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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말 Oct 02. 2022

속없는 열정

  살만해졌다는 것은 머리보다 몸이 먼저 안다고 내가 아는 누군가가 말했다. 작년의 나는 어떠한 일로 인해 무기력증이 심했고 특히 불안, 초조한 감정에 몹시 시달렸다. 초조함을 잊으려고 드라마만 줄곧 보았다. 드라마를 볼 때는 이야기에 빠져서 나의 상황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를 그토록 괴롭혔던 그 일은 아직도 해결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나는 점차 그 문제와 거리를 두고 있다. 힘든 시간들을 버티며 많은 생각들을 한 것이 영 쓸데없는 짓은 아니었는지 나의 삶에 드리우던 그림자가 서서히 걷혀갔다. 초조한 감정도 많이 잦아들었다. 나의 생존본능이 깨어나 이제 정신을 차리고 일상을 돌볼 때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내 일상에 활기가 돌기 시작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앞서 말한 일에 대한 나의 노력의 결과가 정말 좋지 않았던 이후이다. 황당한 결과였지만 그로 인해 세상 일이 다 이치에 맞게 돌아가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부단한 노력으로도 상황이 변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은 상황에서 더 이상 노력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일을 간절히 원하면 그 일은 오히려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는 것 같다. 애초에 이루어질 일이었으면 조바심 내며 기다리지 않아도 그렇게 될 것이다. 또한 불안은 내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을 예측하고 예감했을 때 주로 생기는 감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히려 마음을 비웠을 때 일이 잘 풀리기도 한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으며 기대가 없었는데 좋은 일이 일어나면 그것은 뜻밖의 선물이 된다. 어떤 일은 시간이 많이 걸리기도 하니 사소한 일에 일희일비하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동안 무기력증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그렇게 나를 괴롭히던 문제에 조금씩 초연해지면서 전에 하던 것들을 다시 할 수 있게 되었다. 책 읽기, 피아노 연습, 영어공부, 인터넷 강의 듣기, 요리 등. 나 자신을 성장시키고 도움을 주는 일이지만 의지력이 필요한 일들이다. 그중에서 가장 많은 에너지를 요하는 것이 피아노 연습이다. 그래서 나의 상태를 평가할 때 지표가 되는 것이 피아노 연습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이다. 피아노 앞에 앉을 마음이 난다는 것 자체가 내 상태가 꽤 괜찮다는 신호가 된다. 마음이 조금씩 안정이 되니 피아노에 앉을 힘이 났고 그렇게 조금씩 연습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전에도 연습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체계가 없었다. 이왕 하는 것 조금 더 계획적으로 해보고 싶었다. 맹목적인 연습을 할 것이 아니라 어떠한 목표를 가지고 연습을 하면 더 효율적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목표를 정했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인스타그램에 연주를 녹음해서 올리기로. 


  길을 가다가 좋은 풍경이 나타나면 동영상을 찍었다. 피아노 곡의 길이보다 짧으면 안 되니까 충분히 길게 찍었다. 그다음 동영상의 소리를 다 없애고 거기에 내가 녹음한 음원을 합해 새로운 동영상을 만들었다. 그렇게 정말 오랜만에 나의 연주를 녹음하기 시작했다. 짧은 곡이지만 연습과 녹음을 하는 데 며칠씩 걸렸다. 어려운 곡은 몇 주가 걸리기도 해서 미리미리 연습을 해놓아야 했다. 누군가가 내 연주를 듣는다고 생각하니 허투루 할 수가 없었다. 한 곡을 어떻게든 완성해야 하니 집중도가 높아졌다. 전에는 어떠한 곡을 연주하면 매번 같은 부분에서 틀렸었다. '다음에 더 자세히 오래 연습하지 뭐' 했다가 잊어버리고 나중에 연주하면 전과 같은 현상이 또 발생했다. 그래서 어떠한 곡도 완성시키지 못하고 맛만 보다가 연습이 끝나곤 했다. 하지만 곡을 녹음하겠다는 생각으로 연습을 하자 그러한 문제들이 해결되었다. 음악적 완성도는 다소 낮을 수 있지만 적어도 곡 전체적으로 비교적 수준이 고른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어느 한 부분만 잘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곡 전체적으로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녹음을 수십 번 해도 마음에 쏙 드는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실력이란 게 하루아침에 느는 것이 아니니 적정 선에서 그만두는 법도 배우게 되었다. 지친 상태에서 계속 녹음을 한다고 해도 더 좋은 음악이 나온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실수가 조금 있더라도 그대로 올리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어찌 되었건 최종 녹음본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수십 번의 녹음을 하는 동안 나는 크게 성장하고 있었다. 내 연주와 프로 연주자의 연주를 비교하면서 공부하다 보니 소리도 달라지고 표현력도 늘어 나 스스로 실력이 느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를 둘러보며 다양한 곡과 연주자를 알게 되는 건 덤이었다. 혼자 하는 공부지만 외롭지 않았다. 인친들이 응원을 보내고 수많은 대가들과 심지어 서울대 음대 교수님들 레슨까지 인터넷으로 만날 수 있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연습을 하다 보니 피아노에 대한 열정이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바람직한 방향이었고 기분도 좋았지만 조금은 당황스럽기도 했다.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거의 10년 이상 제대로 된 연습을 하지 못했고 그저 손 풀기용으로 가끔 두드려 보는 것이 전부였는데 어느새 고관절이 뻐근할 때까지 피아노 의자에 앉아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전에 연습하던 기억이 떠올라 뭉클해졌다. 입시를 준비하며 연습량을 채워야겠다는 부담감에 시달렸던 것, 학교 연습실에서 늦게까지 남아 시험 준비를 하던 기억 등이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피아노를 다시 열심히 한다고 해서 무얼 할까, 이렇게 가슴이 속없이 뜨거워지면 어쩌란 말인가. 내가 지금 알고자 하는 것은 배워도 써먹지 못할 수도 있는 것들, 돈벌이로 연결되지 못할 수도 있는 것들, 그러나 나를 즐겁고 뿌듯하게 만드는 것들, 나를 순간 한 차원 높은 곳으로 데려다 놓는 그런 것들이다. 초월적인 아름다움에 눈물이 날 것 같은 순간의 감정, 처음 음악을 전문적으로 알아가면서 새로운 것을 깨닫던 때의 설레었던 감정을 지금 다시 느끼고 있다. 


  목적이 없으니 더욱 즐겁다. 그저 좋아서 하는데 열정까지 생기니 감사하다. 더구나 미처 몰랐던 것들을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몰라도 되는 것이 아니었을까?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소중한 것들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것들을 너무 늦게 알았다는 깨달음이 오면 내 위치가 새삼 초라해진다. 현재 내 수준이 너무 적나라하게 파헤쳐져 아프기까지 하다. 오랫동안 연습다운 연습을 하지 않아 손은 굳었고 나의 삶은 이미 다른 일상에 익숙해져 있는데 나는 과연 이 연습을 통해 무엇을 얻으려는 것일까? 또다시 음악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나는 연습에 어느 정도 헌신할 수 있는가. 과연 내 시간을 들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그러나 그러한 생각을 하며 머뭇거리기에는 음악이란 것은 얼마나 깊은지. 알면 알수록 얼마나 재미있는지. 


  현재는 이렇게 피아노에 대한 마음이 커지고 있지만 언제까지 그 열정을 유지할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인생에 다른 큰 사건이 생기면 다시 피아노를 멀리 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쨌건 피아노 연주를 그만두지는 않을 것이다. 항상 그래 왔다. 피아노는 언제든 항상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필요할 때 기대고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존재였다. 조금 멀어졌더라도 내가 다가가면 다시 반갑게 맞아주는 마음이 넉넉한 친구처럼. 그렇다면 나도 할 수 있는 만큼 나를 피아노에 내어주어야겠다. 내 마음에서 조금 더 큰 자리를 주어야겠다. 성실한 학생이 될 테니 다시 한번 그 신비로운 세계로 들어갈 기회를 달라고 빌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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