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청소부다. 대학을 졸업한 26살, 젊다면 젊은 나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와 말을 트면 다들 이렇게 한 마디씩 한다.
“아니, 앞날도 창창한 사람이 왜 벌써부터 천한 일을 해?”
“거 젊은 사람이…….”
그들의 말에 나는 이렇게 대답하며 웃는다.
“직업에 귀천이 어디 있나요. 사람에 귀천이 있지.”
솔직히 나는 직업에 귀천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멍청한 이상주의자가 있다면, 당장이라도 내 옆에서 김칫국물을 뒤집어써봐야 정신이 번쩍 들 것이다. 나는 직원들이 분리 안 하고 버린 쓰레기 더미를 뒤지며 분리배출을 할 때마다 토마스 킬라일이 <의상철학>에서 한 말이 생각난다.
“그대는 왕의 망토를 입고 있건, 또는 거지의 누더기를 걸치고 있건, 그렇게 고달프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지 않은가?”
이 말을 왜 적었냐면 그냥 있어 보이려고 적었다. 그래도 솔직히 틀린 말이 아니다. 직업과 신분마다 고충은 분명 있다. 하지만 양복에 넥타이를 걸치고 쓰레기를 뒤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냄새나는 내 작업복과 출근하는 오피스맨의 양복이 서로의 신분을 말해주고, 그들에 손에 들린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내 손에 들린 빈 페트병이 서로의 귀천을 명백하게 해 준다.
분명 나도 저들과 같은 일을 했었다. 다만 직장에서 내부 고발을 했고, 그 후 보복성 인사 조치를 당했다. 죄는 저지른 사람을 벌하지 않고 물은 자를 벌했다. 나는 이 꼴이 더러워 내 발로 회사를 나왔다.
별로 안 궁금하겠지만, 내가 고발한 내용은 성추행이다. 흔히 있을 법한, 이사가 여직원 A를 성추행하는 현장을 목격했고, 나는 그걸 공론화했다. 돌이켜보면 섣불렀다. 나는 A에게 접근해서 사실을 추궁했고, A는 자신이 성추행당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래서 난 알량한 정의감에 불타올라 들고일어났고, 결과는 뭐 아시다시피다.
이 문제는 커지지 않았다. 이사와 A가 불륜 관계, 그러니 애초부터 A와 배를 맞춘 사이거나, 아니면 회사나 이사가 A에게 거절하지 못할 제안을 했거나, 혹은 협박을 했다거나. 뭐, 그건 중요하지 않다. 어쨌거나 나는 지금 재활용 쓰레기에 쑤셔놓은 담배꽁초를 빼내는 중이란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 결과는 어리석은 내 선택에 대한 벌일지도 모른다. 아니, 오히려 상일지도 모르겠다. 사람에 지쳤다. 차라리 쓰레기랑 뒹구는 것이 행복하다. 얘네들은 적어도 나를 속이지는 않으니깐. 그래도 뭐 불편한 것은 있다. 쓰레기를 치우면서 내 또래의 여성의 생리대와 피를 봐야한다는 점이다. 이런 현실이 서로를 불편하게 만들어 때로는 섬뜩하다. 물론 이 사실을 모른다면 상관은 없겠지만.
글이 장황했다. 결론. 법이 존재하는 이유는 세상에 치우기 힘든 쓰레기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지만, 정작 쓰레기를 해결하는 것은 법이 아닌 사람 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