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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땡땡책협동조합 Nov 21. 2017

우리는 흐르는 자세를 지닌다

1. 감수성의 영역   

나는 한국 현대시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감수성이라고 생각한다. 감수성을 고민하고 감수성을 그려내는 일이 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아닐 게다. 감수성이란 본디 ‘사회적인 것’이다. 어떤 개별적 감수성이 이해받기 위해서는 시대적 감수성이라는 범주가 필요하다. 그런데 시를 읽을 때 감수성이 발현되는 방식은, 마치 한 개인에게서 다른 한 개인에게로 전해지는 사적 교환행위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여기서 시인의 역할은 그저 자신만의 고유한 직조 방식과 언어를 통해 이 감수성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일 뿐인 걸까.


  내가 보기에 이런 식의 얘기는 별로 도움이 안 된다. 심상(心象)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시라는 형식은 저마다의 세계를 그려내기 위한 화폭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화자는 그림을 그리고, 우리는 화자가 그린 그림을 바라보는 한 명의 관객이다. 그 화자가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 그 그림이 어떤 말을 하는지, 그리고 그 말의 (무)의미를 통해 화자가 하고 싶은 게 대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게 관객의 역할이겠지. 그런데 이 같은 관객은 결국 수능 언어영역을 푸는 수험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내가 보기에 우리가 시를 읽기 위한 가장 첫 걸음은, 언어영역 문제를 풀고 나서도 끝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어떤 ‘해명 불가능한 심상’을 발견할 때다. 그러니까 꽉 채워진 화폭을 본 뒤, 집에 돌아와서 자신 앞에 남겨진 미심쩍은 텅 빈 화폭을 발견하게 되는 일, 그게 시와 시인의 역할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여기서 감수성의 역할은, 우리를 텅 빈 화폭으로 조금 천천히, 개별적인 방법으로 안내하는 ‘휘발성 강한’ 반촉매와 유사할 것이고. 


  그러므로 흔히 일컫는 폭발적 감수성이란, 오히려 그 시인이나 시가 가진 폭발의 범위와는 무관해 보인다. 감수성이 곧 시일 수는 없고, 동시에 시는 감수성만을 전해 주기 위한 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왜 이런 말을 하느냐면, 나 자신이 바로 이러한 생각 속에서 시를 쓰고 있고, 또 이와 엇비슷한 생각에서 시를 쓰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태운의 시는 정확히 이 점에서 나를 좌절하게 만들었다. 그의 시는 내가 가닿으려고 했던 어느 지점을 이미 서성이고 있었고, 그래서 나는 약간 무력해졌다(물론 이 무력함은 익숙하다. 그런 이들은 제법 많으니까).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여전히 나의 무력함과, 그 무력함을 통해 채워질 미래의 빈 화폭들이 있을 것이므로.           


2. 이동과 지속여기에서 저기로     


자재는 운반을 필요로 한다. 자재가 운반되고 있다. 노동력으로. 여기서 저기로 필요가 불어나고 있다. 자전거가 도로 밑으로 돌진한다. 도로 위로 가스가 새고 있다. 그와는 별개로 운반은 반복되고 있다. (…) 강이 가능하지 않게 된다. 자재로 자재의 원천을 깨뜨린다. 묘사할 수 없게 되었다.      

_ 「자재로」     


개를 의식한다,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그러자 개들이 불어났다. 앞발을 든다. 몸을 흔들어 보인다. 짖는다. (…) 나는 그 개 옆에 없었다. 들었다, 눈앞에 없는 개를. 그리고 나는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 어떤 개는 주인이 없었다. 없는 주인에게 달려 나갔다.     

_ 「없는 개를」     


근대 이후 우리에게 가장 귀찮은 문제는 주체였다. 누군가는 더 크고 많은 주체를 위해 애썼고, 다른 누군가는 주체를 빗금치고 지워버리기 위해 애썼다. 그래서인지 아무도 없는 의자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내가 보기에 아직 우리는 근대인이며, 탈근대적 사유의 지평을 통해서는 주체 그 자신을 조각냈을 뿐, 그 주체의 자리-의자를 치워버리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자는 이제 사건의 자리, 즉 실재(The Real)가 출몰하는 존재론적 구멍이 되었다. 


   안태운의 시는 이 구멍과 저 구멍 사이를 이동하고, 일부러 거기에 빠지기도 하며, 그 속에 아무도 없음을 굳이 반복해서 알려주기도 한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게 일종의 흐름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동, 정지, 확인, 다시 이동, 정지…. 여기에는 어떤 감수성도 쉽게 포착되지 않지만, 이 흐름을 통해 차이/균열이 발생하고 그 차이의 반복을 통해 감수성이라고 할 만한 이상한 효과가 포획된다. 


나는 가 버렸구나. 가 버린다. 그리고 이곳으로 입국한다. 공항에 도착해 있었다. 낯선 인파가 보인다. 누군가를 바라보는 듯하다. (…) 지나치는구나. 무수한 얼굴이 되어서. 마중하는 사람들 사이로. 그러나 한 사람이 서 있었고 그 역시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그는 거울을 높이 든다. (…) 나는 그를 쫓아가고 있다. 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가고 없구나. 얼굴로부터. 거리로부터. 건너편에서 그림자가 무너진다. 나는 그를 붙잡게 된다. 그가 뒤를 돌아본다. 나는 그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 앞에서 말을 하고 있었다. 계속 묻고 있었다. 그의 전신에 입김이 서려 있었다.      

_ 「입국」     


  「입국」에서 ‘나’는 어디론가 “가 버리고” 곧바로 이곳으로 “입국한다.” 그리고 입국장에서 무수히 많은 얼굴들이 무엇을 들고 있는 것을 보다가, 한 사람이 들고 있는 거울을 본다. (그는 더 이상 아무도 나오지 않자 거울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그것을 깨트리고, 버린다.) ‘나’는 그를 쫓아가 붙잡아서 “말을 걸고” “계속 묻는다.” 이 과정은 마치 뫼비우스의 띠 위에서 일어나는 계주를 보는 것 같다. 나는 저기에서 여기로 왔고, 그는 여기에서 저기로 간다. 나는 그를 붙잡는다. 묻는다. 그가 깨트린 거울 속에는 아마도 내가 있었을 것이고, 나는 “가고 있”지만 사실은 이미 “가고 없”다. 강물처럼.      

 

바실리 칸딘스키, <까마귀Les Corbeaux>, 1907


3. 흐르는 말들       

이런 흔한 물음을 던져볼 수 있겠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면서) 실제로 원하고 있는 건 뭐지?(Che vuoi?)” 안태운의 시는 이 같은 물음에 대답하지는 않지만, 물음이 작동하는 층위가 어디인지, 그곳에서는 보통 어떤 일이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는지를 되묻는다. 애초에 저 물음을 던진 라캉의 경우처럼, 중요한 것은 대답이 아니다. 자신의 욕망의 출처를 아는 것, 거기서부터 우리는 욕망-환상이라는 유리벽을 발견하고, 유리벽 안의 자신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상한 지점이 있다. 욕망의 그래프를 통해 주체가 분열된 자신의 형상을 발견한다는 고전적인 테제 대신, 안태운의 시는 문자 그대로 현실 세계를 언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고, 정확히 그 지점에서 현실의 세계가 ‘실제로’ 작동한다. 이는 우리가 아는 세계의 작동 방식과는 판이하다. 무릇 세계란 우리의 욕망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큰 타자의 형상으로 굴러갈 뿐이고, 우리는 그 거대한 흐름 안에서만 ‘욕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태운의 시에서 “퍼진다”와 “퍼지고 있다”는 전혀 다른 말이 된다. 언제나 “퍼진다”라는 화자의 욕망이 우선하고, “퍼지고 있다”는 현상이 후에 찾아온다. 퍼진다는 욕망으로 세계는 (실제로) 퍼지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화자는 정신분석적 주체와 같이 단순히 분열된 형상으로 세계-속에-내던져져 있지 않다. 화자는 주체와 주체 사이를, 대상과 대상 사이를 다만 흐르고 있다. 모든 빛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그 주변을 천천히 회전하며 마지막 흐름을 견디는 욕망의 별처럼. 


(…) 거기 있습니까. 안개가 퍼져 가고 있다. 시간이 흐르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다리지 않는 동안에도 시간을 흘러갈 것이었고 어느덧 그 둘은 지붕을 바라보고 있었다. 올라가려 한다. 두 사람은 기어오르고 있다. 기둥에 달라붙어서 그것을 토대로 올라간다. 지붕에 다다르고 있다. 이것을 해체할 겁니다. (…) 그들은 그것에 한쪽 귀를 대 보고 있었다. 기둥 하나로 잇닿아 있다. 나란히 있다. 그러면 기둥은 들립니까. 울리고 있습니다. 울리는 것은 울리는 대로 지나간다. 흐르는 것은 흐르는 채로 사라진다. 서로 맞이하고 있었다. 우리의 귀는 기둥의 양쪽 귀가 되는 것 같습니다. 기둥이 우리를 듣는다. 우리는 들리고 있다. 서로 흐르고 있었다. 우리는 흐르는 자세를 지닌다.      

_ 「우리는 흐르는 자세를」     


  내가 아는 어떤 시인은 시에 있어서 (사물을 바라보는) 태도가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만약 안태운의 시에서 태도를 찾는다면 그건 흐르는 자세일 것이다. 요컨대 위의 시에서 “기둥이 우리를 듣는다”와 “우리는 들리고 있다”는 말은 동어반복이 아니라 괄호 쳐진 흐름을 함축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 이런 흐름이 차이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우리는” 그 차이를 거부하거나 변형시키지 않고 그 차이의 지평 위로 흐르기를 욕망한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흐르는 자세를 지니”게 된다.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이 우리를 응시하는 것처럼.


  알겠지만, 그 흐름이 결국 어디로 갈지, 그게 올바른 건지는 관객이 판단할 영역이다. (안태운의, 그리고 대개의) 시는 상황과 사태를 이리저리 판단하고 결정짓지 않으니까. 굳이 따지자면 안태운은 초현실주의 사진작가와 유사하겠지만, 그의 작업들-사진이 우리에게 다큐멘터리로 ‘느껴지게’ 되는 것 또한 부정할 수는 없어 보인다.      


윤정기 "비평 연습: 계속해서 읽고 쓰기 위한"


한때 비평가가 되기를 원했던 적이 있습니다. 학창시절에 독후감을 쓰고 칭찬을 받은 기억이 많거든요. 대학생이 되어서는 비평가들의 평론집을 자주 읽었는데, 그들의 글을 읽고 나면 그 작품을 손쉽게, 새롭게 볼 수 있거나, 몰랐던 작품을 보고 싶다는 욕망이 생겨서 좋았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비평가들이 문단권력과 병폐를 재생산하는 모습들을 접했습니다. 그때 저는 비평가-되기를 스스로 거부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비평은 근본적으로 사건 이후에 존재합니다. 여기서 비평은 독자를 위한 것일까요, 아니면 작가를 위한 것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비평가 스스로를 위한 것일까요. 어쩌면 비평가들은 동시에 작가가 되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사건과 그 이후를 예견하고 분석하기 위해서는 사건의 주체가 되어야 하거든요. 물론 비평 또한 하나의 창작물(사건)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그보다 필요한 건 문단이나 인문학계에서 비평의 의미를 재정의하는 작업이 아닐까 싶네요. 비평은 여전히, 하나의 사건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런 고민을 곁에 남겨두고, 시작합니다. 비평 연습.



감은 눈이 내 얼굴을 / 안태운 시집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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