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보지 않는 교육을 하고 싶다
본 글은 서현수 교수의 프레시안 기고를 글 위주로 다시 정리한 것으로 원본은 아래 링크를 통해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3122910233530326
서현수 한국교원대학교 교육정책전문대학원 교수
2023년이 다 저물었다. 다사다난하지 않은 해가 있을까. 그러나 2023년은 안팎의 여러 심각한 위기와 사건들이 겹쳐 일어나며 한국의 민주주의와 시민 공동체가 발 딛고 서 있는, 위태로운 현실을 새삼 돌아보게 했다. 2023년의 시공간에 새겨진, 잊지 말아야 할 사건들 가운데에는 지난 7월 발생한 서울 서이초 교사의 죽음과 그 뒤 이어진 교사들의 연속적인 자살 사태도 있다. 일부 극성 학부모의 과잉 민원과 고소 고발의 남용 또는 위협 등에 시달린 교사들이 극단적 선택을 통해 생을 마감했다. 신자유주의적 소비자 사회의 도래와 불평등 체제의 재심화 경향이 뚜렷한 오늘날 세계 어느 곳에서나, 그리고 한국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공통되게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비교적 안정된 직업적 조건과 존경받는 직업으로 인식돼온 교사와 교직에 가해지는 새로운 압력과 그 충격의 강도에 동료 교사들은 물론 많은 시민들이 놀랐다. 이토록 문제가 심각했다니! 극
단적 선택을 결심한 교사들이 고통 속에서 홀로 방치되어 있을 때 나는, 우리는 무엇을 하였는가, 되물으며 집단적 성찰과 항의의 불꽃이 켜졌다.
'인디스쿨'이라는 한 온라인 플랫폼에서 결집한 초등학교 'MZ 세대' 교사들을 중심으로 서이초 사태의 진상 규명과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교사 집회가 연달아 개최되었다. 특별한 조직도, 재정도, 이데올로기도 없이 무수히 많은 '점'과'점'으로 이어진 교사들의 외침이 터져나왔고, 이들의 자발적 조직화와 연대를 통해 가능하지않을 것 같던 일들이 벌어졌다. 횟수를 거듭하던 교사 집회는 9월 2일 절정에 달해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 약 30만 명이 집결하는 일이 벌어졌다. 전국의 교사 숫자가 약 50만 명인 사실을 감안하면 전체 교사의 절반이상이 참여한 것으로 추산되는 대규모 집회가 성사된 것이다. 그 기세를 이어 9월 4일에는 교사들이 제안한 '공교육 멈춤의 날'이 선포되어 다시 한 번 대규모집회가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개최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사태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할 교육부가 교사들의 집회 참여를 제지하기 위해 징계 방침을 발표하면서 현장의 갈등과 혼란이 벌어졌다. 교육부에 대한 항의와 비판이 교사들은 물론 각계에서 쏟아졌고, 결국 교육부는 징계 방침을 철회했다. 집회를 주도해온 교사들의 집합적 승리였고, 변화의 새로운 주체로 부상한 이른바 MZ 교사들에 대한 언론의 조명도 이어졌다. 이로써 서이초 사태와 9.2, 9.4집회는 하나의 역사적, 정치적 사건이 되었다.
교사들의 유례없는 결집력과 사회적 공분에 반응하여 2023년 9월 21일 국회에서 이른바 '교권4법(교원의 지위 향상및 교육활동 보호를 위한 특별법, 초중등교육법, 교육기본법, 유아교육법')의 개정이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개정 법률들은 일부 학부모의 과도한 민원으로부터 교사를 보호하고, 교원의 정당한 생활지도를 아동학대의 범주에서 제외되도록 하는 등의 내용을 담았다. 10월 18일 정부는 교사들의 담임수당과 보직수당 인상 등 교사들의 처우 개선 방안도발표했다. 12월 8일에는 아동학대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도 개정되었
다. 이로써 7월 서이초 교사의 죽음이 알려진 이후 촉발된 교사들의 집합 행동과 이에 반응하여 일어난 법적, 제도적 개선 작업이 대체로 일단락되는 분위기이다. 말하자면, '위기 끝! 일상복귀!'의 국면인 것처럼도 보인다. 그러나 지금까지이루어진 일부 제도와 정책 개선을 통해 급한 불은 껐을지 모르지만, 이미 심각한 붕괴 위기의 징후를 보여온 한국의 교육과 학교 공동체의 문제들이 일거에 해소되고 새롭고 희망적인 미래교육체제로 이행할 것이라고 낙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교사의 제한된 정치적 시민권도, 한국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과 양극화 현상도, 과도한 대학입시 경쟁체제가 부추기는 공동체적 관계의 황폐화도, 교장·교감 리더십의 취약성과 신분적 제약도, 무엇보다 교육과정을 비롯한 교육정책 결정 과정 전반에 대한 교사와 교사단체의 참여 기회 결핍과 톱-다운 방식의 권위주의적, 폐쇄적교육정책 결정 구조도 여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다시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교육과 학교 공동체는 지
금 어디에 서 있으며,앞으로 어디를 향해 나아갈 것인가? 1980~90년대의 국가 민주화 과정과 맞물려 전개된 '교육 민주화'의 길과 2010년대 지방교육자치의 물결을 타고 확산된 '혁신 교육'의 길을 지나 2023년 서이초 사태와 9·4 집회 이후 새로운 변화를 이끌 잠재력 있는 주체로 부상한 MZ 교사들은 어떤 교육개혁의 전망을 제시하고 또 실천해갈 것인가?이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한 하나의 의미 있는 시도가 지난 가을 세종시에서 전개되었다. 세종시교육청 교육정책연구소가 주관하여 관내 학교에서 근무 중인 신규, 저경력 교사를 대상으로 한 교사숙의포럼을 진행한 것이다. 파일럿 성격의 실행연구로 진행된 이 실험에서 필자는 연구책임자로 참여해 숙의 포럼의 구성, 운영 전반에 관여한 뒤 그 결과를 보고서로 정리해 발표했다. 서이초 사태와 9·4 집회 이후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관련 입법 등 후속조치가 잇따랐지만 이번 사태가 갖는 역사적, 정치적 사건으로서의 의미가 제대로 숙고되지 못하고 있다는 반성, 그리고 무엇보다 현장의 핵심 당사자이자 미래 교육 변화의 주인공이 되어야 할 MZ 교사들의 목소리와 관점이 한국 사회의 민주적 공론장에서 제대로 들려지고 소통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실험은 출발했다.
''9.4 집회' 이후 학교교육과 교육공동체의 미래에 관한 세종 MZ 교사 숙의포럼 실행 연구'로 명명된 이 실험에 교육청공모에 응한 25명의 교사들(근무경력 10년 미만, 대부분 초등교사)이 참여했다. 10월과 11월, 선정된 교사들이 참여한 세 차례의 숙의 워크숍이 열렸다. 연구진은 교사들의 관점과 요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토론되게 하는 데 역점을 기울였고, 다행히 교사들도 마음을 열고 자신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드러내고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적극적으로 토론에 임해 주었다. 교사들이 무엇보다 '눈치 보지 않는 교육'을 하고 싶다는 바람을 피력할 때, 그리고 자부심과 기쁨의 원천이던 교실이 서이초 사태 이후 하나의 '감옥'처럼 느껴졌다는 말을 들을 때 필자 역시 안타까움을 금할 수없었다.
포럼에서 확인한 결과들 가운데, 현장에서 교사들을 힘들게 하는 첫 번째 문제를 꼽으라면 단연 '민원, 민원, 민원!'이었다. 수업을 설계하거나 체험학습을 준비할 때도 교사들은 학부모의 민원을 걱정하며 자주 움츠러들며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토로하였다. 교사가 되기 전 꿈꾸었던 교육 전문가로서의 자율성을 발휘하는 일은 어느덧 상당한 용기를 요하는 일이 되고 있으며, 그저 교과서 중심의 표준적 방식을 안전하게 고수하게 된다며 안타까워했다. 학부모 민원이제기될 때 내용도 제대로 따져 묻지 않고 일단 수용하라는 식의 교육청 방침이나 교사를 제대로 보호해주지 못하는 학교장 등 관리자들의 약한 리더십에 교사들은 불만과 불신을 표출했다. 거꾸로 책임감 있는 리더십을 발휘하는 학교장이나 선배 교사들에 대해서는 높은 신뢰와 존경도 표했다. 교사들은 학부모와의 소통과 협력은 필요하다고 인정하면서도 지금처럼 주말과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개인 휴대전화를 통해 전화, 문자, 메신저 등을 주고받아야 하는 무한 서비스 방식에 대해 깊은 피로감을 나타냈다. 학부모들에 대한 일정한 교육과 연수를 교육청 차원에서 의무 실시하거나학부모 소통 채널을 공식화해줄 것을 교사들은 요구했다.포럼을 통해 교사들이 교육과 지도의 난이도가 높은 경계성 행동장애나 학습 어려움이 있는 학생들을 점점 더 많이담당하고 있으나 학교와 지역사회 차원의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학생 상담지원 시스템이 없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음도 확인되었다. 서이초 사태 이후 불거진 한 특수교사와 유명 학부모 간 갈등이 드러낸 것처럼 여기에도 한국 사회의 많은 문제점과 쟁점이 걸려있다. 급격한 기술 및 사회변동의 과정에서 특별한 필요(special needs)와 학습 어려움을 가진 학생들이 계속 늘고 있지만 이들을 위한 효과적 교육, 지원 시스템에 대한 공적 투자는 여전히 더딘 가운데 교실 현장에서 교사와 학부모 간 갈등 양상이 깊어져 온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아이를 누구보다 오랫동안 관찰하고 이해하는 현장 전문가로서 교사의 권위와 전문성이 존중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교사들은 안타까워했다. 아울러 교대 교육과정 등에서 수업에 필요한 지식 외에 현장의 복합적 상황과 실무적 요구에 대한 대처 능력을 길러주는 실용적 프로24. 1. 19. 오후 3:36 관점이 있는
그램이 강화될 필요가 있으며, 교사로서 입직한 뒤에도 수업 외 다양한 경험과 동료 및 선배 교사들과의 소통(전문학습공동체 등)을 통해 실천적 노하우를 습득할 수 있는 기제가 확대되어야 한다는데 참여 교사들의 인식이 모였다.
9.4 집회 이후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을 질문하자 교사들의 대답은 서로 엇갈렸다. 그래도 학부모와 학생들이 더 조심하는 것 같다고 말하는 교사가 있는 한편, 예전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교사도 있었
다. 기대감이 컸던 9월 4일 이후 찾아온 9월 5일과 6일의 일상이 전과 별로 다르지 않아 실망했다는 의견도 나왔다. 오히려 9.4 이후 일부 학교에서 관리자와 평교사, 선배 교사들과 MZ 교사들 간의 반목과 갈등이 심화되는 안타까운 현실도 보고되었다. 그럼에도 여러 참가자들이 9.4 이후 다른 무엇보다 교사인 나 자신이 변화했고, 전보다 더 강한 자신감과 실천 의지를갖고 교사로서, 그리고 교육공동체와 시민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임하게 되었다는 소회를 표출하였다. 그러나 교사 개인의 공적 참여 경험과 자신감 고취가 교사라는 집합적 주체의 공적 참여 확대와 교육정책 결정에 대한 실질적 영향력 증대로 이어질 것인가는 아직 불분명하다. 교육과정을 비롯한 교육정책 결정 과정에 대한 교사 참여 확대의 필요성과 현실화 방안에 대한 교사들의 토론은 단편적인 문제제기 수준을 넘지 못한 채 자주 길을 잃고 멈춰 섰다. 교사의정치적 시민권을 가로막는 법적, 제도적 제약이 여전한 가운데 교사들 자신의 정치적 리터러시와 권리 주체로서의 의식이 높지 않고, 민주주의와 교육정책 결정 과정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큰 숙제인 셈이다.
정치학 박사학위 공부를 위해 핀란드에서 유학하고 그 뒤 핀란드의 민주주의와 복지국가 그리고 교육·사회정책을 꾸준히 연구해온 필자로서는 이번 교사숙의포럼을 진행하면서 어쩔 수 없이 핀란드의 교육과 학교공동체의 현실이 대비되어 떠올랐다. 21세기 들어 국제적인 교육강국으로 부상한 핀란드는 자주 한국의 입시위주 교육현실과 대비되어 학생들의 평등하고 우수한 학업성취도와 높은 행복도가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안적 사례로 오늘날까지 계속 거론된다. 그러나 핀란드의 성공적인 교육체제를 낳은 것으로 평가받는 1960-70년대의 9년제 종합학교 교육개혁이 같은 시기 핀란드 정치체제가 합의적 민주주의로 이행함과 동시에 노사정 대타협에 기초한 보편적 복지국가를 건설한 것과 긴밀히 연관된 사태라는 사실에 주목하는 교육계의 논의는 여전히 부족하다. 일례로 이 시기 새로운 학교 현장의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핀란드는 특수교육의 개념을 전면 혁신하고 특수교사의 수를 1970년대 동안 10배나 늘리는 대규모 공공재정 투자를 단행하였다. 또한 1970년대에 핀란드는 교원양성체제를 전면 개혁하여 종합대학교의 5년제 학·석사 통합 프로그램을 이수한 뒤 종합학교 교사자격을 취득하도록 개편하였다. 이는 장기적으로 핀란드에서 교직과 교사가 높은 자율성과 전문성을 발휘하면서 폭넓은 사회적 존경과 인정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기초를 제공했다. 나아가 오늘날 핀란드 교사들은 지방의회 선거는 물론 국회의원 선거에 폭넓게 참여하고 실제로 많은 수가 정치적 대표로 선출, 활동하는 중심 사회집단으로 교사-시민의 공적 책무를 활발히 수행한다. 국가교육과정과 지역교육과정의 수립, 개정 절차 전반에서 개별 교사와 교사단체의 참여는 매우 광범위하게 그리고 다층적으로 보장되며, 이는 교육과정 등 교육정책에 대한 핀란드 교사들의 주인의식(ownership)과 자율성 발휘에 다시 기여한다. 1980년대 이래 자율화, 분권화 등 새로운 교육정책 거버넌스가 추구되는 과정에서 핀란드의 교육주체들은 자율,책임, 신뢰, 협력, 소통이 선순환하는 하나의 혁신적 정책 생태계를 구축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교육과 교육정책은 현대 핀란드 민주주의와 시민사회 그리고 복지국가의 핵심 기둥이자 주춧돌로 여겨지고 있으며, 교육과
교육개혁의 중요성에 대한 핀란드 사회 세력들 간의 폭넓은 정치적 합의는 오늘날까지도 높게 유지되고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핀란드에도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며, 오늘날 핀란드의 학교와 교사들도 새로운 도전과 압력
에 직면하여 다양한 어려움과 대책 마련을 호소한다. 그럼에도 2023년 한국 사회가 경험한 서이초 사태와 같은 교육공동체 붕괴의 징후는 아직 발견되지 않으며, 교사와 교사단체 스스로 적극적인 대안을 찾고, 요구하며, 실천하는 역동적 민주주의와 시민사회의 행위 주체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모습이다. 서이초 사태와 9.4 집회는 한국의 교육, 민주주의, 시민성 그리고 복지체제가 하나의 중대한 분기점 또는 기로에 서 있음을 극명하게 드러낸 하나의 역사적, 정치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2023년과 2024년의 시간이 교차하는 지금, 한국의 교사들과 시민들은 새로운 질문 앞에 마주 서 있다. '학교와 교육공동체가 통제, 무책임, 불신, 대립과 반목이 악순환하는 회색 불모지가 되지 않고 자율, 책임, 신뢰, 협력 기반의 새로운 관계 공동체로 거듭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일부 학부모의 과잉민원과 이에 대한 방임, 그리고 교사에 대한 인권 침해의 악순환 체제를 끊고, 교사 전문성과 권위가 널리 존중되고 동시에 적극적 학생 상담지원 시스템이 구축, 운영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9.4 집회 이후 학교와 교사 공동체는 참여, 열정, 숙의적 대화와 실천을 통한 혁신적 학교 문화로 진화할 것인가, 아니면 변화에 대한 회의, 비관, 고립, 무관심, 각자도생 문화로 도태될 것가?' 이 질문들에 어떻게 응답해 가느냐에 따라 다음 세대의 한국 교육과 학교 공동체 그리고 민주주의의 미래 향방
이 달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