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한국 프로야구 정규시즌이 끝났다. 내가 응원하는 기아타이거즈가 8년 만에 정규시즌 우승을 거머쥐었다. 수월하게 1위가 굳혀지나 했는데 두산의 맹추격 속에서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야 순위가 결정되었다. 그 순간, 누군가는 아쉬움에 다른 이는 감격스러워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땀과 눈물이 만들어내는 드라마. 내 생각에 스포츠가 우리에게 주는 감동을 주는 지점은 바로 선수들이 흘리는 땀과 눈물에 담긴 과정과 노력, 그리고 우연과 필연이 겹쳐 만들어지는 드라마인 거 같다. 영화나 게임과는 또 다른 카타르시스를 스포츠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특히 야구가 팬들에게 어필하는 매력은 땀과 눈물이 만들어내는 드라마의 감격과는 정반대에 있는 세계, 철저하게 수치화되어 있고 계량화되어 있는 세계, 바로 기록이다. 야구는 다른 구기 종목에 비해 기록의 종류도 다양하고 복잡하다. 100M달리기라면 몇초 안에 주파했는지 단 한 가지 기록만 있을 뿐이며, 같은 구기 종목인 축구도 골과 어시스트 정도면 중요한 기록은 끝난다. 하지만 야구는 기본적인 기록으로 타율, 홈런, 타점, 도루, 방어율, 삼진 등등이 있고, 좀 더 상급자들이 찾아보는 OPS(선수의 득점생산력을 측정하는 수치 중 하나로 출루율+장타율), WHIP(투수의 1이닝 당 출루허용률), WAR(대체선수 대비 승리기여도) 등 열거하면 한도 끝도 없다. 이 복잡성은 때로는 접근성을 높이는 장벽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일반적인 스포츠팬들뿐만 아니라 통계광이나 수학광 들을 야구로 끌어들이기도 한다.
물론 기록의 세계에도 드라마는 있다. 기록이란 숫자로 표현되는 인간의 한계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이다. 한국 야구의 한계들은 이런 것들이 있다. 이승엽의 한 시즌 최다 홈런 56개, 이종범의 한 시즌 최다 도루 84개, 선동열의 0점대 방어율 등등. 야구팬들은 이런 기록들, 다시 말해 우리가 한계로 여기는 것들에서 인간이 한 발짝 더 진보하기를 바란다. 그중에서도 전인미답이라고 여겨지는 기록이 있으니 바로 4할이다. 100년이 넘는 역사의 메이저리그에서도 1941년 테드 윌리엄스 이후 4할 타자가 없으며, 일본 프로야구에서는 시즌 타율 4할을 기록한 타자가 한 명도 없다. 한국 프로야구에서는 원년의 백인천이 4할 타율을 기록했는데, 비록 전성기가 지난 나이였다지만 일본 프로야구에서도 A급 타자였던 백인천이 이제 막 태동한 한국 프로야구 리그에서 뛰는 것은 마치 현역 프로야구 선수가 고교야구 리그에 참가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었다. 다시 말해 현대 야구가 정착한 뒤에는 세계 어느 리그에서도 4할을 달성한 타자는 없다.
해마다 날고 기는 선수들이 타율 4할에 도전하고, 야구 팬들은 그 위대한 도전과 실패를 숨죽여 지켜본다. 올해의 대표 주자는 기아 타이거즈의 유격수 김선빈이었다. 김선빈은 올해 삼성의 김성윤(163cm)이 등장하기 전까지 한국 프로야구 최단신 선수였다. 프로필상 신장이 165cm이니 실제로는 그보다 더 작을 거라고들 예상한다. 청소년대표팀에 뽑힐 정도로 타고난 재능은 모두가 알아주지만 상대적으로 매우 작은 신체 사이즈 때문에 신인드래프트에서 아주 낮은 순번에 겨우 지명되었다. 그나마도 기아타이거즈가 연고 지역 고등학교를 배려하기 위해(김선빈은 화순고 출신이다) 뽑았다는 말들도 많았다. 이대호, 김태균, 김현수 같은 타격의 신들이 4할을 기록한다고 해도 놀랠 노자인데, 겨우 165cm 작은 키에 게다가 체력적으로 부담이 가장 큰 유격수를 보는 김선빈의 4할 도전에 많은 이들이 응원을 보내면서도 한편으로는 과연 가능할지 의구심을 품었다. 한때 0.390을 넘기기도 했지만 결국 타율 0.370로 시즌을 마쳤다. 비록 4할에는 3푼이나 부족하지만 김선빈은 유격수로는 1994년 이종범 이후 두 번째로 타격왕을 거머쥐며 크게 박수 받아 마땅한 활약을 펼쳤다. 4할이라는 한계를 넘지는 못했지만 작은 체격과 체력 소모 심한 포지션이라는 두 가지 난관을 극복하고 당당하게 최고의 자리에 올라선 김선빈의 2017년 시즌은 드라마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한계에 도전하는 땀과 눈물의 감동의 드라마에서 끝나면 아름다울 것을,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넘치는 지적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뭔가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야구판에도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사람들이다. 현대 야구에서 왜 4할타자는 멸종했는지, 앞으로 4할 타자가 나오는 게 가능한지에 대해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근거에 입각한 답을 찾고 싶어 하는 사람들. 알아둬도 정말로 쓸데없는 이런 질문을 탐구하는 이들이 벌인 재미있는 프로젝트가 바로 ‘백인천 프로젝트’다. 뇌과학자 정재승이 트위터에서 운을 띄웠고, 하는 일도 나이도 성별도 제각각인 사람들이 모여서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고, 해석하고, 끝내 논문을 완성했다. 개중에는 연구자도 있지만, 대부분은 논문 쓰기는커녕 논문 한 편 안 읽어본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특히나 통계학은커녕 수학의 ‘수’자만 봐도 경기를 일으킨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이 프로젝트의 시작과 진행과 결과를 엮은 책이 바로 <백인천 프로젝트>다. 예컨대 이 책은 야구책이면서 수학책이고, 또 한 편으로는 집단지성 과학연구에 관한 보고서이기도 하다.
백인천 프로젝트의 질문, “왜 현대야구에서는 4할 타자가 사라졌는가”에 대한 대답은 사실 이미 나와 있다. 미국의 진화생물학자이자 야구광인 스티븐 제이 굴드는 저서 <풀하우스>에서 4할 타자가 사라진 까닭을 과학적인 논증을 통해 밝혔다. 야구라는 생태계가 발전할수록 개별 개체 간에 격차가 줄어들어 4할 타자라는 별종이 등장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선수들의 실력이 평균에 가깝게 수렴하는 쪽으로 야구가 발전해오면서 아주 못하는 선수도 사라진 반면, 심하게 특출난 선수도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래프로 그려보면 오른쪽에는 인간의 한계인 4할이 벽처럼 자리 잡고 있고, 그 왼쪽으로 가운데가 가장 밀집된 형태의 분포도 그래프를 그리는데, 갈수록 그래프 좌우폭의 간격이 줄어들면서 가운데 밀집도가 높아진다는 것이다. 굴드는 이를 통계학을 통해 증명했다. 백인천 프로젝트는 새로운 가설을 만들거나 그러진 않았고, 굴드의 이 학설을 한국 프로야구의 데이터를 통해서 다시 한 번 논증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책 전체적으로는 조금 구성이 난잡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백인천 프로젝트’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 글쓰기에 조금 친숙한 사람들이 백인천 프로젝트의 진행 과정과 집단지성 과학 연구의 의미, 통계학적인 의미와 내용, 프로젝트의 결과물, 그리고 야구 현장의 목소리를 담은 인터뷰를 기록했다. 각각의 기록은 그 자체로 나쁘지 않다. 아니 훌륭하다. 하지만 한 권의 단행본으로 묶이기에는 서로 간의 거리가 너무나 떨어져 보인다. 야구에 관심 있는 사람들, 통계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 집단지성 과학 연구에 대해 관심 있는 사람들이 각각 관심 분야의 글을 읽었다면 만족할 텐데, 책 전체를 읽었다면 지루하지 않을까 싶다. 아주 독특하고 재밌는 기획이었던 백인천 프로젝트의 모든 것을 단행본 한 권에 다 담으려는 시도가 좀 무리였던 거 같다. 그렇더라도 각각의 챕터는 충분히 훌륭하니 충분히 읽어볼 만한 책이다.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수학과 과학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다 읽고 나니 ‘열정적으로 취미 생활을 하는 이들의 생태 보고서’라는 느낌이 든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 취미생활에도 공부는 필요하다!
이용석 "타이거즈 팬의 야구책 읽기"
전라도 출신 부모님 덕에 자연스럽게 타이거즈 팬이 되었습니다. 한때 프로야구 각종 기록을 달달달 외우고 다녀 뭇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지만, 인터넷 검색으로 기록 같은 건 누구나 찾을 수 있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깟 공놀이'지만 '타임 아웃 없는 경기의 즐거움'을 알아버렸기에, 이젠 야구를 버릴 수도 없습니다. 다만 둥근 야구공 너머의 세상이야기를 야구와 함께 보려고 합니다. 야구 관련된 다양한 장르의 책을 읽고 서평을 연재합니다.
책
《백인천 프로젝트》(2013)
정재승, 이민호, 천관율, 윤신영, 백인천 프로젝트 팀 지음 | 사이언스북스 펴냄
책
《H2》(2006)
아다치 미츠루 지음 | 대원씨아이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