구석이 있는 회색빛 이름으로 개명되었다는 것을 안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고등학교 문학 문제집을 뒤적거리며 문항 작업을 하고 있는데, <비오는 날이면 가리봉동에 가야한다>를 읽고 근무한지 3개월이 다 되어서야 지명의 역사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찌어찌 가리봉동에 대한 묘한 호기심을 갖게 되었는데, 알다시피 구로구라는 곳이 여러 가지 정체성이 공존하는 곳이지 않나. 출퇴근 길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길거리에 보이는 한자 간판들이 새삼스레 보이기 시작했다. 골목 곳곳에 있는 중국식품가게들, 우뚝우뚝 열 맞춰 각지게 서있는 건물들 틈에 보이는 월세 15만원짜리 단칸방들. 그리고 읽지 못해서 어떤 곳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여타 상점들과 공장들까지. 같은 공간에 있지만 다른 외모의 건물과 간판들로 은근히 서로를 이방인 취급하는 이곳을 더 알고 싶어졌다.


그나마 읽을 줄 아는 게 中國食品이어서 그렇지,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환전소도 제대로 못 읽었더라 (사진 출처: 365노가리 네이버 블로그)


    그 첫 단계가 ‘간판 읽기’였다. 생각해보면 참 재미있는 게, 길거리를 나가면 웬만한 한글과 영어는 다 읽을 수 있고 심지어는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는 자존심 때문인진 몰라도 모르는 영단어는 찾으면서까지 읽으려 하면서 한자를 못 읽는 것은 너무나도 익숙하다. 그게 너무 당연해 진 탓인지 한자 간판이 나오면 읽으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고 휙휙 지나치고 있더라. 전공 공부를 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서양 윤리를 공부할 때에는 영어 원서를 잘도 찾아 읽고 심지어 수려하게 번역된 한글판도 문체가 조금이라도 난해하면 번역을 욕하면서 동양 윤리 공부할 때는 기본적인 용어조차 읽고 쓸 줄 몰랐다. 교수님도 참 어이없었을 것 같다. 동양윤리를 공부하러 온 학생들이 한자를 한 글자도 읽지 못한다는 게. 한자를 영어만큼 가르치지 않는 교육의 구조적인 문제도 존재하겠지만 ‘저는 한자를 할 줄 모르고, 공부할 생각도 없으니 한글을 같이 써주세요!’ 라고 먹이를 먹여주길 바라는 아기새마냥 입을 쩍쩍 벌리고 받아먹는 게 문득 부끄러웠다. 그렇게 한자 공부를 해야겠다는 나름의 동기를 갖고 공부를 시작했다.


7급부터 몇 주 정도 기간을 잡고 4급까지 순차적으로 암기했다. 상공회의소 3급 시험은 4급까지가 90%고 3급은 10%만 출제되기 때문에 3급 한자는 100자 정도만 외웠다.

    공부하는 과정은 특별하다고 할 게 딱히 없었다. 회사에서 틈틈이, 그리고 자기 전에 고전적인 방식 그대로 외우고 쓰고 읽고의 반복이었다. 그래도 그 시간이 하루 중 꽤나 기다려졌는데, 처음에는 외워야지 생각하다가도 쓰고 있으면 외워야겠다는 일종의 의지나 집념이 다 물러가고 글씨를 쓰는 행위만 남아서, 그 몰두하는 텅 빈 시간이 고결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정갈한 글씨체를 키보드가 대체할지라도 무엇인가를 물리적으로 '쓰는' 행위는 저물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한자 공부를 해서 뭐가 가장 나아졌냐 하면 보통 어휘력에 대해 묻는데, 어휘력이 좋아졌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말해서 잘 모르겠다. 단어의 생성 과정 하나하나를 알아보고… 등등 뭔가 화려하고 거창한 학문적 진리를 깨달은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언어를 배우는 감각을,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글자를 읽을 수 있게 됨으로써 얻는 해방감과 뿌듯함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던 것 같다. 그래서 나에게는 너무나도 생소한 이 '읽지 못하고 쓰지 못하는 감각', 그리하여 한 자 한 자 깨우쳐 나갔던 과정이 정말 소중하다. 아직까지도 한글과 영어 간판이 그저 별천지일 비문해자들을 위해. Baskin Robbins를 배스킨 라빈스라고 읽지 못하는 사람들의 여전한 존재를 기억하기 위해서. 한자를 공부하는 시간은 의외로 문해력에 대해, 문맹과 읽지 못하는 자들에 대한 쓰라린 이해로 마무리 지어졌다. 나에게는 비문해가 싫어서 시작한 사치스런 공부지만 누구에게는 생존의 문해력일 수도 있었다. 나는 얼마나 사치스러운 삶을 살고 있나.


    매번 시험이 끝나면 시험지나 수험표 한 장으로 그 과정을 납작하게 찍어 내리는 게 아까워서 내가 원해서 본 이번 시험은 조금 더 입체적으로 경험을 남기고 싶었다. 결과적으로는 꽤나 그럴듯하게 마무리된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죽을 때까지 깨작깨작이라도 이렇게 ‘알기 위한’ 공부를 하면서 살고 싶다. 근데 역설적이게도 한자 공부에 대한 동기를 새겨주었던 가리봉동을 생각하면 이 윤택하고 고상한 감각의 되새김질이 얼마나 양심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직도 동네 사거리보다는 외국인으로 북적대는 인사동과 삼청동에 한글 간판이 더 많다. 아메리카노 말고 커피를 달라는 ‘읽지 못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여전히 골칫거리이다. 이 땅에 노인을 위한 나라는 사라진지 오래니.


    어쩌면 이번 일을 계기로 공부를 하는, 그리고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를 한 가지 더 얻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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