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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땡땡책협동조합 Mar 29. 2018

10년의 시간, 그래도 괜찮아요?

책 《사랑의 조건을 묻다》와 드라마 <떨리는 가슴>

누구에게나 요즘 말로 ‘최애(最愛 : 최고로 좋아하는)’ 리스트가 있다. 솔직히 나는 드라마를 많이 보는 편은 아니다. 영화일을 하던 때, 페이를 좀 더 많이 받는 드라마 현장에서 일하는 동료들을 보면서 너무 열악한 노동조건을 많이 봤기 때문이였다. 그러나 그런 나에게도 ‘최애’ 드라마가 있으니 MBC에서 2005년에 방영되었던 <떨리는 가슴>이다.  



@MBC 누리집


이 드라마는 [사랑, 기쁨, 슬픔, 바람, 외출, 행복]이라는 6개의 감정을 키워드로 해서 6명의 작가와 6명의 연출자가 팀별로 만든 옴니버스 드라마다. 김창완(아빠) - 배종옥(엄마) - 배두나(이모) - 고아성(보미/딸) 가족을 중심 인물로 설정해놓고 각자 구성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기획은 박성수 PD(<햇빛 속으로>, <네 멋대로 해라>)가 맡았고, 이경희 작가(<미안하다 사랑한다>, <상두야 학교가자>), 김진만 PD(<위풍당당 그녀>, <아일랜드>) 등 당시 MBC 드라마를 맡고 있던 쟁쟁한 제작진이 참여했다. 나에게는 인정옥 작가(<네 멋대로 해라>, <아일랜드>)의 마지막 드라마 작품으로 더 자리잡아 있다.      


‘기쁨’을 주제로 한 2탄은 여성성을 이해받지 못 했던 남동생 창호(이자 혜정/하리수 분)가 그리워했던 가족에게 등장하면서 생기는 에피소드를 다뤘다. 창완은 오랫만에 만난 (남자면서 여자처럼 꾸미고 나온) 창호에게 “너 아직도 그러고 다니냐?”라고 첫 마디를 던진다. 어렵게 입을 뗀 혜정은 오빠에게 말한다.      


“나, 수술했어...”

“근데도 집에도 연락을 안 해? 어디가 아팠는데.”

“... 성전환 수술... 나, 이제 여자야.”


혜정을 받아들일 수 없는 창완은 분노하고, 창완과 혜정의 대화를 목격한 종옥은 창완이 바람피고 있다고 오해한다. 이 와중에 후배 남수(신성우 분)는 혜정에게 반해 창완에게 소개시켜달라고 졸라대니 미칠 노릇! 종옥의 이야기를 들은 두나가 형부와 바람피는 여자와 담판을 짓겠다며 혜정에게 전화를 걸고, 그리하여 종옥과 두나는 혜정이 예전의 창호임을 알게 된다. 혜정은 두나의 헬스장에 트레이너로 취직하며 행복한 매일을 보내지만, 성전환 사실을 알게 된 관장이 혜정을 내쫓으면서 이야기는 반전을 겪는다. 



종옥은 남편의 외도로 오해했지만 나중에 시동생인 혜정임을 알게 된다 @드라마 영상 갈무리


이 에피소드의 대본은 주로 사극(<다모>, <주몽>, <야차>, <계백>, <징비록>)을 다뤄왔던 정형수 작가가 집필했는데, 기존 색깔과는 다르면서 짜임새 있는 이야기 구성이 극을 살린다. 창완이 외도하는 것으로 오해한 종옥의 독백과, 혜정으로 나타난 창호 때문에 괴로운 창완의 독백이 거실에서 어우러지는 장면은, 각자 다른 원인이지만 독백들이 맞아 들어가면서 웃픈 감정을 동시에 안겨준다.      


이 드라마를 최근에 다시 보면서 주목했던 부분은 성소수자들이 흔히 겪는 고민과 힘든 경험들을 섬세하면서도 은유적으로 잘 그렸다는 점이다. ‘내가 그때 너를 때려서라도 다 잡았으면, 너 이렇게 되진 않았어’라는 창완의 독백(이 대사는 후에 친구를 때린 보미에게 ‘여자답게 살아라’며 창완이 회초리질을 할 때 혜정이 막아나서는 장면에서 반복된다)이나, 가족에게 이끌려 신경정신과를 찾아가고, 자신의 정체성에 고민하는 장면들은 예전보다 성소수자의 삶을 알게 된 후인 지금, 훨씬 먹먹하게 다가왔다.      


요즘은 덜 하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영상 매체(드라마/영화/CF)에서의 성소수자는 희화화 되어 있기 마련이였다. 배우 홍석천도 그런 역할만 많이 들어와서 작품을 쉽게 택할 수 없다는 점을 인터뷰에서 토로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트랜스젠더의 삶을 그려냈으며, 이들이 차별받지 않고 한 사람으로서 존중받아야 한다는 메세지를 잘 담아냈다.


방송가에서는 연이은 트랜스젠더와 동성애 캐릭터의 드라마 등장에 대해 그만큼 우리사회가 다양성을 소화할 수 있는 성숙도를 갖춰나가고 있다고 평가하며 앞으로 트랜스젠더, 동성연애자뿐만 아니라 외국인 노동자 등 다양한 사회소외계층이 드라마에 등장해 자연스럽게 편견과 오해를 무너뜨릴 수 있는 순기능을 기대하고 있다.

-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 드라마에 본격 등장>(2005.3.29/마이데일리) 기사 중에서.     


이 드라마는 에피소드의 이름인 ‘기쁨’에서 예측할 수 있듯이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사실 그 시절(?)만 해도 성소수자가 드라마나 영화 속 인물로 다뤄지는 것은 거의 보기 힘들었는데, 심지어 성소수자 당사자가 출연한 센세이션한 작품이기도 했다. 주연으로서 하리수의 연기는 조금 어색하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출연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빛난다! (마치 영화 <비긴 어게인>에서 애덤 리바인의 어색한 연기를 보다가 <Lost Stars> 부르는 부분에서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듯이 말이다!) 


지난 17일, 전주에서 열렸던 한 토크쇼에 취재차 다녀왔다. 올해 처음으로 열리는 <전주퀴어문화축제>의 사전행사로 열렸던 이 행사는 ‘성소수자 부모모임’ 활동가들과의 이야기 시간이였다. 부모님들은 커밍아웃한 자녀들을 이해하는 방법으로서 성소수자 관련 책들에 큰 도움을 얻었으며, 앞으로도 좀 더 많은 책들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말씀해주셨다. 나 역시도 성소수자의 삶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우연히 읽었던 책 덕분이였기 때문에 동감하는 바다.      


성소수자에 대해 이제 알아가기 시작하는 분이라면, 친구출판사 숨쉬는 책공장에서 2015년에 펴낸 책 《사랑의 조건을 묻다》을 추천해드리고 싶다. 한국 게이 인권단체 ‘친구사이’의 활동가인 터울이 썼고, 퀴어퍼레이드, 서울시청에서의 무지개 농성 등 퀴어진영에서의 역사를 비롯하여 수도자가 되고 싶었던 자신, 성소수자로서 그동안 경험한 삶에서의 단상 등을 다양하게 담고 있다.      


그러나 사람 사이의 정은 칼과 같아서, 상대가 먼저 성큼 자신을 털어놓을 땐 더 이상 아무 일도 없을 수 없는 상황을 맞게 됩니다. 남의 비밀을 들었다면 나의 비밀도 토해 내는 것이 상도지요. 그런 교호가 없이는 관계가 더는 진전되지 않는 때가 옵니다. 그럴 땐 내가 즐기고 위장해 온 가면과 실제 나의 모습 사이의 낙차만큼,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게 되지요. 성정체성을 실토하는 순간, 그 이전의 과거에 했던 내 언행이 그에게 어떻게 번역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어쩌면 그는 내가 게이여서가 아니라, 아무 일도 없기 위해 내가 벌려왔던 위장을 거짓이라 받아들여 나를 불신할 수도 있겠지요.

- 책 본문 중에서 발췌     


우리가 소위 ‘소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삶은, 알아갈수록 생각보다 다른 것이 없다. 그저 차별의 벽이 그들을 ‘일반인’과 다른 이들로 구분했을 뿐, 그들은 각자 소중한 하나의 개인임은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달라지는 게 없다. 한 마디로 그렇게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이 ‘삐뚤다’라는 게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글쓴이가 게이라고 해서 여러분이 동감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없다. 나는 마치 그가 내 옆에서 조곤조곤 말하는 듯한 느낌을 많이 받았다.




‘그것은 배종옥, 김창완, 배두나 등 연기자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고, 작가나 연출가가 발견한 모습일 수도 있지만, 바로 당신 자신의 단면일 수도 있다’  

- 드라마 <떨리는 가슴> 기획의도 중에서   

  

보통 투쟁 현장의 이야기를 담은 책은 많았으나 이 책처럼 성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담은 책은 많지 않았다. 일단 당사자들이 이야기를 꺼낼 루트가 적었던 것도 있겠고, 점점 열악해지는 출판 시장에서 이런 책을 구입할 사람이 적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번에 소개된 두 작품 간에는 10년의 간극이 있다. 지난 시간 동안 분명히 변화는 있었다. 한국만 해도 올해 ‘전국퀴어문화축제연대’가 구성되었고 7개의 지역에서 축제가 진행될 예정이다. EBS <까칠남녀>를 비롯하여, 성소수자를 주제로 한 방송도 방영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낼 공간은 아직도 턱없이 부족하다. 그런 의미에서 드라마 <떨리는 가슴>과 책 《사랑의 조건을 묻다》는 참 용기를 낸, 고마운 마중물이기도 하다.     


‘다시 내 모습을 찾은 것 뿐이야(드라마 속 혜정의 대사)’라고 그들이 자신있게 외칠 수 있는 공간은 당사자들이 아닌, 우리가 함께 만들어야 하는 공간이다. 그 공간을 만들어가는 게 참 쉽지 않다. 무지개가 펼쳐지는 봄이 왔다. 하지만 그들을 막아서는 차별과 증오의 무리들도 다가올 것이다. 십년이 지난 지금, 당신은 어디에 서 있는가.     


한 번 물어보자. 그래도 괜찮아요?

당신은 괜찮나요? 나는 괜찮은 걸까요?     


지금 이렇게 가만히 있는 게,

정말 괜찮은 걸까요? 



# 성소수자 부모모임에서 제작하고 친구출판사 ‘도서출판 한티재’에서 펴내는 책 《커밍아웃 스토리》 스토리펀딩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

https://storyfunding.kakao.com/project/19133     


# 이 서평은 페친 강현주 님으로부터 지목받은 ‘트랜스젠더 혐오를 멈춰주세요’ 선언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선언 내용을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우리는 모두 사회가 규정한 성별 이분법과 거기서 파생된 혐오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트랜스젠더도 사회를 구성하는 일부입니다. 우리에게 보다 자신답게 살아갈 기본권을 보장 해주세요.     


1. 트랜스젠더는 여성이 남성으로, 남성이 여성으로 살기 원하는 것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별이분법에 순응하고 싶지 않은 사람, 실제로 스스로의 성별을 이분법으로는 표현하기 힘들다고 인식하는 사람 모두를 뜻합니다.     


2. 모든 트랜스젠더가 트랜지션(외모를 수술, 호르몬 요법 등으로 바꾸는 행위)을 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트랜스 여성이 사회가 규정한 여성성을 따르지도 않고, 트랜스 남성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가고 싶고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을 뿐입니다.     


3. 만일 트랜스젠더가 범죄를 저질렀다면, 그건 그의 범죄가 잘못인 겁니다. 성별을 바꾸어 생각해보세요. 나와 같은 성별의 누군가가 저지른 범죄로, 같은 성별인 내가 멸시당하고, 배척당한다면. 억울하지 않을까요?     


4. 트랜스젠더를 성적 대상화하여서 욕구 해소의 도구로 이용하는 일을 멈춰주세요. '일반'여성과 '트랜스'여성을 비교하면서 품평하는 일도 멈춰주세요. 트랜스젠더는 품평과 비교의 대상이 아니에요. 동등한 인간이고, 존중받아야 하는 인격체입니다.     


5. 트랜스젠더 당사자의 성정체성을 존중해주세요. 트랜스 여성은 여성입니다. 트랜스 남성은 남성입니다. 여성이 되고 싶은 남성, 남성이 되고 싶은 여성이 아닙니다. 안드로진은 그저 안드로진이고, 논바이너리 역시 그렇습니다. 트랜스젠더의 다양한 스펙트럼들을 존중해주세요. 누구든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갈 자격이 있습니다. 다양한 성정체성에 대한 존중이 사회에 만연한 성소수자 및 여성에 대한 차별을 끊을 수 있는 고리가 될 겁니다.     


6.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삶을 살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그건 매우 단순한 사실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이 사회에서 쉽게 주어지지 않는 권리이기도 합니다. 내가 나로 살아갈 권리. 그 권리가 참 힘든 이들의 삶을 일반화하거나 대상화 하지 말아주세요. 너무 쉬운 동정도 연민도 때로는 누군가를 아프게 만듭니다. 평등은 시혜가 아닙니다. 당신이 가진 권리를 누군가 가지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차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차별에 대하여 마음을 모아 계속 관심 가져주세요.     


트랜스 혐오를 멈추기 위한 움직임을 이어 가주세요.     

#stop_the_transgender_hate

#트랜스젠더_혐오를_멈춰주세요     




책 사랑의 조건을 묻다》 (2015)

숨쉬는 책공장 펴냄 ∥ 터울 글/사진

http://00bookcoop.com/


드라마 <떨리는 가슴기쁨 편 (2005) 

극본 정형수∥ 연출 고동선 ∥ 출연 김창완, 배종옥, 하리수, 배두나, 고아성 등

* MBC 홈페이지에서 다시 볼 수 있습니다.



All Night, All Right

땡땡책협동조합 친구출판사의 책들과 다른 문화예술 장르의 만남.

여러분의 깊은 밤은, 언제나 옳으니까요.     


글쓴이루카

사회학 공부를 준비하다가 책 《다르게 사는 사람들(윤수종 지음, 이학사 펴냄, 2002)》에 있던 한 트랜스젠더의 자기 고백을 읽은 후부터 성소수자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항상 성소수자 곁에 있겠다는 ‘Ally(앨라이)’로 오늘보다 좀 더 나은 내일을 말하려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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