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글로리와 회복적 정의

by 이 문

로크는 『통치론』에서 근대사회를 설계했다. 두 가지가 중요했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가 개인의 재산권을 간섭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과나무의 사과는 국가가 성립되기 전의 자연 상태이든 국가가 성립된 다음이든 소유자의 것이다.


반대로 개인을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은 국가에 귀속되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논리는 과도한 복수라는 무자비한 결과 때문에 개인이 행사할 수 없고 고도의 자격을 갖춘 국가 공무원(판사 및 검사)만이 행사할 것이었다. 그 결과 현대 법률 시스템에서 기소 및 처벌 권한은 국가에만 있다.


합리적으로 보이는 이 시스템에 많은 사람들이 불만을 가지고 있다. 시민의 입장에서 정의감에 부합하지 않는 판결이 많기 때문이다. 엄격한 증거주의 때문에 합리적 추측에 기댄 정의감을 충족시키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무엇보다 사건의 피해자에게 이 시스템은 큰 불만이다. 피해를 입은 사람은 재판이라는 무대에 증인이나 관객에 머무르게 된다. 싸움은 검사와 가해자(가해자의 변호사)의 것이 되고 사람들의 관심도 이 둘의 싸움에 집중이 된다. 많은 경우 피해자가 원하는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피해자가 그토록 원하는 진심어린 사과를 받는 경우도 드물다.


이명박 정부 시절 이주호 장관이 도입한, 그리고 지금도 도입하려고 하는 것은 이 사법적 시스템(형법 시스템)이다. 학생부 기록 유지는 전과 기록 유지와 유사하고, 가해 학생은 재판과 유사한 학폭위에서 그 가해 행위를 판단받게 된다. 차이가 있다면 인신의 구속이 없고 그것이 진짜 사법제도 안에서 다시 판단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 회복적 정의라는 것을 처음 강의를 통해 듣게 되었다. 회복적 정의의 요지는 이러하다. 응보적 정의(사법적 정의)가 가해자의 처벌에 관심을 갖는 것이라면 회복적 정의는 피해자의 회복이 가장 중요한 '정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복적 정의에서는 처벌 자체보다는 가해자의 처벌 과정에서 피해자의 회복을 위한 여러 방안 - 예를 들어 가해자와 피해자의 동의하에 대화, 사과를 진행하는 것-등의 강구를 강조한다.


내가 학교 현장에서 이런 이야기를 선생님들에게 했을 때 너무 이상적인 이야기라 하였다. 그리고 회복적 정의를 위한 활동가들을 이상주의자로 치부해버렸다. 하지만 내가 만난 회복적 정의 활동가들은 이상주의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현실주의자들이다. 그들은 모든 피해자들이 회복적 정의 프로세스로 치유될 것이라 주장하지 않는다. 다만 이들은 우리가 가져야 할 진짜 관심이 피해자에게 있음을 환기시킨다. 이것은 지극히 자명한 일이다. 그리고 사법적 정의 이외의 다른 대안을 원하는 피해자들의 요구와 함께 하고자 한다.


어찌보면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응보적 정의야말로 비현실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응보적 정의를 주장하는 이들은 가해자가 엄벌을 받아 시민과 피해자들의 복수의 감정이 해소되고, 피해자의 상처가 아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응보적 사법제도라는 것이 가해자(그리고 가해자가 고용한 변호사)와 검사의 법리 및 사실 다툼이 될 것인데 이 과정에서 가해자는 형량을 적게 받고자 가해행위를 축소하고자 하고, 심지어 피해자에게 잘못한 것을 양심의 법정에서는 알면서도 인간의 법정에서는 부정하는 행위도 하게 될 것이다. 결국 피해자는 자신의 피해가 인생에서 어떤 고통을 주는지 사과도, 위로도 받지 못하고, 원하는 형량의 처벌도 얻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응보적 정의가 온전히 실현되려면 근대 이전 혹은 근대 형성기의 가해자에 대한 공개 형벌, 고문, 공동체원들의 (침을 뱉는다거나 조롱을 하는 행위 같은)직접적인 비난을 하거나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처럼 사적인 보복행위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인권을 강조하는 현대사회에서 이것이 실현될 가능성은 크지 않겠다.


더 글로리에 사람들이 열광한 이유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사적 보복에 따른 카타르시스 때문이라 생각된다. SF 영화를 보며 우주 탐험에 대한 대리 만족을, 멜로물을 보며 꿈꾸었던 사랑을 대리 충족하는 것과 비슷하겠다.


시즌 2를 새벽까지 보며 느낀 점은 김은숙 작가의 섬세함이다. 김은숙 작가가 회복적 정의를 주장하는 것도 아니고 이 드라마는 기본적으로 복수극이지만 피해자 문동은의 두려움, 좌절, 아픔, 고통, 분노가 드라마 전체를 관통한다는 점에서 피해자의 복수 행위가 아니고 피해자 자체가 주인공으로 묵직하게 다가온다. 많은 피해자들이 이 드라마를 통해 치유되는 감정을 느꼈지 싶다.


극 전개 중에도 이런 작가의 섬세함과 숙고가 돋보인다. 문동은은 cctv를 통해 자신의 집에 신발을 벗고 들어온 박연진의 남편 하도영을 보고는 박연진에게 인간의 예의를 지킨 남편을 말하며 모든 것을 진심으로 반성하고 경찰에 모든 것을 밝히면 이 복수를 멈출 것이라 이야기한다. 그리고 문동은을 사랑하는 의사 주여정은 하도영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피해자들이 잃어버린 것중에 되찾을 수 있는 게 몇 개나 된다고 생각하세요?

나의 영광과 명예. 오직 그것뿐이죠?

누군가는 그걸 용서로 되찾고, 누군가는 복수로 되찾는 거죠.

그걸 찾아야만 비로소 원점이고 그제야 동은 후배의 열아홉 살이 시작되는 거니까요.

저는 동은 후배의 그 원점을 응원하는 겁니다.그 사람은 그저 지금보다 조금 덜 불행해지려는 것뿐이거든요.


내가 느낀 것은 복수의 카타르시스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이 응보로 끝나든 사죄와 용서로 끝나든 그 시작과 결말이 시민의 호기심과 정의 감정의 충족이 아니고 온전히 피해자가 주인공이 되어 피해자의 상처가 회복되는 정의가 이루어저야 한다는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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