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 앞의 선택

수많은 우연 속의 선택

by 이천우

우연 앞의 선택


어느 길이 꽃길인가?



최근 브라이언 클라스의 책 『Fluke: Chance, Chaos, and Why Everything We Do Matters』의 개요를 읽으며, 나는 오래 붙들고 있던 생각 하나를 다시 꺼내 보게 되었다. 우리는 흔히 인생이 자신의 노력과 의지에 따라 결정된다고 믿는다. 열심히 준비하면 좋은 결과를 얻고, 올바른 선택을 하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말은 맞다. 사람은 분명 선택하고, 책임지고, 버티며 살아간다. 그러나 브라이언 클라스가 거듭 일깨우듯, 우리의 삶은 그렇게 단순한 직선으로 설명되지는 않는다. 작은 우연 하나가 뜻밖의 방향 전환을 만들고, 사소해 보이는 계기 하나가 한 사람의 생애 전체를 다른 궤도로 이끌어 가기도 한다. 그는 우리가 사는 세계가 정교하게 통제되는 질서의 공간이 아니라, 우연과 상호작용, 복잡한 연결이 끊임없이 결과를 바꾸는 장이라고 말한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도 늘 그러했다. 누구를 조금 더 일찍 만났는가, 어느 시절 어느 도시에 머물렀는가, 우연히 집어 든 책 한 권이 있었는가, 그 하찮아 보이는 차이들이 시간이 흐른 뒤에는 돌이킬 수 없는 방향의 차이가 되곤 한다는 걸 많이 경험했다. 그때는 그저 스쳐 지나간 일처럼 보였지만, 세월이 지나 돌아보면 바로 그 사소한 흔들림이 내 삶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았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뒤늦게 그것을 하나의 이야기로 정리하며 “그때 그런 선택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 선택 이전부터 이미 수많은 우연이 삶의 조건을 만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클라스의 말대로라면, 우리의 인생은 의지의 산물인 동시에 수많은 ‘우연한 갈림길’의 결과이기도 하다.

나는 우연을 생각할 때마다 고교시절 교지 『군성』에 실렸던 ‘우연이 필연의 결과를 가져왔다‘란 고교 선배님의 글을 떠올린다. 그 선배는 6.25 동란 시대에 태어나 힘든 시절을 지나며 형편에 맞게 특차인 경북 사대 부설고등학교를 택했고, 시대가 요구한 현실적인 선택에 따라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여 군인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그 길은 끝내 자신의 옷이 되지 못했다. 의무 복무 기간을 마치고 전역 후 쉬고 있던 어느 날, 그는 우연히 대구 지역 유명 신문사의 기자 모집 공고를 보았고, 그 작은 계기가 그의 삶 전체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이후 그는 기자로, 논설 위원으로 오랜 세월 글을 쓰며 살아갔고, 마침내 지역 사회를 이끄는 오피니언 리더의 자리에까지 이르렀다. 누가 보아도 충분히 단단하고 성실한 삶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톨스토이와 같은 대문호를 꿈꿨으나 기자로 살았으니, “호랑이를 그리려다 고양이를 그린 셈”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 문장을 오래 마음 속에 새기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겸손도 아니고, 지나간 꿈을 향한 푸념도 아니었다. 오히려 삶의 실상을 끝내 외면하지 않은 사람의 고백처럼 내게 깊이 새겨졌다. 누구나 젊은 날에는 마음속에 한 마리 호랑이를 품고 산다. 더 크고, 더 빛나고, 더 완전한 자기 모습을 그린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사람들은 알게 된다. 삶은 처음 그린 밑그림대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때로는 더 작아지고, 때로는 비껴가고, 때로는 전혀 다른 모양으로 굳어진다. 그렇다고 그것이 곧 실패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선배는 대문호가 되지 못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오랜 시간 글을 쓰며 지역의 오피니언 리더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했고, 공적인 자리에서 자기 몫의 책임을 감당해 낸 삶은 결코 가볍다고 할 수 없다. 꿈의 크기와 삶의 무게는 언제나 같은 자리에 놓이지 않는다. 오히려 한 사람의 진실은 거창한 이상보다 오래 버틴 현실 속에서 더 또렷하게 드러나는 법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여기서 우연과 선택의 관계가 분명해진다. 우연은 문을 열지만, 그 문턱을 넘어가는 것은 결국 선택이다. 그리고 그 선택을 한 번의 결심으로 끝내지 않고 삶의 방향으로 굳혀 가는 것은 자신의 태도와 지속 가능한 힘이다. 클라스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예측 불가능한 상호작용들로 가득하다고 말하지만, 동시에 바로 예측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작은 행동들 또한 결코 사소하지 않다고 본다. 우연이 삶을 흔든다고 해서 인간의 응답까지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오히려 모든 것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아주 작은 선택 하나도 예상 밖의 파장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지나간 뒤에야 삶을 하나의 서사로 정리한다. “그 일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결국 이 길로 들어설 사람이었다” 같은 말로 과거를 매끈하게 다듬고 싶어 한다. 그러나 정작 그 순간에는 수많은 가능성이 동시에 열려 있었을 것이다. 내가 오늘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내 의지 덕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 뜻과 무관하게 허락된 조건과 우연 덕분이기도 하다. 내가 놓친 것 가운데는 내 부족함 때문인 것도 있지만, 애초에 내게 주어지지 않았던 자리도 있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사람들은 좀 더 겸손해질 수 있다. 자기 성공을 지나치게 과장하지 않게 되고, 타인의 실패를 너무 쉽게 재단하지 않게 된다. 인생은 개인의 능력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너무 많은 우연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폭풍우 속에서 수달은 어떤 길을 가는가?



더구나 우연은 누구에게나 같은 얼굴로 찾아오지 않는다. 같은 기회가 눈앞에 있어도 누구는 그것을 붙잡을 수 있고, 누구는 그러지 못한다. 그 차이는 결단력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사람마다 출발선이 다르고, 손에 쥔 기회의 장벽이 다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여러 가능성을 품은 채 살아가고, 누군가는 하루를 버티는 데에 삶의 에너지 대부분을 써 버린다. 그래서 인생을 오직 능력과 노력으로만 설명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성공을 온전히 자기 힘의 결과라고 말하는 것도 온전하지 않고, 실패를 모두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도 공정하지 않다. 우연은 모두에게 찾아오지만, 그것을 기회로 바꿀 수 있는 환경은 모두에게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자유가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나는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삶 전체를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내 앞에 놓인 순간마다 어떤 태도로 응답할 것인가가 더 중요해진다. 우연은 내가 고를 수 없지만, 우연 앞에서 어떤 쪽으로 몸을 기울일지는 여전히 내 몫이다. 물러설 것인가, 붙들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 끝내 걸어갈 것인가. 삶의 결을 만드는 것은 우연 그 자체보다 그 우연에 대한 응답인지도 모른다. 운이 방향을 바꾸는 바람이라면, 그 바람을 돛에 걸어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결국 자기 안의 결심일 것이다. 그렇기에 사소한 일이라도 진지하게 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돌아보면 내 삶도 그러했다. 내가 계획해서 얻은 것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예상하지 못한 만남이 길을 바꾸었고, 우연히 다가온 기회가 생각보다 오래 내 곁에 머물렀다. 반대로 놓쳐 버린 길은 아쉬움으로 남기도 했지만, 때로는 내가 어떤 사람이 되지 않기로 했는지를 알려 주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이제 나는 우연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운에 맡기지도 않는다. 내 삶을 완성하는 것은 우연 자체가 아니라, 우연 앞에서 내가 어떤 선택을 했는가 하는 문제라고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사람의 인생은 거창한 결심 몇 번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어느 날 문득 찾아온 기회 하나, 설명할 수 없는 우연한 만남 하나, 그리고 그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내디딘 작은 선택 하나가 인생의 방향을 조용히 바꾸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 선택이 하루를 만들고, 하루가 쌓여 세월이 되었으며, 세월은 마침내 한 사람의 인생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삶은 처음부터 완성된 설계도가 아니라, 우연이 열어 둔 길 위에 선택이 덧입혀지고, 그 선택 위에 시간이 천천히 결을 새겨 넣으며 만들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고, 모든 것을 다 통제할 수도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지금 내 앞에 놓인 작은 선택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사실이다.


돌이켜 보면 인생은 늘 예정보다 더 복잡했고, 기대보다 더 많은 굴곡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안에서 자기 몫의 길을 조금씩 만들어 간다. 우연이 흔들어 놓은 자리에서 아주 천천히 방향을 가다듬고, 무너지지 않으려 애쓰며, 끝내 한 걸음씩 걸어가는 일로 말이다. 어쩌면 삶의 품위란 그런 데서 생겨나는지도 모른다.

브라이언 클라스의 말대로, 우리가 사는 세계는 깔끔한 필연의 세계가 아니라 수많은 우연이 연결된 세계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삶도 완벽하게 설명되기보다는, 끝내 다 설명되지 않은 채 남는 부분을 품고 있는지 모른다. 설명할 수 없는 우연과, 그 우연 앞에서 망설이면서도 끝내 내디딘 선택들이 쌓여 이루어진다. 아마 삶은 그 둘이 서로를 밀고 당기며 써 내려간 긴 문장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도 그 문장 위에, 아직 끝나지 않은 다음 한 줄을 조용히 덧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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