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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땡땡책협동조합 Oct 19. 2017

나는 모르는 것이 많아서 꿈을 꾸었지

정현주 시집『수상 소감』

0.      

얼마 전 꿈을 꿨다. 오랫동안 보지 않은 막내 삼촌이 나왔다. 그는 내게 양복 한 벌을 건넸다. 갑자기 본인 대신 누군가의 장례식장에 가달라 했다. 이후의 꿈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막내 삼촌 대신 어딘지 모를 장례식장에 갔는지, 아니면 무슨 헛소리냐고 답했는지 말이다. 나는 그 꿈이 좋은 꿈인지 나쁜 꿈인지는 모르겠다. 꿈은 말해주지 않고, 다만 언제나 잊히기를 바라는 것 같다. 그래서 꿈에게는 입이 없다. 소문만 있다.      

     

1. 꿈의 말     

출처 : 문학과죄송사 페이스북

정현주의 시집 『수상 소감』(문학과죄송사)은 올해 3월에 초판을 펴냈다. 이 시집이 얼마나 팔렸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ISBN이 없으니까 정확히는 출판물이라고 할 수 없는 이 시집을 누군가는 샀을 것이다. 그리고 읽었겠지. 정현주를 전혀 모르는 사람은 안 읽었겠지. 혹은 알지만 시집은 안 사고 싶었을 수도 있다. 내가 정현주의 시집이 얼마나 팔렸는지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정현주를 모른다. 정현주는 아마 내가 자신을 모른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이 세상의 모든 이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어쩌면 누군가 나를 알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정현주를 모른다는 말은 기실 정확한 말이 아니다. 거짓말이지. 어쩌면 나는 정현주를 알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수상 소감』은 내가 최근에 읽은 최고의 시집은 아니다. 애초에 최고의 시집 같은 것일 리가 없다. 나는 요즘 어떤 시집도 최고의 마음으로 읽지 못한다. 그런데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이 시집을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마음이 꼭 최고일 필요는 없으니까,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게 이 시집의 마음이기도 한 것 같다. 「수상 소감」이라는 시에서 정현주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좋았던 일들을 기억해내는 것은 행복한 미래를 떠올릴 수 있는 사람만이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만 이런식의 수상소감을 발표할 날이 언제 올지 몰라 여기에 씁니다. 우리 무조건 행복합시다.      


  정현주는 분명 괴로운 사람임에 틀림없다. 작가 소개에서 밝히고 있듯, “개인에게 행복의 총량이라는 게 정해져 있다면 나는 바닥까지 싹싹 긁어 물로 헹구어 마신 게 아닐까 자책”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때로 어떤 시는 불행한 사람의 마지막 유언일 수 있고, 우리는 모든 유언을 천천히 읽는다. 천천히 읽으면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죽어버려서, 왜 죽어버렸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래야 하니까. 그것은 수상 소감을 말하는 것처럼 쓴 유언이라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양치하다가 정말로 혼자구나 생각이 들었다 너무 외로워서 무섭다 자꾸 카드사 안내멘트를 듣고 쓸데없는 말을 한다 너에게 했던 모든 기대가 부끄럽다


_ 「그냥」 전문


영화 <꿈의 제인> 스틸컷


어제도 불행했는데 오늘도 불행하고 내일도 불행할 것이 뻔한 삶. 그래서 “무조건 행복”해야 하는데 “너무 외로워서 무서운” 날들. 나는 「수상 소감」의 말들이 꿈의 말이라고 생각한다. 모두 꿈이 가진 말들이다. 꿈은 분명 하나의 주체로서 말을 한다. 프로이트는 그걸 조금 다른 단어로 불렀지만, 나는 그걸 꿈의 말이라고 불러보기로 한다. 꿈이 말을 한다는 사실은 마치 해몽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들리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꿈의 말은 그냥 아무말 대잔치에 가깝다. 위의 「그냥」 같은 짧은 시도 그렇다. 


정현주가 죽었다. 누군가의 아메바 누군가의 엑서 누군가의 친구 누군가의 원수 누군가의 거짓말쟁이 누군가의 과거 누군가의 악몽이 죽었다.     


_ 「추모사」 中


  “나는 생각한다”라고 말할 때, 거기에는 일종의 메타가 있다. ‘생각하는 나’를 보는 내가 있다. 그러므로 이 말은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을 생각한다”라고 해야 좀 더 정확하다. 이 말을 “나는 꿈꾼다”라고 바꾸면 “나는 내가 꿈꾸는 것을 꿈꾼다”라고 할 수도 있겠지—우리는 우리가 꿈꾸고 있다는 것을 언제나-항상 알면서 꿈꾼다. 그러지 않는다면, 우리는 꿈을 꾼다는 사실을 영원히 알 수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이 같은 반복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왜 여기서 ‘나’는 자꾸만 반복되고, 생각하거나/꿈꾸는 것을 바라보는 하나의 레이어가 더 생기는 걸까.  

 「추모사」에서 정현주는 죽는다. 반복해서 죽는다. 그러니까 정현주는 시 속에서 계속해서 죽은 것이다. 시를 쓰면서 자꾸만 죽는다. 시가 정현주를 죽이고 썼을 수도 있다. 여기서 3인칭화 되어가는 정현주는 사실 1인칭(정현주) 안에 있다. 또 하나의 레이어를 통해 정현주는 정현주의 죽음을 바라본다. ‘정현주의 악몽’이기도 했을 정현주의 죽음을.     


정현주의 마지막 소원은 장례식을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다. 삼삼오오 모여 자신의 얘기를 하는 것이 끔찍하다고. 그 속내는 죽어서 밝혀질 자신의 거짓말이 두려워서다.      


_ 「추모사」 中


 얼마 전 꿨던 내 꿈을 생각한다. 왜 막내 삼촌은 하필 장례식장에 대신 참석하기를 부탁했을까. 왜 어떤 이의 죽음 앞에서 솔직하지 못했을까. 어쩌면 그게 자신의 장례식은 아니었을까. 인간은 왜 자신의 죽음 앞에서 늘 솔직하지 못할까.      


2. 말의 꿈    

  저는 태어날 때부터 진실하지 않았어요.
 제 입에서 처음 나온 말은 거짓말이었습니다. 


  영화 「꿈의 제인」(2016)의 마지막 장면에서 제인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영화의 첫머리에서, 이 말은 소현의 목소리로 반복된다. 실제로 제인의 삶은 거짓말투성이다. 사랑받기 위해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거짓이 되는 세계. 이성애자가 아닌 트랜스젠더의 삶이 거짓이 되는 세계. 영화는 소현의 말(편지)을 통해 처음부터 끝까지 흘러가지만 그 ‘한없이 거짓에 가까운’ 말들은 차라리 죽은 이들(제인, 지수)을 향한 추모사처럼 들린다. 

  영화는 두 개의 레이어를 가진다. 소현이 ‘믿는’ 꿈이 끝나면, 거기서부터 현실이 시작된다. 어쨌든 여기에서도 우리는 메타를 발견한다. 꿈과—꿈꾸는 것을 바라보는 꿈같은—현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계속되는 불행 속에 노출된 영화 속 인물들에게 영화는 그 레이어를 인식할 수 있는 기회를 쉽사리 제공하지 않는다. 유일하게 제인만이 그것을 알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물론 제인에게 그 메타성을 인식하고, 때로 무시하는 일은 태어난 이후로 지속되는 ‘진실하지 않음’의 다른 명칭일 뿐이지만. 


  반면 소현은 “죽어서 밝혀질 자신의 거짓말”(「추모사」)을 두려워한다. 「꿈의 제인」은 내게 제인과 소현이 두 번씩 반복하는 말들의 꿈처럼 느껴지는 영화다. 당연하게도 말의 꿈 또한 거짓이다. 마치 「메종 드 히미코」(2005)가 희망적으로 그렸지만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마이너리티의 공동체나, 「라이프 오브 파이」(2012)가 환상적으로 은유한 처절한 생존의 서사처럼 말이다. 앞서 「수상 소감」에서 정현주가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려볼 수 있을 것 같다. 정말로 “좋았던 일들을 기억해내는 것은 행복한 미래를 떠올릴 수 있는 사람만이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기억에 대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닐까. 감당할 수 없어서. 나는 살면서 수없이 거짓말을 했다. 그게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돌이켜보면, 대부분 별것 아닌 일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미래의 나를 위해 그랬다. 미래의 내가 행복했으면 해서.      


3. 나는 모르는 것이 많아서     


정당하게 싫어하고 합리적으로 좋아하고 편리하게 생각하고 싶다 언제나 거울을 보면 견딜 수 없이 끔찍한 내가 있다 잠에서 깨면 혼자 누워있는데 꿈은 늘 둘이다 절대로 지나간 사람만 부득부득 나온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정말 사실이라면 그다음부터는 어떻게 해야 할까    

 

_ 「7월의 파랑」 中     


  나처럼 거짓말의 기억을 쌓아 온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중요한 건 거짓말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박쥐는 동굴에서 잠만 자는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먹이를 찾아 800킬로미터까지 난다든지, “계피와 시나몬은 엄연히 다른 종류였다는 것 홍합이라고 알고 있던 것은 폐타이어에서 양식하는 지중해 담치라는 것(「음파」)”, 내가 모른다고 했던 사람이 실은 내가 아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정당하게 싫어하고 합리적으로 좋아하고 편리하게 생각하는(「7월의 파랑」)” 게 거짓일 수도 있다는 것.


  그렇게 우리는 모르는 것이 많아서 꿈을 꾼다. 꿈은 말을 하고, 우리는 꿈에서 깨어나 그 말을 기억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 기억되고 조각난 말들은 다시 꿈을 꾸기 위한 재료가 된다. 우리는 거짓말을 하기 위해서 태어났다. 거짓말쟁이인 우리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불행해지지 않는 일이다. 아니, 제인이 말한 것처럼 가끔 행복해지기 위해 불행한 살아 있음을 지속해내는 일이다.


  어쩌면 우리는 늘 거짓 같은 자신의 진실한 결말을 준비해야 하는 족속인지도 모르겠다. 예컨대 “정현주의 마지막 소원은 장례식을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으니까. 한편 나의 막내 삼촌은 아직 살아 있다. 하지만 언젠가 죽겠지. 나는 어릴 때 막내 삼촌이 가장 똑똑한 사람 중의 하나라고 여겼다. 내가 어른이 된 후의 그는 그렇지 않았지만. 그는 어떻게 자신의 결말을 준비할까. 당신은 어떨까.      


  힌트를 주자면, 정현주의 「결말」은 이렇다.     


    각자의 불행을 아름답게 내리꽂자

    너를 사랑해.     



윤정기 "비평 연습: 계속해서 읽고 쓰기 위한"


한때 비평가가 되기를 원했던 적이 있습니다. 학창시절에 독후감을 쓰고 칭찬을 받은 기억이 많거든요. 대학생이 되어서는 비평가들의 평론집을 자주 읽었는데, 그들의 글을 읽고 나면 그 작품을 손쉽게, 새롭게 볼 수 있거나, 몰랐던 작품을 보고 싶다는 욕망이 생겨서 좋았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비평가들이 문단권력과 병폐를 재생산하는 모습들을 접했습니다. 그때 저는 비평가-되기를 스스로 거부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비평은 근본적으로 사건 이후에 존재합니다. 여기서 비평은 독자를 위한 것일까요, 아니면 작가를 위한 것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비평가 스스로를 위한 것일까요. 어쩌면 비평가들은 동시에 작가가 되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사건과 그 이후를 예견하고 분석하기 위해서는 사건의 주체가 되어야 하거든요. 물론 비평 또한 하나의 창작물(사건)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그보다 필요한 건 문단이나 인문학계에서 비평의 의미를 재정의하는 작업이 아닐까 싶네요. 비평은 여전히, 하나의 사건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런 고민을 곁에 남겨두고, 시작합니다. 비평 연습.



 

출처 : 문학과죄송사 페이스북

수상 소감 (2017)

정현주 시집 | 문학과죄송사




















영화

꿈의 제인 (2017)

감독 조현훈 | 출연 이민지, 이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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