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흔적과 자연
인간의 흔적과 자연은 서로 주고 받으며 변해간다
필자는 어린 시절 농촌에서 자랐지만, 이후 오랫동안 도시에서 살아왔다. 그래서 자연은 낯설지 않으면서도 어느새 조금 멀어진 세계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그러던 중 7년 전, 아는 지인이 마련한 10평 남짓한 텃밭을 2년가량 가꾸며 상추, 고추, 토마토 같은 야채를 심어 본 적이 있다. 처음에는 내 손으로 무언가를 길러낸다는 기쁨이 컸다. 작은 밭이었지만 흙을 만지고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일은 생각보다 정겹고 보람 있었다. 내가 기울인 정성만큼 생명이 자라나는 듯하여, 인간이 자연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소박한 믿음도 품게 되었다.
그러나 텃밭은 곧 다른 진실을 일깨워 주었다. 자연은 인간의 손길을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결코 인간의 뜻대로만 움직이지는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비가 한 번 내리고 며칠만 손을 놓아도 잡초는 무섭게 올라왔다. 일주일쯤 지나 다시 텃밭에 들르면, 내가 심어 놓은 야채들은 어느새 왜소해져 있고, 이름 모를 풀들이 밭을 뒤덮고 있었다. 애써 가꾼 작물은 기를 펴지 못하는데, 잡초는 거침없이 세력을 넓혀 갔다. 그러다가 큰비가 내려 텃밭을 한순간에 쓸어 버린 뒤, 필자는 더는 그 밭을 다시 일굴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때 비로소 야생의 힘, 특히 잡초의 질긴 생명력이 얼마나 거센지를 몸으로 실감했다.
그 기억은 오래 남았다. 인간은 밭을 일구고 씨를 뿌리며 자연을 다스린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잠시만 틈을 보여도 자연은 본래의 기세를 되찾았다. 그 무렵 필자는 자연을 하나의 대상으로만 보던 태도에서 조금 물러서게 되었다. 자연은 인간이 정리하고 통제하는 대상이기 전에, 인간과 무관하게 스스로의 질서와 힘으로 살아가는 세계라는 사실을 몸으로 배운 것이다.
이런 기억 때문인지, 필자는 5년이 넘도록 웅산 기슭에 사는 들고양이들에게 밥을 주면서도 늘 단순하지 않은 마음을 느껴 왔다. 그 고양이들은 처음부터 완전한 야생의 존재라기보다, 한때 인간의 손을 탔다가 어떤 사정으로 산기슭에 남겨진 존재들에 가깝다. 산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 삶의 출발점에는 이미 인간의 손길이 묻어 있다. 그래서 그들을 바라볼 때마다 필자의 마음은 늘 두 갈래로 나뉜다. 한편으로는 안쓰러워 외면할 수 없어 밥을 챙기게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저 생명들이 인간의 세계와 자연의 세계 사이의 경계 어디쯤 놓여 있는가를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고양이들을 자주 만나면서 필자의 눈은 웅산의 다른 생명들에게도 머물게 되었다. 웅산 기슭 소류지에 자주 나타나는 왜가리의 고고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고라니가 다녀간 흔적을 그냥 지나치지 않게 되었으며, 까치와 까마귀의 울음에도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참새와 개구리, 이름 모를 풀과 나무들까지도 전보다 새롭게 보였다. 웅산은 단지 사람이 오르내리는 산이 아니라, 저마다의 방식으로 생을 이어 가는 수많은 존재들의 삶터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돌아보면 그 무렵까지도 필자의 시선은 대체로 연민의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 불쌍하면 마음이 쓰이고, 다치면 안타깝고, 회복되면 기뻐하는 정도였다.
그래서 다친 야생동물을 치료한 뒤 다시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야생동물보호소 관련 TV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필자는 깊은 감동을 받곤 했다. 인간의 손길이 때로는 상처를 남기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회복을 돕는 힘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늘 마음을 울렸다. 상처 입은 생명이 기운을 되찾아 제자리로 돌아가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인간의 역할이란 결국 파괴가 아니라 돌봄과 책임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때까지 필자의 생각은 비교적 단순했다. 자연은 소중하고, 상처 입은 생명은 도와야 하며, 인간은 가능한 한 따뜻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최근 필자는 우연히 영국 Humanists UK가 운영하는 지성 잡지 사이트 New Humanist에서 Richard Pallardy의 글 「Call of the wild」를 읽게 되었다. 처음에는 길들여진 동식물이 다시 야생으로 들어갈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다룬 생태학 글쯤으로 여겼다. 그러나 읽어 갈수록 그것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더 깊고 복잡한 차원에서 다시 생각하게 하는 글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무엇보다 필자가 평소의 생각을 크게 흔든 것은 교잡(hybridization)과 유전자 도입(introgression)이라는 개념이었다. 교잡은 서로 다른 집단이나 가까운 종이 만나 섞여 자손을 만드는 일이고, 유전자 도입은 그렇게 생긴 자손의 유전적 흔적이 여러 세대를 거쳐 다시 한쪽 집단 속으로 스며들어 자리 잡는 과정을 뜻한다. 그리고 이와 함께 필자의 눈길을 붙든 것이 바로 야생 근연종(wild relatives)이라는 개념이었다.
처음에는 말이 조금 어렵게 느껴졌지만, 뜻은 의외로 단순했다. 사람이 기르는 작물 가까이에는 그 작물과 혈연적으로 가까운 야생식물이 있고, 사람이 길들인 동물 가까이에도 그와 가까운 야생의 친척이 있다는 뜻이었다. 다시 말해, 사람이 기르는 생물과 자연 속에 사는 생물이 완전히 끊어진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생각보다 가까운 관계로 이어져 있다는 말이었다. 필자는 이 대목에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인간이 돌보는 세계와 야생의 세계가 분명히 나뉘어 있다고 여겨 왔는데, 실제로는 그 둘이 가까운 자리에서 서로 맞닿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새롭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 개념을 이해하는 순간, 필자는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익숙한 표현이 얼마나 단순한 말이었는지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한 번 인간의 손을 거친 생물은 이미 이전과는 다른 존재이며, 그것이 자연 속의 가까운 친척과 섞이고 그 흔적이 이어지면, 자연은 더 이상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기 어렵기 때문이다.
여기서 텃밭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그때는 잡초의 힘이 대단하다고만 생각했다. 야생은 강하고, 인간이 가꾼 것은 연약하다는 정도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 글을 읽고 보니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인간이 심고 기른 작물 또한 야생과 완전히 따로 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이 기르는 식물 가까이에는 그것과 가까운 야생 식물, 곧 야생 근연종이 있을 수 있고, 그 사이에 섞임이 일어나면 인간이 골라 키운 성질이 야생 쪽으로 스며들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더 강하고 없애기 어려운 잡초가 생겨날 수도 있고, 인간에게는 유리했던 성질이 야생의 균형을 흔들 수도 있다. 예전에는 잡초를 그저 질긴 생명력의 상징으로만 보았다면, 이제는 인간의 선택이 자연의 흐름에 어떤 변형을 더할 수 있는지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필자는 여기서 비로소 텃밭에서 보았던 장면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 밭 안의 작물과 밭 바깥의 잡초는 완전히 끊어진 두 세계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인간이 심은 식물과 주변의 야생 식물은 서로 전혀 상관없는 존재가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가까운 친척일 수도 있었다. 인간이 가꾼 밭조차 사실은 자연과 인공이 날카롭게 갈라진 공간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경계의 자리였던 셈이다.
이 깨달음은 웅산의 들고양이들을 바라보는 필자의 눈도 바꾸어 놓았다. 그동안은 그저 버려진 존재인지, 아니면 자연에 적응해 살아가는 존재인지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고양이들이 단지 몇 마리의 생존 문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주변 생태계와 야생 집단 전체에 어떤 흔적을 남길 수 있는지까지 떠올리게 되었다. 집고양이와 가까운 야생 고양이들이 있고, 그 사이에 섞임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필자의 생각을 더 깊게 만들었다. 연민은 여전히 소중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따뜻한 마음은 출발점일 수 있지만, 자연을 이해하는 마지막 답은 아니기 때문이다.
식물과 동물의 여러 사례들은 이 생각을 더욱 굳혀 주었다. 인간이 농업을 위해 선택한 형질이 가까운 야생 식물, 곧 야생 근연종과 섞인 뒤 퍼지면서 더 강하고 제거하기 어려운 잡초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은 필자의 텃밭 경험과도 맞닿아 있었다. 양식 연어가 탈출해 야생 연어와 섞인 뒤 그 유전적 흔적이 퍼지면 번식과 이동의 리듬을 바꿔 놓을 수 있다는 사실, 스코틀랜드 들고양이가 집고양이와의 섞임을 거치며 결국 야생에서 기능적으로 멸종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사례 역시 무겁게 다가왔다. 이것은 단순히 몇몇 개체나 일부 종의 문제가 아니었다. 인간이 편의를 위해 만든 변화가 인간의 영역 안에서 끝나지 않고, 야생의 질서와 생존 방식 자체를 흔들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은 뒤 필자는 자신이 품어 온 따뜻한 감정들조차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불쌍하다고 느끼는 마음은 분명 소중하다. 그러나 자연을 대하는 태도가 거기에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존재를 돕는다는 일이 다른 생명에게는 어떤 결과를 낳는지, 인간의 개입이 당장은 선의처럼 보여도 더 긴 시간 속에서는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 함께 살펴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연은 인간의 선한 의지만으로 움직이는 세계가 아니며, 그 안에는 인간의 감정만으로 헤아릴 수 없는 복잡한 질서가 살아 있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비로소 자신이 왜 웅산의 들고양이들을 보며 늘 묘한 마음을 느꼈는지를 조금 알 것 같았다. 그것은 단지 안쓰러움 때문만이 아니라, 그 생명들 안에 인간의 책임과 자연의 질서가 함께 얽혀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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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 글은 필자에게 “순수한 자연”이라는 생각 자체를 다시 묻게 만들었다. 우리는 흔히 야생은 순수하고, 인간의 손이 닿은 것은 그 순수성을 해친다고 쉽게 말한다. 그러나 현실의 자연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서로 가까운 존재들 사이의 섞임은 자연과 인공의 경계를 흐리게 하고, 그 흔적은 오랫동안 남아 있게 된다. 그렇다면 자연을 지킨다는 것은 단지 과거의 순수한 상태로 되돌리는 일이 아니라, 이미 달라진 세계 속에서 무엇을 지켜야 하고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를 더 냉정하면서도 겸손하게 판단하는 일일 것이다.
결국 이 글을 읽고 필자가 깊이 느낀 것은 한 가지다. 인간은 자연 밖에 서서 자연을 내려다보는 존재가 아니라, 자연을 바꾸고 또 그 변화의 결과 속에서 다시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7년 전 작은 텃밭에서 잡초의 힘 앞에 놀랐던 경험도, 지금 웅산 기슭에서 들고양이들을 바라보며 느끼는 복잡한 마음도, 모두 이 한 사실로 이어진다. 인간이 남긴 흔적은 인간의 자리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밭의 작물과 잡초 사이에서도 이어지고, 사람이 기르는 생물과 자연 속 가까운 친척들, 곧 야생 근연종 사이에서도 이어지며, 유전자의 흐름을 따라 야생의 깊숙한 곳까지 번져 간다. 그렇게 자연은 인간의 흔적을 품은 채, 예전과는 다른 결을 이루어 간다.
그래서 이제 필자는 웅산의 들고양이들을 예전과는 조금 다른 마음으로 바라보게 된다. 여전히 안쓰럽고, 여전히 마음이 간다. 그러나 그 마음 위에 한 겹의 생각이 더 얹혀지게 되었다. 자연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지 불쌍한 생명을 돌보는 데서 끝나는 일이 아니라, 인간이 남긴 흔적이 자연 속에서 어떻게 이어지고 스며드는지를 더 깊이 이해하려는 일이라는 생각이다. 그 점에서 이 글은 필자에게 단순한 읽을거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다시 묻게 한 조용한 성찰이었고, 연민을 넘어 책임 있는 시선으로 나아가게 한 뜻깊은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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