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사람이 온다는 건

비밀에 기대어_어느 자립준비청년의 이야기

by 힐링서재

“안녕하세요.”

누군가 인사하는 소리에 돌아보니 그녀가 서 있었다.

“어! 안녕하세요. 저는 아이 참고서 사러 왔는데, 어쩐 일이세요?”

“아. 오늘 제 책이 나와서 보러 왔어요.”

“네에? 책이요? 어디, 같이 가 봐요. 원래 글을 쓰셨어요?”

짧은 대화를 나누고 나는 그녀의 책을 덥석 집어 왔다.



작년 초 인스타그램 릴스에 진심을 다하던 때가 있었다. 평생 나서본 일 없는 내가 불특정 다수가 보는 SNS에 얼굴을 들이밀고 책 소개도 하며 나름 즐거운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평생 안 하던 짓을 시도하니 의외의 쾌감이 있었다.

일단 ‘팔로워가 2000명도 되지 않는 내 작고 소중한 계정을 누가 보겠어?’라는 마음이 컸다. 화면 속 나를 봐주는 건 그저 다른 화면 속 존재하는 내 소중한 팔로워들 뿐이니, 하고 싶은 대로 해보자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나를 알아보는 이가 이토록 빨리 생길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특별하지 않은 하루였다. 오늘은 또 뭘 찍어볼까 궁리하며 퇴근했다. 집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가 활짝 열리자 기쁜 마음으로 올랐다. 언제나 그렇듯 퇴근은 즐거우니까. 그때 함께 탄 이웃이 있었으니, 그녀는 언제나 밝은 미소와 상냥한 목소리 인사를 나누던 아래층 아기 엄마였다. 아기도 엄마도 너무 사랑스러워 나도 모르게 눈여겨보곤 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인스타에서 봤어요. 저도 책 좋아해요.”

“아, 네. 감사합니다. 하하”

짧은 대화를 나누던 중 나는 부끄러워서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고 싶었다. 분명 팔로워가 1만 명이 넘어도 알아보는 이가 드물다고 했는데, 심지어 책 읽는 인구가 매년 급감해 희귀종이 되어가는 이때에 책스타그램을 하는 나를 알아보는 이가 생길 줄이야. 그것도 엘리베이터 안에서 같은 라인 이웃이. 하. 부끄럽다.

그 뒤로도 우린 엘리베이터에서 종종 마주쳤고 반갑게 인사했다. 늘 아이에게 예쁘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을 볼 때면 다정함이 나에게까지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그런 그녀를 얼마 전 의외의 장소에서 마주쳤다. 딸아이의 참고서를 사러 서점에 방문한 날이었다. 평소 인터넷으로 사던 참고서를 이상하게 그날따라 꼭 서점에 가서 사고 싶었다.


그렇게 간 서점에서 우리는 우연히 만났고 나는 그녀의 책을 사 왔다. 그리고 단숨에 읽어버렸다.

왜? 깔끔한 문장과 흡입력 있는 에피소드가 쌓이고,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명확히 전달되니 단숨에 읽을 수밖에. 그렇다고 그녀를 만나면 ‘책 재밌었어요.’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기엔 읽는 동안 가슴 한편이 아렸다. 나보다 열댓 살은 적지만 훨씬 어른스러운 그녀가 대견하기도 했다.


책 제목은 ‘비밀에 기대어’, 지은이는 ‘허진이’


그녀와 함께 매대에 가서 책을 손에 넣었을 때 책의 부제목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제야 꺼내놓는 자립준비청년 이야기’

그렇구나, 그랬구나.


서점은 우리들의 집과 꽤 멀리 떨어져 있었고, 나는 정말로 오랜만에 방문한 서점이었으므로 거기서 그녀를 만난 게 다소 신기하게 느껴졌다. 우리가 같은 아파트에 살게 된 것도, SNS 속 나를 발견한 것도, 서점에서 우연히 만난 것도,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가 내 마음 속에 들어오게 된 것도.

이 모든 우연의 확률은 얼마나 될까?


책을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고 불현듯 한 편의 시가 떠올랐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방문객, 정현종




그렇다. 사람이 온다는 건 그 사람의 세계가 함께 오는 것이다. 나는 그녀의 세계를 만났고 이제 내 마음은 그런 바람을 흉내내고 싶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예기치 못한 쓸모 있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