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에세이
유비
재미없기 짝이 없는 철학책을 읽고 있다니. 인문 철학의 고전 책들은 다름이 아니라 그 지루함을 내 발끝부터 내가 있는 그 장소 전체로 확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우연히 주변인이 가방에서 주섬주섬 철학책을 꺼낸다고 생각해보면, 책 표지를 바라보는 순간 알 수 없는 재미없고 지루한 감정에 빠지게 된다. 나쁜 것은 아닌데 결코 내가 손대지 않을 것. 아무리 읽어도 나는 이해할 수 없는 것. 철학이다. 진실을 말하자면 철학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의외로 부정적이지 않다. 철학책을 마주하더라도 대부분은 그저 아무 생각이 들지 않을 뿐, 그것을 굳이 싫어하거나 멀리하고 싶어 하진 않는다. 그것은 부정이라고 불리지 않으며 ‘무관심’이라고 정의되는 태도다. 철학과 인문은 나에게도 무관심의 대상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나는 기타를 쳤다. 10만 원도 안 되는 밝은 오크 색 통기타를 선물 받아치고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나 학교 밴드 활동을 위해서 전자기타를 사겠다고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는 기타가 있는데 왜 또 기타를 사냐는 그럴싸한 말로 반대하셨다. 우리 아빠는 늘 그렇게 아끼고 절약하는 가정적인 남자다. 아빠는 내가 짱구를 볼 때마다 흠칫흠칫 할 만큼 짱구 아빠의 외모를 많이 닮았다. 과거 에어컨 연구원으로 지내셨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엄마가 운동화를 사달라고 하면 운동화 하나 고르는 데 반년 정도 걸린다. 결국 가장 적절한 가격대에 그 이상의 성능을 가진 좋은 운동화를 사는 데 어찌 성공하지만, 반년 간 자신의 노동력에 대한 보상은 포함되지 않은 걸 보면 확실히 연구원 출신은 맞는다고 생각한다. 연구원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단돈 얼마 따위로 환산하며 연구라는 직무에 집중하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영원히 성공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연구를 성공으로 이끌어 세상이나 기업을 이롭게 하고, 정작 자신은 자신의 인생의 가치를 계산받아 본 적 없는 데에서 연구원의 고귀함이 나오는 것이다.
까다로운 아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주 새빨간 전자기타를 얻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내 돈을 산다고 한 것인데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반대하실 필요가 있었나 싶지만, 나도 나중에 내 아들딸이 밝은 오크 색 젤리 괴물을 하나 사놓고 돌연 똑같은 모양의 빨간 젤리 괴물은 사겠다고 하면 그럴싸한 말로 반대할 것 같다. 인생 첫 빨간 기타를 시작으로 나는 늘 빨간 기타만 샀다. 젊은 날의 정열을 담은 뭐라나.. 고2가 중2병을 늦게라도 겪은 건지 나는 그렇게 음악을 표현하려고 했다. 실제로 나는 지역에서 전공생보다 더 많이 연습하던 유일한 비전공자였고 지역에서 전공생들과 음악을 함께 했다. 젊은 날의 정렬을 담으면 전공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그 정도는 할 수 있다. 그때 구한 시뻘건 기타는 팔기가 아까워서 아직도 가지고 있다. 그 기타는 계좌 이체도 할 줄 모르는 나이에 모르는 사람에게 손을 덜덜 떨면서 현금다발을 주고받아온 기타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기타를 사러 나간다고 했더니 연구원 아빠는 내가 사기를 당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그 돈을 기타를 사는 데에 쓰는 것이 맞는지 (아마도 후자에 가까웠을 것이다) 따라가 봐야겠다고 대낮에 우리 누나를 데리고 거리를 유지하면서 거래가 끝날 때까지 몰래 나를 지켜봤다. 참 대범했던 고등학생 시절이었다.
어차피 언젠간 누군가가 나에게 “왜 빨간색 기타를 샀어?”라고 물어볼 것 같아서, 정렬 때문이니 뭐니 하는 나의 부끄러운 과거를 숨기지 않고 글로 남기기로 했다. 나의 빨갛고 화려했던 고등학교 시절을 남에게 팔지 않고 간직하기로 했다. 빨간 기타를 들고 했던 밴드 생활은 꽤 재밌는 추억이 되었다. 남고 밴드를 만들어서 여고 축제에 공연 나가는 것이 남고 밴드의 최고의 트로피라 여기며, 지역 대회로 뻗어 나갔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남고였다. 두발 자유도 아니었고, 복장 규정도 엄격했다. 나는 머리를 기르고 싶었고 교복 바지를 줄여 입고 싶었다. 지금은 와이드 한 바지를 주로 입지만 세상 그렇게 편한 바지가 있는데 그땐 무슨 생각으로 줄여 입었는지 모르겠다. 만약 그 당시에 내가 스키니 한 바지를 입으면 키가 더 커 보일 거라는 생각에 줄인 바지를 입었던 거라면, 키가 커 보이기 위해서는 다리의 굵기가 아니고 얼굴의 크기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과거로 돌아가 말해주고 싶다. 진실은 키가 커 보이려면 키가 커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생활에서는 ‘~같은’ 같은 소리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키가 크거나 키가 크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키가 커지기 위해서 노력하거나 작아지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보다 자신의 키가 크거나 작다는 것을 인정하는 편이 훨씬 더 멋진 사람이 되는 방법이다. 공교육을 통해 학생들에게 알려주면 좋을 것은 키라는 것은 각자 자랄 만큼 자란다는 것과 세상에는 아주 다양한 키가 존재한다 말들 아닐까. 작은 키도 큰 키도 한 사람이 원하는 삶을 성취하는데 결정적인 요소가 아니라고 말해주는 그런 교육 말이다. 그렇다면 학생들이 TV나 SNS에 나오는 남의 몸보다 자신의 몸을 더 사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나에게도 누군가 그런 말을 해주었더라면 내가 바지통을 줄이는데 이틀 치 밥값을 낭비하진 않았을 것이다.
내가 내 몸매를 사랑하지 못했던 것은 나에게 미안한 과거지만, 학창 시절 나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머리를 기르고 옷을 줄이고 싶었다. 내가 졸업하고 나서 들은 바에 의하면 모든 선생님이 내가 음악을 전공하는 줄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머리가 길고 바지를 조금 줄여도, 쟤는 자유로운 놈이라고 나눴단다. 음악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이었지만 그것보다 멋진 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했던 살고 싶은 대로 살 게 되었다는 점이다. 나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정말 몰입한다면 세상은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다는 사실을 그렇게 배웠다.
음악 전공생들과 어울린 건 사실이지만 나는 음악을 전공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음악은 내 인생을 책임져줄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뒤로는 내가 하고 싶은 공부들에 집중했다. 딱 그 무렵 내 인생을 바꿔놓은 외국어 공부와 인문 고전 철학 공부를 시작했다. 한 사람이 무언가를 하고자 하면 하늘은 반드시 사람을 붙여준다. 영어 공부를 하겠다 결심했더니 유일하게 담임 선생님만큼은 ‘노는 애’였던 나를 믿어주셨다. 영어 선생님이셨다. 내가 공부할 수 있도록 나를 따로 불러내 선생님께서 소장하고 계신 모든 문제집을 주셨고, 다른 과목 시간에도 영어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다른 선생님들의 잔소리를 막아주셨다. 담임 선생님은 작은 체구였지만 나에게만큼은 학교에서 가장 큰 사람이었다. 세상을 살며 모르고 겪어야 할 일이 이토록 많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만약 더 일찍 알았더라면, 인생의 멘토가 한 명쯤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건지 깨닫고 담임 선생님에게 더 잘해드렸을 텐데..
영어 공부는 내가 원하는 성적에 이르기까지 원 없이 했다. 그러고 나니 다른 공부 거리가 필요했고 모두가 수능 공부를 시작할 때 나는 이지성 작가님의 <생각하는 인문학>과 함께, 중국어를 시작했다. 그 순간이 내 인생의 큰 전환점 중 하나이다. 다시 말하지만 어떤 일을 하고자 하면 하늘은 반드시 사람을 붙여준다. 철학 공부를 하기로 하니 이지성 작가님의 책이 나를 인문 고전의 길로 이끌어주었고, 중국어를 하겠다고 하니 평범한 중국어 학원에서도 귀한 선생님을 만났다. 시간이 지나 중국을 오가며 일도 해보고, 많은 외국인을 만났다. 어린 나이지만 삶의 가치관을 가지게 됐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나이가 30, 40이 되어서도 스스로 삶의 가치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독서의 부재에 있다. 가치관의 유무가 우월함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 사람의 가치관은 적어도 자신의 삶을 보호할 수 있다. 살아가며 가치관을 기준으로 선택을 하게 되고, 일관된 선택은 축적되어 좋은 결과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가치관이기 때문에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것도 물론이다.
재미없고 지루한 철학책을 지금은 컴퓨터 옆에도 읽으려고 5권을 쌓아놓았다. 철학책을 직접 읽어보고 경험한 사람은 이 책들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친구가 없었을 때 철학 책이 내 질문을 받아주었고 말동무가 되어주었다. 마땅한 친구가 없었던 나는 책으로 오늘은 철학자, 내일은 사상가, 모레는 수필가를 만났다. 이것이 나의 고딩 그 시절의 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