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은 손이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돌담길, 와인잔, 불판 위의 고기, 해변, 골목길, 창문, 다시 와인잔, 접시 위의 생선회, 다시 해변
집에 들어온 지 1시간 하고도 30분이 지났지만, 여전히 소파에 앉아 휴대폰만 바라보고 있다. 그렇다고 액정에 떠오르는 내용을 관심 있게 하나하나 보는 것도 아니다. 습관적으로 엄지손가락을 위아래로 훑으며 아래에서 위로 흐르는 화면을 바라 볼뿐이다. 어라, 이 와인잔 조금 전에 봤던 와인잔이 아니던가. 커피 사진은 벌써 몇 장 째지. 그러고 보니 낮에 커피 사진을 찍어뒀었지, 아니 테이블과 조명 사진이었던가. 가만있어보자, 오늘 낮이 아니라 어제였던가? 아무렴 어떤가, 이미 이 화면 속에는 수천, 수 만장의 커피잔이 수두룩한데.
사실은 낮에 휴대폰을 버스에 두고 내렸었다. 약정이 끝나기도 했고 액정도 군데군데 깨져있었기 때문에 이 참에 새 기계로 바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너 시간쯤 뒤에 걸어본 전화를 누군가가 받았고, 결국 휴대폰은 오늘 밤 예상했던 것보다 빨리 내 손에 돌아오게 되었다. 그렇게 잃어버렸던 휴대폰을 되찾았지만,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휴대폰이 없던 낮동안에 묘한 해방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비록 반나절이었지만, 궁금증에 수시로 열어 볼 대상이 손 닿는 곳에 있지를 않았고, 어떠한 알림이나 메시지가 올 거라는 여지에 대한 기다림 또한 없어지니, 어쩐지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은 두 손이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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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나절 만에 다시 손에 들린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19명 중에 17.5명은 졸업 후 5년간 한 번도 얼굴을 마주한다거나 전화통화 조차 한 일이 없는 사람들이다. 17+0.5명인 이유는 그나마 한 명은 간간히 모바일 메신저로 근황을 주고받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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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20명이 넘었다.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했다. 휴대폰은 음악을 재생시킨 상태로 수건장 안에 넣어두었다. 샤워하는 동안 간간히 음악소리가 끊기며 메시지가 왔음을 알리는 소리가 들린다. 샤워를 마친 뒤에야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굳이 옆에서 알림이 울리는 것을 들어야 마음이 놓인다. 사실, 미리 보기 창으로 보이는 내용만 확인하고 메시지를 확인하지도 않는다. 지금 확인해도 딱히 답변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화장실을 나와, 물기를 말리고 다시 소파에 앉았다. 지금 잠자리에 든다고 해도 8시간 조금 넘게 잘 수 있는 시간이었으므로 앞으로 1시간 정도 더 여유를 부려도 괜찮을 것 같아 보였다. 적막한 저녁의 소리가 부담스러워 TV를 켠 뒤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를 재생했다. 즐겨보는 BJ들의 방송이 두서없이 TV 화면 위로 흐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중국 당면을 먹고 누군가는 회전 초밥집엘 갔으며, 누군가는 티라미슈와 커피를, 아 커피, 아까 커피 사진을 내가 업로드했던가? 업로드했구나, 그런데 좋아요 수가 빠르게 늘지 않는 것이 아무래도 해시태그를 잘못 걸어둔 것 같다. 아, 그래 그게 빠졌구나
#JMT
TV에서는 계속해서 BJ들이 무언가를 먹거나 마시고 있다. 며칠 전에 사둔 책이 생각났다. 책은 사온 당일 식탁 위에 올려둔 그 모양 그대로 놓여 있었다.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책을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TV 속 BJ는 이제 세수를 해야 할 것만 같은 크기의 대야에 라면을 받아서 먹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책을 폈지만 좀처럼 진도를 뺄 수 없었다. 눈으로 문장을 좇고 있었지만, 세 번째에서 네 번째 문단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시선은 자꾸만 두 번째 문단으로 돌아갔다. 책장을 넘길 수 없었다. 책을 펼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손은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찾았고, 간신히 그것을 손에서 멀리 떨어뜨려 보아도 머릿속에 간헐적으로 떠오르는 그 기계에 대한 생각을 지우기엔 역부족이었다. 한 가지 일에 진득하니 매달리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손에 쥐고 있지 않아도 그것의 무게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티브이를 켜놓은 상태로 핸드폰을 만지고, 휴대폰 게임을 하다가 컵라면 부을 물을 올리고, 라면을 먹으며 휴대폰으로 유튜브를 켠다. 화면이 쉬지 않고 흐른다. 화면 속의 그것들은 또 다른 밀려오는 것들에 떠밀려 흐르기만 할 뿐 좀처럼 고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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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휴대폰 액정 속에는 돌담길, 와인잔, 불판 위의 고기, 해변, 골목길, 창문, 다시 와인잔, 접시 위의 생선회, 다시 해변 그리고 소셜커머스에서 타임세일을 알리는 알람이 울렸다.
'타임 딜! 11시 오픈 예정 - 예약 알림 설정'
참 돈 쓰기 좋은 시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문 인식 한 번이면 방에 앉아 2kg짜리 통 족발을 받아 볼 수 있다니, 그것도 무료배송에 로켓 배송으로 내일 저녁에는 통 족발 사진을 먹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다시 화면이 흐른다. 눈동자는 아래에서 위로 다시 아래에서 위로 아래에서 위로 흐른다. 끝 간 데 없이 흐르는 화면 속 사진과 함께 고이지 못한 관계도 따라 흐른다. 지금 자면 6시간은 잘 수 있겠다. 가만있자, 쿠키 사진을 올렸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