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에세이
유비
지난 8월, 장장 49일간의 장마가 끝이 났다. 우리는 1년 12달 중 거의 두 달을 비와 함께 지냈다. 1973년도를 어제 일처럼 기억할 수 있는 독자님은 없겠지만, 그해에는 장마가 6일 만에 끝났다고 한다. 우리 회사는 출근 복장이 자유롭고 우리 집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였기 때문에, 내가 긴 장마에 불편을 본 것은 겨우 잠잘 때 정도였다. 자다 자다 나는 비가 내 방 안에서 내리는 줄 알고 놀라서 깨거나 아니면 내가 잠을 집 밖에서 자고 있는 건가 싶어서 잠에서 깬 적이 여러 번이다.
이번 장마 기간에는 뉴스를 볼 때마다 장마로 인해 사람이 다치거나 죽는 사건이 끊이질 않았다. 여기서 나는 큰 죄책감이 들었는데, 장마로 누군가의 소중한 집이 떠내려가는 장면을 지켜보는 것보다 빗소리에 잠을 자주 깼던 것이 나를 더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죄책감을 지우기 위해서 더 이상 빗소리에 잠을 깨더라도 귀찮아하지 않았고, 옷이 젖고 몸이 젖는 사소한 불편에는 아무런 불만을 가지지 않기로 했다. 그 대신 나는 비 때문에 불편한 순간을 마주할 때마다 이번 장마로 순직한 위인들을 기리면서 동시에 피해를 본 국민들의 마음과 함께하기로 했다.
마음도 어깨도 무겁지만 내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해서 바르게 세금을 납부하는 일뿐이다. 나는 내가 그렇게 낸 세금이 이번 장마를 위해 수고하신 분들에게 잘 전달되기를 바라지만, 정작 내가 장맛비를 뚫고 걸어가 벌어낸 세금은 여러 복잡한 유통 과정을 거치고 각종 수수료와 인센티브를 떼어주고 나서야 수고한 분들과 수재민에게 겨우 도달할 것이다.
수많은 나라에서 많은 사람이 피해를 보았다. 단순히 “어느 때보다 긴 장마였네” 라고 넘어가기에는 정말 소중한 사람들이 장마와 함께 떠나갔다. 비는 결국 그쳤지만, 사람이 입은 피해는 누군가의 가슴 속에 영원히 고여있을 예정이다. 그렇다면 수재민들의 가슴에 고인 물은 누가 퍼 나를 것인가. 나는 이런 피해가 다신 없길 바라는 마음과 함께 수재민들에게 피해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주어지길 바란다.
‘내가 그 피해자라면?’, ‘물에 잠긴 사람이 내 가족이라면?’ 과 같은 짧은 상상만 해도 눈물이 나고 소름이 돋는다. 누군가 인간이 이렇게 연약한 줄 알았더라면 분명히 세금으로 지은 구조물이 떠내려가는 것을 걱정하기보다는 돌아가서 가족의 안전을 먼저 챙기라고 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권력자는) 다른 사람들도 자신처럼 강하다고 생각했기에 누군가를 장마 폭풍 속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그는 권력이 없는 사람의 삶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들이 자신처럼 강하지 않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역사에서 지울 수 없게 된 그(권력자)의 실수는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는 권력자의 권력 남용과, 그들과 약자 사이의 소통 관계가 얼마나 꽉 막혀있는지를 대변하는 증명서다. 인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연약해서 맨손으로 복숭아를 멍들지 않게 쥐고 있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하게 다뤄질 수는 없는 걸까. 현실 앞에 내 마음에도 장마가 길어졌다.
*강원 춘천 의암호 선박 전복 사고의 발단이 된 인공수처섬을 말한다.
나처럼 서울로 상경한 동창 S가 있다. S는 학창 시절 별로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계획 없이 살았고 생각 없이 놀았던 친구인데 어느새 서울로 올라와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어쩌다 듣게 됐다. 서울 외의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서울은 상징적인 도시다. 꿈을 이룰 수 있는 곳,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곳, 갭투자가 가능한 곳, 연예인이 많은 곳, 24시간 차가 막히는 곳.. 사람마다 생각하는 서울의 상징성은 다 다르다. 나에게 서울은 사람이 많아 기회가 많은 곳이다. 반면 S에게 서울은 일식 요리를 배울 수 있는 곳이다. S의 성격이 얼마나 단순한지 요리하는 친구가 있어서 자신도 요리하는 친구를 따라서 요리를 시작했을 뿐이고, 그러다 결국 서울까지 와버렸다는 것이다. 나는 S의 자유도 높은 인생에 이따금 탄복을 금치 못한다. 가끔 친구가 인생을 너무 아무렇게나 사는 것 같아 위험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내 인생을 잘 다듬고 난 후에야 신경 쓸 문제다.
부모님 집에서 얹혀살다가 서울로 올라오게 되면 우리는 ‘서울세’를 내야한다. ‘서울세’는 20, 30대 평균 직장 급여의 적게는 15%에서 많게는 30%까지 차지한다. 서울세란 바로 전세와 월세와 같은 주거비용을 말하는 것이다. 재밌게도 서울세를 낸다고 해서 서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닌데, 그것은 사투리 때문이기도 하고 서울이 고향이 아닌 것이 이유이기도 하다. 서울 사람이 아무리 열심히 경상도 사투리를 연습해도 경상도 사람들이 그 사투리를 소위 ‘쳐주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아무런 지원없이 바닥부터 서울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것은 생각보다 위태롭다. 사실상 ‘서울세’ 때문인데, 식비는 굶어서라도 버틸 수 있지만 서울세는 한 번이라도 밀리면 그때부터 인생은 서서히 파멸의 길로 향한다. 갑작스럽게라도 수입이 끊긴다면 전세와 월세를 감당하기 위해서 주변인들에게 돈을 빌리면서 사실상 대부분의 대인관계를 잃거나, 고금리 대출에 손을 대면서 인생의 희망을 서서히 잃어간다. 서울에서 번듯한 직장을 구하지 못했다면 나의 직장과 나의 자리가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다. 나 같은 흙수저들의 연약한 인생을 보호하기 위해서 실업급여라는 정책이 나온 게 아닌가 싶다.
나는 실업급여를 받아본 적이 없다. 듣기에는 일을 하다 그만두면 실업급여가 나온다고 했다. 원칙상 개인 사정이 아닌 회사 사정으로 퇴사를 당하는 경우에만 실업급여가 나온다고 하는데, 주변 사람들을 보니 자진 퇴사 후에도 어떻게 실업급여를 잘 받아 먹고 있었다. 실업급여로 지원해주는 돈은 10~20만 원이 아니고 인턴 월급에 해당하는 큰돈이다. 하지만 이 정도 규모의 정부 지원이 있어야만 서울세를 내는 이들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주변인에게 동정을 구하다 관계를 잃거나, 빚쟁이로 살아가는 상황을 면할 수 있다.
S는 일식집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나와 연락이 닿았을 때는 벌써 3번째 일식집을 그만두었다고 했다. 들어보니 새로운 기술들을 배우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그만두고 다시 새로운 일식집에 취업하는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나누다가 S가 나에게 했던 말이 바로 내가 지금 세금 문제를 떠들고 있는 이유다.
S는 스스로 일식집을 그만두고서는 실업급여를 한 달에 150만 원씩 받고 있다고 했는데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개 꿀ㅋㅋㅋ” 그리고 정말로 내 기분을 좋지 않게 만드는 말은 그다음이었는데 “실업급여 끝날 때까지 놀다가 끝나면 일 구해야지 ㅋㅋ” 라고 했다.
실업급여라 불리는 정책의 옳고 그름을 따지고 싶지는 않다. 원래 정치는 좌와 우가 줄다리기해야 중간을 유지할 수 있다고 배웠다. 어차피 모든 정책은 한쪽으로 편향되어 있다. 단지 저렇게 세금을 받아 처먹고 있는 사람이 내 동창이라는 것과 앞으로 두 달이나 더 곰이 꿀을 빨듯 실업급여를 더 받아 먹을 것이라는 사실이 문제가 되는 부분이다. 그 돈은 S를 지켜보고 있는 나와 나를 키워준 부모님과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분들이 참을 것 못 참을 것을 견뎌가며 번 돈이다. 사람은 모두 똑같다. 쉽게 받길 원하고 더 받길 원한다. 나도 S와 같은 상황에 부닥친다면 똑같은 선택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저 실업급여가 올바르게 지급되기를 바랄 뿐이다. 정말로 열심히 구직활동을 하고 있지만 수익이 없어 힘든 사람들이 적지 않다. 올바른 정책은 올바르게 집행될 때에야 비로소 올바르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장마만 아니었어도 이런 오지랖을 부릴 생각은 없었다. 하루 이틀 한 달 내내 사람들의 피해를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 같이 힘없는 국민 한 사람이 어떻게 그분들의 피해를 도울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실업급여를 꿀 빨아먹고 있는 동창을 이곳에 소환한 것이다. 그런 돈을 수재민에게 전달하라고. 나의 오지랖이 그들에게 닿진 않겠지만 마음으로나마 수재민들과 함께하고자 한다. 힘내요 수재민들. 힘내요 대한민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