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 문 May 11. 2024

우리는 최소 합의에 도달할 수 있을까?

보이텔스 바흐 합의와 민주시민 교육(심성보 외,  북멘토)를 읽고

                                                                                                           이봉수(2024.4.11.)


기억 1

   2016년 징검다리 교육공동체가 주최하고 서울시 교육청이 후원하는 한국판 보이텔스바흐 합의 추진을 위한 전문가 집담회'에 참석하였다.  집담회의 목적은 보이텔스바흐 합의의 방식처럼 다양한 이념의 교육 단체들의 합의를 모색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평소 논쟁 수업이 시민 교육의 매우 중요한 방법론이라고 생각해서 좋은 교사운동(기독 교사 시민단체)의 대표로 참석했다. 

  이때 처음 보이텔스바흐 합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보이텔스바흐 합의(Beutelsbacher Konsens)는 1976년 독일의 보이텔스바흐에서 교육자들과 정치 학자들이 모여 합의한 정치 교육의 원칙이다. 이 합의는 세 가지 주요 원칙을 포함하고 있는데 교화 금지, 논쟁성 재현, 학생 이익의 고려가 그것이다. 

  시민 교육의 방법으로 안전한 논쟁 수업의 기준을 합의한다는 점에서 이 집담회가 큰 의의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실제 어떤 합의가 형성되지는 않았다. 


기억 2

  2019년 인헌고 사태가 발생했다. 성평화연대라는 극단적 반페미니즘을 표방하는 동아리의 처분 문제로 비롯된 갈등에서 교사들이 정치적, 사상적 강요를 했다는 주장이 있었고 이를 둘러싸고 좌우 단체들의 극한 대립이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이에 대응해 서울시교육청은 사회 현안 교육의 원칙을 마련하기 위한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토론회는 참가자 80여명이 토론을 거쳐 모바일 투표로 합의하는 방식이었다. 쟁점 교육의 원칙으로 ‘일방적 주입 및 교화를 지양하고 학생 스스로 결론에 도달하도록 하기’, ‘다양한 정보와 의견을 공유하고 스스로 입장을 정하게 하되 타인의 인권을 침해하’', ‘교사의 중립 준수’ 등을 정했다. 하지만 이 원칙이 지금 현장 논쟁 수업의 중요한 원칙으로 영향력을 끼치지 않고 있다. 


  보이텔스바흐 합의가 이루어지기 전의 과정, 보이텔스바흐 합의가 형성되고 확산되는 과정, 그리고 이후 논의들에 관한 것들을 읽어보니 의미있게 진행된 협의의 노력이 왜 실패로 끝났고 말았는지 이해가 된다. 핵심은 ‘진정한 합의란 무엇인가’에 있다. 보이텔스바흐 합의의 형성 및 확산 과정은 진정한 합의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보이텔스바흐 합의 이전의 독일 

  종전 이후 독일 사회에서 교육 철학 및 방법에  급격한 변화가 없었다. 미국식 새로운 교육이 독일의 교육을 대체한 것이 아니라 나치 이전 교육의 복귀가 주된 과제였던 것이다. 1950년대 들어서는 신생민주국가로서 의식 및 문화적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하지만 교육에 있어서 이는 적절히 실현되지 못했다. 교육은 주로 동독에 맞선 서독 정치 질서에 대한 옹호 및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 정도에 그쳤으며 사회 내적인 비판이나 자국사에 대한 근본적 성찰은 용납되지 않았다.

   1960년대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중심으로 신좌파 사상이 등장되고 급진적 학생운동과 청년 저항 운동 등의 영향을 받아 비판적 교육학 이론이 확산되었다. 이는 정치 교육을 둘러싼 진보세력과 보수세력간의 극렬한 대결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런 극렬함은 반대로 교육 현장에서 &실용주의적 전환'을 통한 적합한 정치 교육의 요구를 확산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1976년 보이텔스바흐 합의가 이루어지게 된다.


보이텔스바흐 합의 그리고 확산

  교육 현장의 혼란을 조정하려는 시도는 독일 남부에서 시작되었다.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정치 교육원 원장인 지크프리드 실레는 독일의 대표적 교육이론가들을 보이텔스바흐로 초청해 이틀간 치열하게 논쟁하고 토론하게 했다. 진행 과정이 재미있다. 바덴뷔르템베르크 주는 기민당이 장악한 지역이었고 실레도 보수적 교육학자였다. 그를 도왔던 슈나이더는 하이델베르그 정치학과 교수였다. 이들은 정치 교육이 정치 투쟁과 당파 이익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토론 내용을 정리한 사람은 한스게오르크 벨링 박사였는데 벨링 박사는 공교롭게 급진파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도 주입으로서의 교육은 반대했다. ‘정치 교육의 합의 문제’라는 제목으로 5명의 이질적 정치교육 이론가들이 보이텔스바흐 토론회에 참여해 각기 교육 입장을 발표했다. 인원은 최소로 했는데 ‘최소 합의’를 위해 토론하기에 적절한 인원이었기 때문이다. 발표를 의뢰받은 학자들이 보이텔스바흐로 달려온 것은 실레의 명성이나 열정 때문이 아니고 ‘합의’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이들은 정치교육을 둘러싸고 전개된 격렬한 갈등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점에 공감했다. 하지만 토의 과정은 격렬했다. 보수 학파는 기본법과 헌법의 수호를 강조했다. 해방의 이론은 다원주의를 위협하는 위험한 것으로 취급했다. 중도와 진보는 다원주의의 원칙을 천명한 기본법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것이 다원주의적이지 않고 억압적일 수 있다는 주장을 하였다. 결국 학생들의 관점에서 학생들이 도구화 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최소 합의의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 갔고 학생들이 도구화 되지 않을 실천 방안의 합의를 이루는 데까지 나아갔다. 

   토론회가 열린 지 1년 뒤인 1977년 실레와 슈나이더와 벨링은 토론회 발표문을 수정 보완하여 단행본으로 발표했다. 이때 벨링은 토론의 요약을 넘어 자신의 관점을 덧붙여 정리했다. 핵심은 정치교육의 도구화를 피하고 학생 중심의 교육 원칙을 잡는 것이었다. 벨링은 보이텔스바흐 합의라는 말을 썼지만 세 원칙을 규정한 것은 아니었다. 정리와 수용의 과정 중 참석자들이 별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면서 보이텔스바흐 합의는 자연스럽게 정치교육의 현장에서 인정되었다.


보이텔스바흐 합의 이후의 논쟁점

 보이텔스 바흐 합의 3가지 원칙의 의의는 다음과 같다.  강압 금지는 학습자를 훈육 대상으로 봐서는 안되고 주체적 인지와 사유 능력을 갖춘 주체로 보자는 것이었다. 이 원칙은 과거 부터 강조되어 온 것이지만 ‘강압 금지’를 벨링이  천명하고  다른 이들이 명확히 합의했다. 논쟁성의 원칙은 학문과 정치에서 다투는 쟁점은 학교와 수업에서도 논쟁적으로 재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와 학문의 논쟁점이 교육 현장에서 배제되고 선택과 대안적 사유의 가능성이 사라지면 특정 이념화로 가는 길이 열리는 것으로 보았다. 학습자 이익 상관의 원칙은 학생들은 정치 상황과 자신의 이익 상태를 분석할 능력을 가질 수 있도록 안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합의가 널리 확산된 이유는 홍보의 결과가 아니고 내용의 설득력 때문이었다. 이 원칙은 원칙의 천명 이전에도 이미 독일 사회에서 심도 있는 주장으로 제시되고 존재해 왔던 것이어서 보이텔스바흐합의는 일종의 공명 현상으로 볼 수도 있다. 

 이 원칙들에 비판도 있어왔다. 교사의 역할이 너무 수동적인 것에 머물지 않는가 하는 비판이 있었다. 학생 이익은 공공선과의 충돌 문제가 제기 되었다. 좀 더 근본적인 고민들이 있었는데 이는 교육학적, 현실적 고민과 관련이 깊다. 

  논쟁성 원칙의 경우를 보자. 모든 논쟁이 학교에서 다루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다루어질 논쟁의 경계선이 필요하다. 소소한 무시할만한 것들까지 다루어질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누가 그것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 무엇이 더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것이 논쟁적이 될 수 있다. 다루어야 할 논쟁의 규범적 범위도 논쟁적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명백히 인권의 무시와 관련된 논쟁을 다루어야 하는지의 문제다. 이런 논쟁의 해결책으로 헌법적 가치 안에서만 논쟁의 원칙을 끌어들여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헌법 안에서도 논쟁적인 것이 있으므로 헌법만을 기준으로 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교육학적으로 볼 때 인권을 무시하는 것을 논쟁으로 끌어들이려는 학생이 존재할 때(예를 들어 난민을 내쫓아야 한다는 주장, 인종차별적 주장)이들이 어린 학생이므로 비난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침묵해서도 안된다.

  교육 상황으로 들어가 좀 더 섬세히 들여다보면 강압은 강압적 주장을 교사가 하는 것만 해당되지 않는다. 교사가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지 않으면서 특정 지식을 당연한 것처럼 가르치는 것이 강압일 수 있고, 특정 인물을 영웅시하는 것도 강압일 수 있다. 

  학습자의 이익이 공공선과 충돌하는 문제 외에 교육적 경계 안에서 학습자의 이익 실현이 어디가지 이루어져야 하는지도 논쟁적일 수 있다. 독일의 정치 교육학 논의에서 가정된 시민상은 ‘성찰적 관찰자’, ‘참여 능력 보유 시민’, ‘능동 시민(지속적 정치 참여 시민)’이다. 어떤 시민상이 적합한지는 대의민주주의자와 참여 민주주의자들 사이에 이견이 존재한다. 특히 학교는 제한된 교육과정(교육시간, 공간 등)안에서 정치 교육이 이루어진다. 현실의 교육과정에서 지속적으로 능동시민적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는 쉽지 않다. 정치  수업이 정치 행동까지 이어지기 어려운 이유다. 한 편 정치 수업이 모의 활동 같은 참여 능력 보유 시민, 나아가 정치 행동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주의할 점이 있다. 학생 이익의 관점에서 보자면 정치 행동이 강요되거나 참여하지 않았다고 해서 비난 받으면 안된다. 모의 활동에서 역할 활동이 학생의 정치적 신념에 위배되는 강요를 하게 되는 것이 아닌지 세심히 살펴야 한다. 

  그럼에도 학생의 자기 이익의 관점에서 정치에 무관심한 학생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중요하다. 학생들이 정치 문제에 관심을 가지도록 돕고 민주주의에서 벗어난 학생들에게 (교사의 민주적 교육 운영 등의)민주주의를 위한 교육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과정은 교사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사회교육가, 교장, 그리고 학교 밖 활동가들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한다.


시민교육-논쟁 수업 - 합의의 문제

  보이텔스바흐 합의가 형성되고 확산되는 과정을 통해 서울시 교육의 합의 시도 실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보이텔스바흐 합의는 진보와 보수 제 세력들의 토의와 합의를 통해 형성되었지만 우리의 합의 시도에는 보수의 불참이 있었다. 두 합의 시도 모두 진보 시민단체인 징검다리 교육공동체가 주관했다. 이에 한국 교총은 이 컨센서스 시도에 참여를 하지 않았다.(서울신문, 제 2 인헌고 막자고 했지만 진보만 나온 반쪽 교원 토론,  2019.12.17.)

  합의 시도의 조급성도 문제다. 인헌고 사태와 관련된 합의 시도의 경우 70여명의 참석자들간 논의와 합의까지 채 3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제대로 된 토의가 이루어졌을리 없고 논의의 결과도 추상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조선에듀, 서울 중고교 교사 사회현안교육 원칙 합의… 현장 적용 여전히 모호 지적도, 2019.12.17.). 이는 최소 인원으로 숙박을 하며 심도 있게 합의점을 찾았던 보이텔스바흐 합의와 비교가 된다. 또한 보이텔스바흐 합의는 처음부터 ‘최소 합의’의 요구에 따라 보수와 진보 모두 공통 분모를 찾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 ‘최소 합의’는 세력들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을 들어내는 것을 말한다. 정치 세계의 극한 대립이란 도덕적, 이데올로기적으로 양보할 수 없는 어떤 지점때문에 생기는 것인데 이데올로기에 과몰입되어 있는 우리의 사회적 현실에서 ‘최소 합의’는 꼭 필요하면서도 도달하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토양의 문제가 있다. 1960년대 이후 독일의 정치적 극한 대립이 현재 우리 사회의 대립과 닮은 점이 있다. 하지만 독일의 좌우는 각각 정치 교육에 관한 교육학적 비옥한 토양을 가지고 있었다. 각각의 비옥한 토양이 있었기에 보이텔스바흐 합의라는 농사짓기에서 작은 열매를 맺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반면 우리는 철학적, 교육학적 깊이 없이 현장 교원단체들의 합의 시도를 하고 있다. ‘반석위에 집을 짓지 않고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상황이다. 정치 학자, 혹은 교육학자들의 심도 있는 연구와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시민교육이 민주사회를 살아갈 적합한 시민 양성과 관련이 있다고 할 때 학교의 시민교육에서 현실의 논쟁성을 회피하지 않고 중요하게 다루어야 하는 이유는 민주 사회 자체가 논쟁적 사회이고 이를 투쟁, 갈등의 중재, 합의 등으로 해결해 나가는 사회이기 때문이다(Hess, 2009).  그렇게 때문에 영국의 중요한 시민 교육 보고서인 크릭보고서는 논쟁 수업에 관한 내용을 별도의 섹션으로 분류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QCA, 2008). 유럽 평의회는 논쟁 수업과 관련된 교사 지도 자료를 발간하고 연수를 진행하고 있다(Kerr. D. E. & Huddleston. T, 2021). 미국은 사회과 교육에서 논쟁 수업을 매우 중요한 시민 교육의 방법으로 취급하고 있다(김진아, 2019).    사회의 여러 영역에서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도 논쟁성을 시민 교육의 측면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한다고 할 때 이 책을 통해 두가지 시사점을 얻게 된다. 하나는 보이텔스바흐 합의와 같은 논쟁 수업의 최소합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최소합의가 있어야 현장의 교사들이 논쟁 수업을 중요한 수업방법론으로 끌어들이는 데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합의의 과정이다. 보이텔스바흐 합의와 같은 합의가 가능하려면 우리 사회도 정치 교육의 비옥한 토양을 가꾸어야 할 것이다. 좌우 세력의 숙의를 통한 최소 합의를 위한 실질적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그리고 이 중심에 12월 연구소가 있어야 한다는 상상도 해보게 된다) 



 참고 문헌 


김진아(2019). 미국에서 논쟁 수업을 둘러싼 논의. 역사교육연구, 34, 47–91. 

QCA.(2008). 크릭보고서(개정번역판)-학교시민교육과 민주주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Hess, D. E.(2009). Controversy in the classroom: The democratic power of discussion. Routledge.

Kerr, D., & Huddleston, T.(2021). Teaching controversial issues through education for democratic citizenship and human rights: Training pack for teachers. Council of Europe.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