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나의 동네> 이미나 지음, 2019
2019년 4월, 이미나의 두 번째 그림책 <나의 동네>가 출간되었다. 첫 작품 <터널의 날들> 이후 만 3년 만에 내놓은 그림책이다. <나의 동네>는 어린 시절에 친구와 함께 놀던 할아버지의 집을 현재 시점에서 그려보는 이야기다. 작가의 말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빌어 이렇게 쓰고 있다. “주인공이 홍차에 적신 마들렌을 먹다가 불현듯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는 대목을 알고 있을 거예요. 이 그림책의 주인공도 어느 여름날 훅 끼쳐오는 더운 바람에서 어릴 적 살던 동네를 떠올립니다.” 이 구절을 읽으면 어린 시절의 그 더운 공기가 지금의 내게 훅 불어오는 듯하다. 책을 펼치면 손바닥만한 짙은 초록의 이파리들과 그 사이에 고개를 내민 파랑새, 건강해뵈는 회색 강아지들와 삼색 고양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지면을 가득 채운 식물들은 뻣뻣하고 질긴 줄기를 가졌다. 충만한 볕을 받고 생의 의지를 뽐내는 여름의 풍경이다. 뻗어가는 붓질은 어찌나 힘찬지, 그 힘들이 동물들의 우렁찬 목소리로 번역되어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모든 감각을 생생하게 만드는, 추억이라는 이름이 무색한 생동감이다. 결국 보고 있는 것은 과거가 아닌 현재의 감각이 된다.
어린이 독자를 염두에 둔 그림책의 배경은 간략화되거나 생략되곤 한다. 주로 아이들의 생활과 관련된 공간-집안,보육시설,놀이터등-을 중심으로 한정된 관계-양육자, 또래 친구, 형제자매-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어떤 작가군은 그림책 장르 안에서 배경 묘사의 생략을 옹호하기도 했다. 아동문학 연구자인 마리아 니콜라예바는 <그림책을 보는 눈>에서, 2차대전 후 스웨덴을 중심으로 한 그림책의 ‘극사실주의’ 유파를 소개하는데, 여기서 ‘극사실’이란, 어린이의 경험(이라고 짐작되는)으로 한정된 세계의 묘사에 치중하는 경향을 말한다. “당시에는 독자가 등장인물과 가구, 장난감, 도구 같은 세부 사항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쓰지 않고 전적으로 등장인물에만 마음을 쓰기 때문에 전체 공간을 그림으로 채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사물은 마치 전시형 책 속에 있는 것처럼 각각 고립되어 있다. 어떤 다른 배경 같은 것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이런 식의 ‘편집된' 사실주의는, 어린이 경험에 대한 당대 어른 중심적 사고를 짐작하게 한다. 역사로부터 떨어져나간 어린이 세계라는 판타지, 그리고 이러한 판타지가 곧 ‘어린이다움'의 문화라는 관념은 여전히 꽤나 지배적이다. 그러나 한정된 배경을 중심으로 재현된 어린이의 세계에 대한 묘사는 결과적으로 어린이의 세계가 사회의 복잡한 관계망으로부터 유리된, 진공된 세계에 존재한다는 신화를 만들어낸다. 이 관계망 안에는 필연적으로 성별 및 나이에 따른 권력 관계를 비롯해, 다양한 이데올로기의 매듭이 존재하는 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이가 실제로 생활하는 반경이 어른의 그것에 비해 넓지 않더라도, 이미 다양한 미디어에 둘러싸여있고, 어디론가 이동하는 시간도 적지 않다. 어린이의 경험의 흐름을 단절하고, 무시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배경이 인물보다 더 비중있게 다루어지는 이미나의 그림책이 반갑다. 배경이 본격적으로 묘사되고 더 나아가 주인공의 자리를 대체했다. 주인공을 따라가기 보다는, 세계 안에서 움직이는 대상들을 맥락 안에서 포착하는 이이야라고 해야 할까. 배경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것, 이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보는 행위'와 관련된다. 그림책 작가는 이야기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화가이기도 하다. 따라서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보고' 재현하려는 화가의 의지가 그림책 작가에게 있고, 이는 어린이문학의 관습과 다른 그림책 문법의 독특함을 만든다. 화가는 세계를 ‘응시하면서', 무엇을 볼지 선택하고 자신이 이전의 본 것들을 연상하거나 그들 사이의 관계를 떠올린다. 자신이 본 것을 다른 사람 또한 보고 있는지 말을 걸기 위해 이야기를 엮고 그림을 그린다.
전작인 <터널의 날들>은 ‘터널'을 묘사하고 있다. 터널은 어린이책에서 곧바로 감정적 연결이 일어나기 힘든 공간이기에 이 책의 독특한 재현에 주목하게 된다. 일시적이며, 모든 것들이 빠르게 흘러가는 이 곳이 어떻게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 표지가 된 그림 속에서 터널 앞 자동차의 행렬은 빠르고 힘차다. 터널 속에는 거대한 환풍기와 트럭, 오토바이의 흐름이 만들어낸 바람으로 꽃씨들이 휘날리고 있다. 그러나 이 그림들이 가진 역동성은 속도를 찬양하는 프로파간다의 포스터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도시와 개발을 비판적으로 보려는 문법으로도 읽히지 않는다. 이 그림들의 독특한 지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풍경을 묘사할 때,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 세계에 대해 논평하려는 위치와 다르다는 점 말이다. 독자는 차에 타고 어디론가 이동하는 사람의 눈으로 이 터널을 보게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선형의 시간 흐름으로 터널을 통과해 목적지를 향해가는 사람이 아니라, 순환하는 시간을 사는 터널이 화자이다. 그리고 화자는 꽃이 필 때 소풍가는 버스가 1년 후에 다시 보이자 자신도 아이들처럼 한 살 더 먹었음을 반가워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목소리를 낸다.
“익숙한 장소를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터널의 날들> 작가 말 중) 작가의 ‘보는 방식'은 두 번째 책에서 사라진 “그 오래된 동네를 보고 싶은"(<나의 동네> 작가의 말 중) 소망으로 바뀐다. 화자는 친구에게, 장소에게, 혹은 자신의 기억에게 편지를 띄운다. 편지는 독자에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우체부의 가방 속에 있을 터이고, 시선은 파란 나비와 함께 날거나, 동네 강아지들이 몸을 숨긴 수풀 뒤에서 우체부의 자전거를 쫓는다. 화자는 편지봉투에 주소를 썼지만 이 메신저가 볼 목적지의 풍경에 낙심하지 않도록 가만가만 우체부를 따르는 듯하다. 이 모든 풍경을 ‘보는' 시선의 주인 또한 사람이 아닐지 모른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공간의 전체를 조망하고 파악하려는 객관성을 가진 이가 아니며, 비껴있는, 미약한 것들과 함께 구석에 몸을 숨긴 조용한 시선이며, 관점이다.
화자는 추억하는 행위를 통하여 과거를 현재 자신의 구성요소로 삼거나 ‘통합'하려는 의지를 갖지 않는다. 지면의 그림들은 친구와 나누었던 재잘거림의 의미, 친구와 함께 심었던 이름모를 꽃씨의 현재 행방을 탐색하기보다는, 현재 그곳에 새로 이사온 ‘존재'들'을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빨간 우편함은 작은 새들이 차지했으며, 빈집에서 꼬리를 흔들며 달려나오는 강아지들이 살고 있다. 과거의 안정적 공동체성이 현재에 파괴되었다는 논리가 아니라, 거기서 새로운 공동체성을 발견해보라고, 가만히 제안하는 듯하다.
어린이책이 어린 주인공을 세계의 주인으로 우뚝 서도록 격려하는 이야기로 수렴되어야 할까? 어린 아이들이 편집된 세계와 관계 속에서 보여지는 것만큼이나, 어른의 위치에서 관망하는 시선으로 세계를 보도록 은근히 독려하는 그림들에 대한 염려가 있다. 주인이 되지 않는 화자의 목소리, 비껴선 위치와 동일시하는 시선의 그림들을 통해 '어린이되기'를 경험할 수 있다면. '그 때 그 장소'에 대한 이미지 기억술을 새롭게 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는 듯하다.
글쓴이
한윤아
시각문화 독립연구자, 애니메이션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