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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켓 Mar 02. 2017

23 아이덴티티 (Split, 2016)

: 제임스 맥어보이만 남은 영화

*스포일러 있음


<23 아이덴티티>는 1977년 강간과 납치 등으로 교도소에 수감되었던 '빌리 밀리건'이 24개의 인격이 존재한다는 정신감정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은 실화를 모티브로 제작되었다. 그에 걸맞게 오프닝과 엔딩 타이틀 또한 가로 6*세로 4 칸으로 나누어져 디자인되었다.


-제임스 맥어보이
이틀 전, 제임스 맥어보이가 출연한 영화인 '필스'를 보았다. 내용은 조금 아쉬웠지만, 그때도 맥어보이의 연기력에 무척 감탄했었다. 나에게는 <원티드>, <엑스맨>으로 더 익숙했던 그였기에 필스의 폭발적이고 거친 성격은 굉장히 신선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필스를 본 많은 사람들은 제임스 맥어보이의 연기가 <필스> 전과 후로 나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것을 뛰어넘는 연기를 보여준 것이 이 영화가 아닐까 싶다. 24개의 모든 인격을 보여준 것은 아니었지만, 일부만으로도 약 2시간에 이르는 러닝타임을 끌고 가기에 충분했다. 그는 순간순간 바뀌는 인격을 물 흐르듯 유연하고 부드럽게 표정에 담아낸다. 그리고 어린아이의 불완전한 발음이나 여성의 섬세한 움직임까지 모두 표현한다.


<23 아이덴티티>에는 추격 장면이 타 스릴러 영화에 비해 많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쁜 숨을 몰아쉬게 되는 이유는 스크린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제임스 맥어보이의 흡입력 덕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제임스 맥어보이가 연기 한 데니스/패트리샤/헤드윅>


-인격
케빈을 가장 많이 지배하는 인격은 총 3명이다. 젊은 여자들을 벗긴 채 춤추게 하는 것을 좋아하고 강박증이 심한 데니스, 그런 데니스를 절제시킬 수 있는 패트리샤 그리고 혼나는 게 너무나도 무서운 9살 헤드윅. 그들은 다른 인격들에게 '패거리'라고 불린다.


한편, 단 한 번도 플레쳐 박사를 만나보지 못했던 데니스는 다른 인격들이 보낸 SOS 메일의 뒷수습을 하기 위해 해리인 척 연기를 하며 박사를 만나러 간다. 그리고는 유일하게 자신들의 존재를 믿어주는 박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어린 시절 엄마의 학대로 인해 생긴 강박증과 젊은 여자들의 불쾌한 장난이 불씨가 되어 '데니스'라는 자아가 생겨난 것 같다.


이런 이유들로 패거리는 상처 입은 자들은 순결하고 강하다 생각하며 고통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동안 갖지 못했던 '불꽃'을 빼앗으며 24번째 자아인 '비스트'를 기다린다. 가장 몸집이 좋은 데니스보다 키도 크고 더 강하다는 비스트. 박사는 다중인격을 가진 사람들은 생각만으로도 신체에 화학적인 변화를 가질 수 있다고 했는데, 영화 마지막을 보니 비스트는 그동안 지내왔던 동물원의 사자를 보고 만들어 낸 자아 같았다.


영화는 상처받은 영혼들이 더욱 강하다고 얘기한다. 케이시 역시 어린 시절부터 삼촌에게 학대당하며 자란 고통이 있었기에 비스트에게 맞서 싸울 수 있었고, 비스트는 그런 그녀를 순결하다(=강하다) 생각하고 돌아선다.
케빈에게 여러 개의 인격이 존재하는 이유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러나 과연 불빛을 독차지하려 싸우고 괴물을 만들어내며 안정적인 삶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 자신을 위한 일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자아로 태어나기 전의 '비스트'
해리인 척 박사와 상담을 하는 '데니스'


사실 이 영화가 끝난 뒤 누군가가 "그래서 말하고 싶은 게 뭐였대?"라고 묻는다면 해줄 말이 없을 것 같다. '상처를 받아 본 사람은 우월하다. 그러니 모든 상처받은 자들이여, 힘을 내자!' 이건 아니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면 괴물로 변할 수 있다.' 이것도 아닌 것 같고.. 속 빈 강정 느낌이랄까.


그런데 내가 정말 궁금한 것은 대체 누가 타인의 고통에 대해 정의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케이시와 친구들에게 납치와 감금이라는 고통을 '줘'놓고 그녀들은 '받은' 고통이 없다고 단정짓는 것은 얼마나 이기적이어야 가능한 발상일까?


다른 리뷰에서도 말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자신이 피해를 입었다고 해서 범죄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실제 인물은 무죄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누군가는 내게 그런 경험이 없으니까 이런 말을 한다고 느낄 수 있지만, 나에게도 잊을 수 없는 상처가 있다. 하지만 그것을 이겨내고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이 영화에서 말한 '상처받은 사람이 더 우월하다'라는 말의 참된 의미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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