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달 이야기 – 매듭달 지나고 적는 이야기

2025년을 마무리하며-

by 세라비

매듭달이 지나고

한 해는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끝자락에 서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이제야 조금씩 눈에 들어온다.

시간은 늘 그렇게,

한 발짝 물러나야 비로소 정리가 된다.

분명 다사다난한 한 해였다.

일도 많았고, 생각도 많았고,

마음이 앞서거나 잠시 주저앉았던 날들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돌아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감정은

피로보다 고마움이다.

매듭달의 마지막 밤,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며

집사님들과 한 해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서로의 자리도, 상황도 달랐지만

대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올해는 정말 빨리 갔어요.”

말속에는

정신없이 지나온 시간에 대한 실감도 있었고,

그럼에도 여기까지 왔다는

작은 안도의 숨도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의 끝에는

늘 감사가 남았다.

계획한 대로 흘러간 날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기다림이 길어졌던 순간도 있었고,

마음이 무거워

잠시 멈춰 서야 했던 시간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해를 지나 이 자리에 서 있다는 사실이

은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2025년을 한 단어로 정리해 본다면

나는 이렇게 남기고 싶다.

감사, 그리고 은혜.

새로운 일이 많아서가 아니라

무너지지 않게 붙들어 주셨기 때문에 남은 감사.

특별한 날보다

아무 일 없는 평범한 하루들이

사실은 가장 큰 은혜였다는 고백.

이제 2026년에 들어섰다.

새해라는 말은 언제나

새 출발을 떠올리게 하지만,

지금의 나는 조금 다르게 느낀다.

2026년은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라

2025년의 연속선 위에서

이제 정말 매듭을 지어야 할 것들을

정리하며 넘어가는 다음 장에 가깝다.

정리해야 할 마음들이 있고,

마무리해야 할 역할들이 있다.

그리고 다음 챕터로 넘어가기 위해

용기를 내야 하는 선택들도 기다리고 있다.

나는 늘 안정적인 삶을 추구해 왔다고

스스로를 정의해 왔다.

그러나 인생의 흐름을 찬찬히 되짚어 보니

그 안에는 생각보다 많은 모험이 있었다.

결혼을 했고,

이민을 선택했고,

정착의 시간을 지나

아이를 낳아 키우며

외국인이 아닌 거주민으로,

이제는 시민으로

이 땅에서 일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 아래

여러 자리에서 직분을 맡아 섬기게 되었고,

익숙함에 머물 수 없도록

삶은 계속 나를 바깥으로 이끌었다.

올해의 끝자락에 열어주신

케냐 사역 또한 그러했다.

내가 준비되었다고 느끼기 전에

하나님은 늘 한 걸음 더 넓은 자리로

나를 부르신다.

한계를 확인하게 하시고,

그 한계를 넘도록

조용히 등을 떠미신다.

매듭달이 지나고 나서야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하나님은 끝을 통해

언제나 다음 장을 준비하고 계셨다는 것을.

그래서 2026년을 향해

거창한 목표보다

이 마음으로 걸어가고 싶다.

이미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정리할 것은 정리하며,

부르시는 방향으로

담담히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삶.

매듭달은 끝났지만

그 달이 남긴 고백은

이제 새로운 열두 달을 살아갈

기준이 된다.

매듭을 지나

다음 챕터로.

은혜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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